아무래도 좋을 그림 - 여행을 기억하는 만년필 스케치
정은우 글.그림 / 북로그컴퍼니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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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기록하고, 그 순간을 기억하는 방법.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마 사진을 선택할 것이다.
눈에 닿는 모든 모습을 바로 저장할 수 있으니 이보다 편리한 방법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이 책은 조금 다르다. 만년필을 이용한 여행 스케치가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다.
필기구는 종이에 닿을 때, 저마다 다 다른 느낌으로 흔적을 남기는데 그런 의미에서 펜촉과 잉크의 만남이라니 어쩐지 신선하고도 묘한 매력이 느껴진다.

 


창문과 문의 모양, 벽의 질감, 건물의 분위기, 곡선과 직선 등.
수없이 많은 선이 모이고 덧그려지며 명암과 입체감을 구축한다.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사각사각, 슥-슥- 펜촉이 종이와 맞닿아 길게 자국을 남기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곳의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전해진다는 점.
바티칸의 웅장함도, 타이베이 야시장의 북적거림도 모두 다 알 수 있었다.
또한 외국의 독특한 풍경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창경궁, 부여의 무량사, 합천 해인사처럼 기와의 멋을 알 수 있는 작품들도 있어 그림을 구경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한 책이었다.

 


그런데 새삼 그런 생각을 해본다. ‘빨리빨리’에 익숙한 우리는 차분하고 느긋하게 즐기는 것을 어느 순간 잊지 않았나 하는 생각.
유명한 곳이니까, 남들이 많이 가봤다고 하니까 무조건 일정에 넣고 표면적인 것만 훑어버린 여행을 한 것은 아닌지... 물론 그런 여행이라도 본인이 만족하면 뭐 어떤가 싶다. 여행에는 정답이 없으니까. 그래도 명소만이 여행의 다는 아니라는 점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여행은 점(spot)이라기보다 시간의 연속선상에 존재하는 모든 순간이니 말이다.
이 책은 그러한 부분을 잘 알려주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역사적이고 종교적인 건축물 외에도 도시의 모습이나 골목길, 사람과 삶의 단편들을 만년필 특유의 아날로그 감성으로 솜씨 있게 펼쳐낸다. 

 


에피소드 중에서는 아버지와 함께 했다던 파리 여행기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글쓴이는 도시를 도보로 여행하는 것은 무리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그의 아버지는 파리를 걸어서 돌아보자고 제안한다. 결론적으로 글쓴이는 의외의 사실을 깨닫게 된다. 걷다 보니 파리 역시 사람이 만든 도시이며 자동차를 탔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들이 걸음으로써 눈으로 이것저것 볼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걷다 지치면 근처에서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다시 걸으면 그만이라고 하니 글만으로도 충분히 그 좋은 여운이 마음에 와 닿는 기분이었다.
바쁘게 이동하며 이곳저곳을 구경하는 것도 나름의 장점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도시를 천천히 걸으며 곳곳을 느껴보는 여행도 괜찮을 것 같다. 때로는 이런 것들이 더 특별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좋은 여행법을 물어오는 이들에게 글쓴이는 그곳의 일상을 보라고 조언한다.
언젠가 여행을 떠나게 되면 이 말을 꼭 떠올려보리라. 앞으로는 시장이나 골목길도 유심히 챙겨보는 센스를 발휘해야겠다.

 


여행은 어쩌면 파리의 에펠탑을 보는 것보다 에펠탑을 보러 가는 과정에 있다.
그 속에 담겨 있는 일상의 아름다움에 조용히 천착하는 것이, 적어도 내겐 여행이다.
시장은 이런 일상이 모인 가장 대표적인 공간이다. 그래서일까.
이국의 시장에서 나는 약간 ‘하이High'상태가 된다.
우리의 삶은 결국 직접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서 지나칠지도 모를 수많은 일상이 모여서
이루어진다. 누가 내게 여행이 뭐냐고 물어온다면 그건 이 세상의 사소한 것들을
들여다보는 가치를 깨닫는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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