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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고 푸른 사다리
공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공기를 가르며 멀리 퍼져 나가는 수도원의 종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것만 같다.
신부 서품을 앞둔 베네딕도 수도회의 젊은 수사 정요한.
그러던 어느 날 아빠스(Abbas, 대수도원 원장)님 조카 김소희가 종교인들의 스트레스에 대한 논문을 쓴다며 수도원을 찾아오게 되는데……
수사님들이 모여야 하나 결국 요한만 왔다. 그래서 면회실에서는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이성에 대한 호감도 억제 연구가 중요한 만큼 요한에게 사랑 이야기 듣고 싶다고 하는 그녀.
처음에는 아빠스님의 조카에 불과했지만, 요한은 점차 그녀에게 끌리는 자신을 발견해 본다.
그렇게 그녀의 존재는 어느새 요한에게 환한 빛이 되어 가슴 속에 크게 자리 잡게 된다.
그날 처음 나는 이 세상이 그녀가 있는 장면과 그녀가 없이 텅 비어버린 장면으로
구별된다는 것을 알았다. 한 여자가 여기 도착했을 뿐인데 이곳은 완전히 다른
곳으로 변해버렸다. 한 사람의 이름이 마음에 도착하고 나면 그녀가 살고 있는
도시의 이름이 어느 날부터 완전히 다른 이름으로 의미 지어지듯이 말이다. (p.84)
흴 소(素) 바랄 희(希). 그녀의 이름은 하얀 희망. 그 이름을 부르면 어디선가
흰 꽃들이 무리지어 떨어져 내리는 듯했다. (p.95)
하지만 이 소설은 단순히 인물들이 등장해 사랑을 하고 갈등을 풀어나가는 여느 소설과는 좀 다르다.
인간 근원적인 모습을 탐구하며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해가는 한 젊은 수사의 인생 순례기라고 할 수 있겠다.
소설은 다양한 사랑 이야기를 보여주며 더불어 삶과 죽음, 신과 사랑, 인간 삶의 본질적 뿌리에 대해서도 두루 파헤치고 있다.
'하느님 대체 왜?'라는 물음과 씨름했다는 작가.
우리 또한 살아가면서 종종 그런 물음표를 떠올려 봤으리라.
어째서, 왜 그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그녀(소희)를 사랑한다고 주님께 고백 기도까지 하고 수도원을 떠나기로 결심한 요한.
하지만 인생은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
그건 마치 맑은 날씨의 갑작스러운 폭풍우처럼 순식간에 다가오는 것과 같았다.
명석한 두뇌, 논리적인 사고로 언제나 냉철하고 날카로운 분석을 했던 미카엘.
아름다운 얼굴과 고수머리, 흐드드득 특유의 웃음소리, 선의가 가득해 모두가 사랑했던 안젤로.
사람들은 요한을 포함해 이들을 ‘미, 안, 요’ 수사님들이라 불렀다.
그런데 미카엘과 안젤로가 교통사고로 곁을 떠나갔다.
순간 목 안에 뜨거움이 울컥 올라왔다.
수도원 안에서 동기였고 형제였고 서로 아꼈던 그들이건만, 이별은 한순간이었다.
그리고 할머니가 들려주신 할아버지 이야기.
토마스 수사님이 들려주신 평양 감옥과 옥사덕 수용소 이야기.
마리너스 수사님이 들려주신 빅토리아메러디스 호 이야기까지.
잠시 눈물샘을 자극해 몇 번이나 심호흡했는지 모른다.
모든 이야기 속에 자신만의 깨달음이 있었고 이미 사랑이 있었다.
문득 토마스 수사님이 요한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떠오른다.
“현재 나는 사랑합니다. 그게 전부예요."라는 말을 말이다.
"사랑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입혀요. 사랑은 자기의 가장 연한 피부를
보여주는 거니까요. 사랑은 자기 약점을 감추지 않는 거니까요. 사랑은 상대가
어떻게 해도 내가 사랑하는 거니까요. 사랑은 상처를 허락하는 것이라고, 요한 신부가
그랬죠. 기꺼이 받아들여 봉헌한다고. 그 이후로 음, 그렇구나 상처 입겠구나 하고
시작하면 신기하게도 더는 상처 입지 않아요. 요한 수사님, 저는 그 이후로 매사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그리고
현재 나는 사랑합니다. 그게 전부예요." (p.2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