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옷을 입으렴
이도우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마치 오래된 앨범을 꺼내 빛바랜 사진들을 바라보는 기분이다.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현상된 사진은 묘한 매력이 있다.
나름 그 순간의 분위기를 잘 담으면서도 인물들의 표정은 생동감이 살아 있다고나 할까.
가끔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그 시절에만 볼 수 있는 것들까지 고스란히 찍혀있을 때도 있고 말이다.
이 책이 보여주는 주인공 고둘녕의 모습도 바로 그러했다.
세 평 남짓한 옷수선집을 하며 생활하는 현재,
그리고 아버지 손에 이끌려 외가에 맡겨졌던 과거 어린 소녀의 모습이 함께 어우러지며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그때는 몰랐다.
어린 시절 모든 것들이 나이를 먹은 후에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추억이 되리라고는.
매일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은 듯 반복되는 하루.
그러니 당시에도 하루하루가 보통의 여느 날이라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이라도 지금 돌이켜보면 참 특별했던 것 같다.
소소함 가운데 즐거운 일도 있고 힘든 일도 있었다. 
어쨌든 그것이 다 모여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들어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특별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포플러 신작로를 따라 걸으면 모암마을이 나타나고 거기에 둘녕의 외가가 있다.
외할머니, 이모부와 이모, 경이 이모, 율이 삼촌, 그리고 이종사촌 수안.
어린 소녀였던 둘녕은 낯선 친척들 앞에서 얼마나 서먹하고 어색했을까.
아직은 어리광을 부려도 될 나이건만 그녀는 일찍 철이 들어버렸다.
조심스럽고 차분하고 되도록 누를 끼치지 않으려 하는 둘녕.
그래서 더 마음이 간다. 살며시 토닥여주고 싶은 기분이다.

 


마당에 누워 올려다보는 밤하늘엔 뭇별이 반짝였다. 외가엔 많은
식구가 살았지만 내가 모암마을에서 지내기 시작한 처음 두 해를
돌이켜볼 때, 손을 내밀면 질감이 느껴질 것 같은 식구는 수안과
외할머니뿐이었다. 다른 이들은 그림자처럼 멀게만 느껴졌고 그들의
적절한 무심함과 거리감이 나를 외롭게도 편안하게도 만들었다. (p.42~p.43)

 


PC방이나 컴퓨터, 인터넷, 스마트폰, 휴대용 게임기가 없던 그 시절.
그래도 수안과 둘녕의 놀이는 풍성하기만 하다.
종이인형 놀이, 율이 삼촌의 끝방을 아지트 삼기,
고목나무 구멍을 비밀장소 삼아 물건을 넣어두기,
냇가에서 편지를 넣은 사이다병을 띄워 답장을 기다리기 등.
가장 두근거렸던 것은 세계명작 전집, 새 책을 읽는 즐거움에 대한 부분이었다.
수안과 둘녕은 마음에 드는 낱말을 뽑아 빙고 게임을 한다.
아니면 이야기를 만들며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냈는데 그녀들의 상상력과 감수성에 놀라고 말았다.
작은 기계 화면만 들여다보는 지금의 아이들보다는 훨씬 다채롭게 느껴질 정도랄까.

 


의지가 되는 소중한 친구.
아마 둘녕과 수안은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존재였으리라.
굳이 방을 같이 쓰고, 사촌지간이라 그런 것은 아니다.
몸이 약하고 잠을 잘 못 잤던 수안을 위해 그냥 가지고 있으라고, 부적이라며 환약을 만들어주던 둘녕만 봐도 그렇다.
수안 역시 그것을 기쁘게 받는다.  
둘의 모습을 보니 왠지 알 것 같더라.
진심으로 걱정하고 괜찮아지길 바라는 마음, 그리고 그것을 전해 받은 수안.
환약이 엉터리인지 아닌지는 상관없다. 둘에게는 마음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것이다.   
하지만 분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고등학교로 올라가면서 반이 다르고 방과 후 활동이 달라서 그런지 서로 함께하는 시간은 서서히 줄어든다.
특히 둘녕은 고등학교는 다니지만,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뜨개질 가게에서 일하게 되었고, 방앗간 옥탑방으로 이사했기에 수안의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
그리고 강원도 국립공원으로 수학여행을 간 가을.
둘녕은 뒤늦게 수안이 향한 목적지로 따라가지만 결국은 함께해주지 못했다.
그건…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수안에게 언젠가부터 잠옷을 지어주고 싶었던 둘녕.
산호가 태워 주었으니 그걸로 되었을 거다.
둘녕은 이제 다시 모암마을로 돌아오려 한다.
안녕. 내가 다시 왔어. (p.461)
이제는 편안해지기를. 둘녕이 앞으로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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