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묵시록 - 하
신용우 지음 / 작가와비평 / 201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봉림대군이 박 승지로부터 소현세자의 승하 소식을 전해 듣고는 급히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환국했다.
자신의 형님에 관한 죽음에 김자점이 일을 꾸몄음을 알게 되지만 봉림대군 역시 청나라에 볼모로 있었던 터라 주변에 세력이 없었다.
무기보다 더 무서운 건 사람의 혀라는 생각을 해본다.
뛰어난 언변과 빠른 두뇌회전을 가진 김자점의 세치 혀는 인조에게 듣기 좋은 말만하며 왕의 눈과 귀를 가려버린다.
신하된 입장보다 자신의 이익이 먼저였으니 그에게 바른 마음가짐이 없었음이 참으로 안타깝다.
그것은 인조도 마찬가지다.
인조는 자신의 ‘자리’에만 집착한 왕이었을 뿐 ‘아버지’는 아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소현세자를 독살한 것도 모자라 강빈 마저 역적으로 몰아 죽이고 원손 석철과 그 동생을 제주도로 유배 보내어 죽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다름 아닌 자신의 아들이고, 며느리이고, 손자였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왕의 자리에 있을 것 같던 인조도 봉림대군이 환국한 지 4년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 뒤를 이어 봉림대군이 즉위했다. 그가 바로 효종이다.


효종은 즉위하자 공서파인 김자점과는 다른 붕당인 청서파를 대거 중용했다.
그리고 대사간 김여경이 김자점의 탄핵상소를 올리며 온갖 비리들을 고발하자 효종은 김자점을 홍천으로 유배를 보낸다.
물론 가만히 있을 김자점이 아니다. 효종이 군비를 증강해 청나라를 치려한다는 소문과 우암 송시열이 인조의 비문인
장릉지문에 명나라 연호를 썼음을 청나라에 밀고함으로써 청나라 군사가 국경에 몰려오게 되었다.
여기에 효종은 청나라에서부터 신뢰관계를 가지던 용골대장군과 다이곤에게
김자점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며 오해하지 말라 서찰을 보내 위기의 순간을 넘긴다.
김자점은 어느 진사의 고발상소가 신호탄이 되어, 줄줄이 수집된 증거자료들로 대역죄인 판명을 받아 죽게 된다.
효종은 즉위한 순간부터 소현세자의 뜻을 이어받아 요동 수복에 대한 생각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군사력 역시 강해져야 하는데 이를 위해 어느 붕당에도 속하지 않은 이완을 기용함으로써
어영청 개편에 힘쓰고 10만 양병을 양설 하도록 노력하게 한다.
그러던 중 청나라부터 황제의 칙서가 도착한다.
나선(러시아)정벌을 위해 청나라를 도와 싸워달라는 내용이었다.
효종은 효종 5년과 9년, 두 번의 나선정벌군을 구성하며 요동에 조선 군사를 주둔시키기를 원했다.
청 세조 역시 용골대 장군과 구왕 다이곤의 주선으로 소현세자와 자신이 맺은 조선 군사들의 요동 주둔 약조를 잊지 않고 있음을 천명하고 있으니 전쟁 없이 피를 흘리지 않고 요동을 선점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이다. 더군다나 그곳은 구려, 즉 고려의 후손들이자 대진국의 후손인 우리 민족의 백성들이 살고 있으니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신들의 반대는 만만치 않았다.
청나라 입장이 언제 바뀔지 모르며, 다른 꿍꿍이가 있다고 믿었다.
효종의 스승이었던 송시열 또한 요동은 우리 땅도 아닌데 우리가 지킬 필요가 있냐며 효종의 뜻에 반대하고 나섰다.
뿐만 아니라 성균관 학생들과 지방 유림들의 반대 상소도 끊이지 않고 있으니 효종에겐 힘에 부치는 상황이었으리라.
결국 효종은 어전회의에서 나선정벌군을 철군하겠다고 말한다.
요동에 군대를 주둔 하더라도 그 후가 문제였던 것이다.
이는 윤선도나 유형원도 마찬가지로 걱정하며 왕에게 짚어준 부분이다.
군비증강에 따른 재원 마련이라든가 군대 파견 후의 나라 방위에 관한 부분은 현실적으로 아직 힘이 없었다.
그렇게 요동수복의 꿈은 세월과 함께 흘러간다.
어느 날 효종은 박 승지에게 자신이 써온 서책을 건네며 소현세자의 것과 함께 잘 보관해 훗날 성군이다 싶은 왕이 나타나면 전해 달라 당부한다. 이렇게 효종의 이야기도 끝을 맺는다.


효종 역시 왕이었음에도 많이 힘들었으리라 짐작해본다.
자신이 아버지였던 인조가 든든한 방패막이가 되어주지도 못했고 왕권도 약했으니 참고 인내하며 하나씩 키워나가야 했다.
무엇보다 효종의 생각과 뜻을 같이할 사람이 부족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인데 요동수복의 기회가 왔다 하더라도 그것을 지지해줄 사람이 너무나 적었다.
준비되지 못한 재원 부족은 나중문제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저 고군분투했던 효종의 노력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아 안쓰럽고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에필로그를 읽자 유득공이 대진국 발해의 역사를 지어 정조에게 바친다.
『대진국사』란 이름 대신 『발해고』라고 이름을 붙인 것에 미완성의 여운을 남긴 유득공.
지금은 힘이 약해서 잠시 빌려주고 있는 영토다. 하지만 후손에게는 반드시 우리나라의
영토가 어디까지인지를 밝혀주고 싶었다.(p.303)
는 그의 마음에 공감하는 바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