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아주 먼 섬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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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심히 본 표지에는 저 멀리, 바다 쪽에 두 사람이 있었다. 흐릿한 모습이라 눈을 가늘게 떠봤으나 그런다고 해서 원래 흐렸던 형상이 저절로 또렷해질리 없다. 그럼에도 가까이하면 좀 나을까 싶어 이번에는 책을 한껏 끌어당긴다. 그런데 그 순간 반짝,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혀 보이지 않던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것은 제목을 따라 얇게 입혀진 홀로그램이었다. 너무 밝은 곳 혹은 어두운 곳에서 봤다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를 은은한 반짝거림. 그렇게 글자들은 바다와 하늘의 푸름을 배경으로 빛의 각도에 따라 가지런하고 단정하게 오색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태양과 바람과 바다와 모래의 어느 작은 섬.
그곳에 내려와 살면서 소금창고를 도서관으로 만드는 일을 하고 있던 정모는, 어느 날 어렸을 적 친구인 연수에게서 그녀의 딸, 이우를 잠시만 돌봐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형형색색의 요란한 색으로 머리 염색을 한 이우의 등장은 강렬하기만 하다. 이우는 반찬을 챙겨주는 이웃의 이삐 할미, 청각 장애로 귀가 안 들리는 소년 판도와 만나게 되고 가끔씩 소금창고에 들러 책 정리하는 일을 돕는다.
  이렇게만 보면 섬의 풍경은 무척 평화롭고 단순하고 단조롭다.
하지만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고 했던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 마음에도 역시 저마다의 상처와 아픔이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음이다.

 

 

  고등학교를 휴학 중인 ‘이우’는 태이가 죽은 후 불면증이 생겨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마음 또한 좀처럼 잡지 못한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정모’는 시신경 세포의 손실로 점점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리고 어렸을 적 자신과 연수, 태원은 늘 어울리는 친구였지만 태원의 아버지와 자신의 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일은 그에게 상처로 남아있다. ‘태원’은 소금창고 소유주이지만 실질적인 결정권자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아버지이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돈과 사업에 있어서 사람들에게 무자비하고 냉정하게 구는 모습을 못 견뎌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다. 잠시 이우를 보러 온 연수는 오랜만임에도 서로가 서로에게 속 후벼파는 말을 주고받는데, 엄마가 없어 마음에 구멍이 생긴 ‘판도’에게는 그마저도 부러울 뿐이다.

 

 

  상처는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말이 있지만, 소설을 읽고 있으면 시간보다는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구나 싶다.
  정모, 이우, 이삐 할미와 판도. 나는 이들이 주고받는 대화라든가 감정의 교류가 너무나 좋았다. 이것저것 챙겨주며 모두를 품어주는 이삐 할미와 반말과 존댓말을 오가며 투닥거릴 때가 많지만 점점 친해지고 있는 이우와 정모. 그리고 이우의 손바닥에 글을 써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판도를 볼 때면 덩달아 마음이 점점 몰랑몰랑해져 온다고나 할까. 이들의 늘 따스한 온기와 편하고 기분 좋은 기운이 내게도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하여 조금씩 사람들에게 마음을 내보이고 섬도 돌아다니며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나가는 이우, 그녀는 풍경을 바라보며 태이의 생각을 하고, 안부를 전한다.

 

 

여기 말이야. 천 개도 넘는 섬들이 있다니, 상상이 돼? 썰물이 지면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섬도 있어. (...) 섬들은 다 다르고 다 예뻐.
아, 있잖아. 난, 여기서 조금씩 충전되고 있어. (p.104~105)

 

 

  한편, 정모는 도서관 만드는 일을 통해 여러 가지를 느끼게 되고, 자신의 눈 상태를 담담히 받아들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지금의 일에 집중하기로 한다.
  소설 초반, 이우가 정모에게 맡겨졌을 때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데 개인적으로는 그게 너무나 기억에 남는다. 그는 이우에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등의 일장 연설도 늘어놓지 않았다. 정모는 그저 이우의 세 끼를 어떻게 책임지나 그 걱정이었다. 자신이야 대충 먹거나 걸러도 된다지만 누군가를 돌본다고 생각하니 밥이 가장 신경 쓰였나 보다.
  우리 주변에는 친하든 친하지 않든, 마치 그게 인사라도 되는 듯 자신의 궁금증을 아무렇지 않게 물어보며 그 사람을 바로 판단하려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래서 그런지 난 그렇게 하지 않은 정모가 참 고맙게 느껴졌다. 어른이라는 이유로, 이미 너보다 더 살아봤으니 인생을 다 안다는 식의 어조로 넌 무조건 들어야 한다는 태도를 보여주지 않아서. 그리고 이우의 상황이 궁금했을 법한데도 질문하지 않고 그냥 지켜봐 주며 나아가 이러쿵저러쿵 이우를 마음대로 판단하지 않아 줘서. 그건 무관심과는 다른, 정모 나름의 배려였던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다시 한번 표지를 보니 보일 듯 말 듯 한 제목의 그 은은한 빛이 너무나 좋았더랬다. 그것은 차분하고도 고요한 예쁨, 이 소설의 여운을 잘 담아낸 무지개의 색깔이자, 한편으로는 투명하지만 보석처럼 반짝이는 소금이 아닐까 싶었다.
  요즘에는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알고 보면 예전에는 참 귀했던 소금. 소설에서 정모가 이우를 염전으로 데려가 소금꽃을 보여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만들어지는 과정을 생각하면 소금은 힘들고 만만치 않은 작업으로 얻어지는구나 느끼게 된다.
  새하얀 소금이 달리 보인다. 이제는 소금을 마주할 때면 ‘흔하다’ 대신 ‘귀하다’와 예쁘게 피어난 ‘꽃’으로 바라보며 이 소설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지천으로 널렸다고 소금 우습게 보지 마라. 오래전 아프리카에선 금값이었다. 노예는 제 발 크기만한 소금판 하나 값에 팔렸지. 로마의 용병들은 월급을 소금으로 받기도 했고. 샐러리의 어원이 소금이잖니. 저기, 바다 가까운 저수조에선 침전과정을 거치는 거지. 흙이나 죽은 물고기 같은 불순물들. 그런 다음에야 얕은 저수조로 옮겨와. 증발지에서 물이 더 줄어들면 결정을 이루면서 소금꽃이 피기 시작해. 이런 과정이 기후와 습도에 따라 매번 달라져. 결정지의 바닷물은 아주 팽팽해. 소금꽃이 피기 직전엔 염도가 16, 17까지 오르지. 필 듯 필 듯 주춤거릴 때 소금물의 뺨을 후려치면 물이 파르르 성깔을 부리며 꽃을 토해내는 거야. 몽글몽글." (p.108)


“꽃은 어디 있는데?”
“저기 적, 물속에 하얗게 엉겨 있는.”
"그냥 소금이잖아!"
"꽃이 별거냐. 징허게 모인 기운이 터져나오면 그게 꽃이다."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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