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껴 읽고 싶은 시들이 있다

  이정록 시인의『의자』와 황동규 시인의『사는 기쁨』.
  두 권 모두 마음을 달래주고 따스함과 정다움으로 마음을 두드리는 시집이다.
좋은 시들이 많아 읽고 또 읽어도 좋더라. 평소 바쁘면 책 읽을 시간도 마땅하지 않은데 그럴 때는 시 한 편을 읽어도 좋다. 이 두 권의 시집은 특히 마음이 고단한 날, 은은한 차를 마주하듯 시 한 편을 음미해보라 말해주고 싶다. 마음을 충전하는 데는 티타임과 더불어 시타임을 갖는 것도 참 괜찮은 방법이다.

 

 

2. 이정록 시인의『의자』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나에게는 나무나 꽃만큼 좋아하는 풍경이 있다. 바로 긴 나무의자가 있는 풍경이다. 다리가 아파 앉을 장소를 찾는 게 아니라 그저 주변을 지나치다 벤치를 발견하는 것뿐인데도 어쩐지 의자가 있는 풍경은 반갑기만 하다.
그것은 마치 자신을 그대로 내어주며 잠시 쉬어가라고, 어떤 방해도 하지 않을 테니 여기에 머물다가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누군가는 거기에 의자가 있든 없든 크게 신경 쓰지 않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가만히 놓여있는 의자로부터 상냥함과 다정함을 전해 받는다.

 

 

  의자를 바라보면 자연스레 이정록 시인의 시집, 『의자』가 연상된다. 단어가 같으니 그러는 것 아니냐 하겠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이 시집이 전해주는 느낌, 잠시 마음이 기댈 수 있도록, 쉬어갈 수 있도록 따스하고 온기를 전해주는 시들이 가득해서다.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의자」전문)

 

  이 시는 한동안 내 몸속 곳곳을 누비며 여러 감정의 여운을 불러일으켰다. 참외나 호박도 식구이므로 의자를 내줘야 한다든가 너도 좋은 의자 아니었냐는 문장은 왠지 모르게 몽글몽글함, 뭉클함, 포근함을 한데 어우러지게 했다. 그처럼 어머니의 말씀에는 걱정과 눈길이 고루고루 다 닿아 있음이 느껴졌던 것이다.
  여기서 의자의 형체는 중요하지 않다. 지푸라기나 똬리도 훌륭한 의자가 될 수 있다. 생각해보면 참외나 호박 입장에서는 사람이 사용하는 딱딱한 의자보다 지푸라기나 똬리가 더 안성맞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그 존재 자체로 누군가에게는 마음을 내려놓고 기댈 수 있는 의자가 되기도 한다.

 


  이정록 시인은 세상을 바라볼 때 무언가를 업신여기거나 무시하는 법이 없었다.
  보통은 쓰임이라든가 가치를 따지며 우위를 매기기 마련이지만 시인은 그 자리에 있는 사물과 생명을 두고 무엇 하나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도리어 주의를 기울여 바라보고 인간의 삶과 다름없이 마찬가지의 관심과 애정으로 대했는데 그래서 시를 읽으면 읽을수록, 일상을 들여다보는 시인의 통찰력과 마음 씀씀이에 감탄하게 되었다.

 

날고 싶은 것들이 죽어 흙이 되면 기왓장으로 태어난다.
절 마당 가득한 저 기왓장들은 곧 하늘로 날아오를 것이다. (...)
날고 싶던 것들의 극락왕생에 낙서하지 마라
-(「햇살의 經文」부분)

 


잘 마른
핏빛 고추를 다듬는다
햇살을 치고 오를 것 같은 물고기에게서
반나절 넘게 꼭지를 떼어내다 보니
반듯한 꼭지가 없다, 몽땅
구부러져 있다


해바라기의 올곧은 열정이
해바라기의 목을 휘게 한다
그렇다, 고추도 햇살 쪽으로
몸을 디밀어 올린 것이다
그 끝없는 깡다구가 고추를 붉게 익힌 것이다
구부러지는 힘으로 고추는 죽어서도 맵다


물고기가 휘어지는 것은
물살을 치고 오르기 때문이다
-(「구부러진다는 것」부분)

 


분식집에서 공사장 함바까지
끼니 끼니 공항에서 열차 식당 칸까지
네가 사람들과 가까이 하는 까닭을
다들 싸고 편하기 때문이라 알고 있지만
나는 공부를 잘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지금 너는 이파리와 잔뿌리 다 떠나보내고
학생부군으로 아름다이 누워 있다 살아생전
다른 무와는 달리 뿌리의 반을 흙 속에 묻고
나머지는 햇살에 맨살 내밀었다 땅 속으로 디딘 만큼
하늘 쪽으로 상반신을 들어올렸다 그 힘이다
반달처럼 노랗게 떠올라서 라면에 얹히든지
달빛 기둥처럼 척척 김밥에 궁합을 맞추는 까닭은
흙과 하늘을 절묘하게 끌어안고 있기 때문이다
-(「단무지」부분)


  기왓장은 날고 싶은 것들로 이루어진 또 다른 모습이고, 고추의 꼭지나 해바라기가 구부러진 것은 햇살 쪽으로 몸을 향한 곧은 열정에 기인한 것이며, 단무지가 널리 사용되는 이유는 하늘과 땅의 조화로움을 두루 갖추었기 때문임을 일러주는 시인.


  시인의 시선은 하나의 관찰경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동안 깊게 생각해본 적 없었던 사물이나 현상, 사람과 삶에 대해 새로운 발견이라든가 나름의 의미를 알게 된다.
  이러한 시들이 좋다. 인간의 내면적 불안과 상처, 공허함만으로 끝나는 시가 아니라서 좋고,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며 일률적인 잣대를 들이밀지 않아서 좋다. 우리 주변에는 ‘너를 위한 조언’을 한다면서도, 실제로는 오만하고 거만한 말들만 쏟아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가까운 사이에서도 상대의 사정이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그저 자신들의 잣대로 저 하고 싶은 말만 쏟아내는 경우는 또 얼마나 허다한가.

 

  그러나 이 시집은 그러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것은 묵묵히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그리하여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사물이든 풀꽃이든 나무든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특성을 세심히 담아내며, 저마다의 의미를 품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들은 때로는 진중하게 때로는 위트 넘치게 표현되기도 하는데, 시는 어느새 읽는 사람에게 위로와 힘을 한 움큼 쥐어준다.

 

 

 

3. 황동규 시인의 『사는 기쁨』
  위안과 격려를 주는 또 하나의 시집을 꼽으라면 황동규 시인의 『사는 기쁨』을 소개하고 싶다. 칠십 대 중반의 시인은 자신의 몸 상태나 시력이 예전 같지 않음을 느낀다. 하지만 그의 시선과 마음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깨어 있으며 약동하고 있다.

  시인은 일상의 장면들, 그리고 계절의 변화와 눈앞의 경치에서 느꼈던 감흥들을 생동감 있게 풀어낸다.

 

마을 안에 차 집어넣고
이 집, 한 집 건너 저 집, 또 저 집,
구름처럼 피고 있는 살구꽃과 만난다.
빈집에는 작지만 분홍빛 더 실린 꽃구름,
때맞춰 깬 벌들이 이리저리 날고
날개맥(脈) 덜 여문 나비들이 저속으로 오간다.
소의 순한 얼굴이 너무 좋아
소 앞세우고 오는 마을 사람과 눈웃음으로 인사한다.
하늘 구름이 온통 동네에 내려와 있으니
말을 걸지 않아도 말이 되는군.
차에 올라 시동 걸고도 한참 동안 밖을 내다본다.
꽃들의 생애가 이곳을 다시 지날 때
이 꽃구름들 낡은 귀신들처럼 그냥 허옇게 매달려 있다면......
꽃도 황홀도 때맞춰 피고 지는 거다.


다리를 건너 가속페달 밟으려다 말고
천천히 차를 몬다.
몸 돌려 보지 않아도
차 거울들 속에 꽃구름 피고 있고
차 거울로는 잘 잡히지 않으나
하늘의 연분홍을 땅 위에 내려받는 검은 둥치들이
군소리 없이 구름을 잔뜩 인 채 서 있겠지.
차를 멈추고 뒤돌아본다.
아 하늘의 기둥들!
-(「살구꽃과 한때」전문)


  마치 눈앞에 그러한 정경이 그대로 펼쳐지는 것만 같다. 누군가는 꽃나무를 보고도 으레 그러려니 당연하게 여겨 무심히 지나치기도 하지만, 시인은 삶의 순간순간들을 잘 포착해 자신의 눈과 마음에 고이 담아낸다. 덕분에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있었던 그 순간들의 아름다움과 풍부한 감성을 시인의 언어를 통해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이 시집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준다는 점이다. 살다 보면 이것저것 욕심이 안 생길 수는 없겠으나, 그렇다고 주어진 것에 소홀해서도 안 될 일이다. 삶이 거창하지 않으면 어떠하랴. 시인은 조금 부족해도 그 순간 주어진 것에 집중하면 때로는 그냥 그것만으로도 좋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삶이 뭐 별거냐?
몸 헐거워져 흥이 죄 빠져나가기 전
사방에 색채들 제 때깔로 타고 있을 때
한 팔 들고 한 팔은 벌리고 근육에 리듬을 주어
춤을 일궈낼 수 있다면!
-(「북한강가에서」부분)

 


늙어가는 시인 둘과 중년 사진작가 하나가 걷다 서다 한다.
(...)
여기저기 잔바람만 나다니다 들키는 이 한데에서
시인들과 들판이 무언가를 주고받았다.
무엇을?


안저(眼底)까지 환하게 달구던 소금밭의 새하얀 빛인가,
빛바래기 전 세월 어디쯤 소금 빛에 취했던 시인의 모습인가?
물어보려 몸을 돌리면
양쪽 다 고개를 흔든다.
과장 없이 무엇인가 주고받으니 그냥 좋은 거다.
지금은 속없이 소금 냄새만 풍기는 너른 들판과
오랜 동안 계속 입김 불어내 가벼워진 시인들의 지금이
그냥 어울리는 거다.
-(「버려진 소금밭에서」부분)

 


이왕 길을 벗어난 김에
물새들과 알 듯 모를 듯 같이 걷는 해변, 번지는 황혼,
금빛 우려낸 빛이 사방에 어른댄다.
바다를 향해 내논 테이블에 간단한 안주와 토속주 한잔.
눈앞에 캠프파이어가 불타는 삶이 꼭 있어야 하겠나?
하늘에 희한하게 하얀 반달 하나
찾으면 있고, 않으면 없고.
-(「내비게이터 끈 여행」부분)


  삶이 뭐 별거인가. 아, 물론 현실적으로 생각할 것도 많고, 고민도 많고, 따져 봐야 할 것도 많으니 별거가 맞기는 하다. 그렇지만 이따금 모든 근심을 다 내려놓고 저렇게 외쳐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면 자신이 삶에 휘둘리는 게 아닌, 삶을 휘두른다는 느낌의 차이가 생기기 때문이다.

 
  팍팍한 현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삶에 대해 사는 기쁨이나 즐거움보다는 괴로움이나 힘겨움이 더 커서 몸도 마음도 지쳐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럴 때는 “삶이 뭐 별거인가”라며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해보는 건 어떨까. 주변의 눈 닿는 것들과 교감하며 마음을 주고받아도 좋을 일이다. 꽃이든 나무든 사물이든 상관없다. 자신과의 대화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시인의 문장처럼 ‘과장 없이 무엇인가 주고받으니 그냥 좋은’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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