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강 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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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구성의 소설도 있을 수 있구나 싶어 신선하면서도 색다른 느낌을 받았다. 이 책은 ‘나’, ‘그녀’, ‘모든 흰’으로 이루어진 세 개의 카테고리가 있고, 거기에는 작가가 목록으로 만들었다던 흰 것에 관한 단어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리고 각각의 단어들은 그와 관련된 이야기나 느낌들을 짤막하게 담아내고 있는 형식이다.
  한강 작가의 『흰』은 마치 나무와 숲을 바라보는 듯한 매력이 있다. 어찌 보면 각각 독립된 한 편의 시 같으면서도, 한 발자국 떨어져 전체적으로 바라보면 그 안에서 연결되는 어떤 이야기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어머니가 낳은 첫 아기, 그러나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었다는 언니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하여 ‘흰’은 삶과 죽음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아우른다.

 


  글을 하나하나 읽다가 새삼 우리 주변의 흰 것들이 제법 많이 자리하고 있음을 발견해본다.
  흰 천의 배내옷, 하늘과 땅의 경계를 지운 도시의 새벽안개, 안개가 짙었던 섬의 아침, 어둠 속에서 희어 보이는 어떤 사물들, 흘러내리는 촛농, 유리창에 하얗게 얼어붙은 성에, 아무도 밟지 않은 서리, 하얀 나비의 날개, 성글게 흩날리는 눈송이들, 추워진 아침에 입술에서 나오는 흰 입김, 다른 색의 새와는 다른 감동을 주는 흰 새들, 정육면체의 각설탕, 바닷가에서 주운 흰 조약돌 등등.

 

  물론 우리도 시간을 들인다면, 작가가 목록으로 작성한 것들 이외에도 더 많은 하얀 것, 흰 것들이 있음을 찾아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들이 주는 느낌을 직접 문장으로 풀어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예를 들면 작가는 소금을 두고 ‘희끗한 그늘이 진 굴곡진 입자들이 서늘하게 아름다웠다’며 소금의 또 다른 면을 이끌어낸다.

  언뜻 비슷해 보이는 색깔 같지만, 알고 보면 저마다 다 다른 흰 감각과 감정이 있음을 보여주는 한강 작가.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작가의 섬세하고도 세밀한 표현력에 큰 점수를 주고 싶다. 덕분에 다양한 ‘흰’을 음미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얼어붙은 거리를 걷던 그녀가 한 건물의 이층을 올려다본다. 성근 레이스 커튼이 창을
가리고 있다.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흰 것이 우리 안에 어른어른 너울거리고 있기 때문에,
저렇게 정갈한 사물을 대할 때마다 우리 마음은 움직이는 것일까?
  새로 빨아 바싹 말린 흰 베갯잇과 이불보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거기 그녀의 맨살이 닿을 때, 순면의 흰 천이 무슨 말을 건네는 것 같다. 당신은
귀한 사람이라고. 당신의 잠은 깨끗하고 당신이 살아 있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잠과 생시 사이에서 바스락거리는 순면의 침대보에 맨살이 닿을 때 그녀는 그렇게 이상한
위로를 받는다. (「레이스 커튼」중에서)

 

  물과 물이 만나는 경계에 서서 마치 영원히 반복될 것 같은 파도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동안(그러나 실은 영원하지 않다-지구도 태양계도 언젠가 사라지니까), 우리 삶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또렷하게 만져진다.
  부서지는 순간마다 파도는 눈부시게 희다. 먼 바다의 잔잔한 물살은 무수한 물고기들의 비늘 같다. 수천수만의 반짝임이 거기 있다. 수천수만의 뒤척임이 있다(그러나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다). (「파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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