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일 혁명과 미국 없는 세계 - 세계 질서의 붕괴와 다가올 3개의 전쟁
피터 자이한 지음, 홍지수 옮김 / 김앤김북스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국 켄터키 대학의 패터슨 스쿨 출신으로 근래 전세계에서 각광받고 있는 지경학을 소개하고 그 관련 정보로 사기업 및 공적 기관 등에 소위 컨설턴트를 하고 있는 유명한 안보 전문가인 피터 자이한의 ‘셰일 혁명과 미국 없는 세계를 읽었습니다’ 이 책은 원제 The Absent Superpower 이며, 지난 2017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김앤김북스에서 번역 출판을 맡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21세기 미국 패권과 지정학’에 이어 자이한의 두번째 서평인데요.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춘근 교수의 추천사와 특별히 이번 번역판에는 저자의 한국어 서문이 실려 있기도 합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와 브레튼우즈 체제를 바탕으로 1945년부터 중국의 공산화와 소련의 핵실험으로 미국의 국제 정치 전략이 다소 수정되는 1949년 이후를 넘어 구소련의 붕괴 이후 냉전 종식 이후까지 자유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서방 진영과 최근에는 중국의 경제적 번영을 이끌었습니다. 이것은 저자가 보고 말하는 중요한 관점인 세계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 결과론적으로는 세계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대전 이후, 영국이 갖고 있던 대략적인 세계 패권을 미국이 그동안의 고립주의적 외교에서 탈피해 안보 동맹과 자국의 시장을 개방함으로써 서유럽과 일본을 재건시키고, 타이완과 한국과 같은 동맹국들의 경제의 외적 성장 뿐만 아니라 정치적 안정까지 보장해 온 것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미국의 개입은 우선적으로 중동을 비롯한 에너지 수출국에 의한 석유와 천연가스 수송의 지속적인 안전망을 미국 해군이 제공해 왔고 이 점은 분명 1972년의 석유 파동의 시기를 거쳐왔어도 경제 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 안보에 충분히 이익이 되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자이한은 여기에서 이러한 미국의 개입이 앞으로는 어려울 것이며, 심지어는 “미국이 분명히 세계에서 손을 떼게 된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돌아가는 상황의 가장 큰 요인이 미국 내에서 소위 셰일 혁명이 일어나고 있어 앞으로 미국이 해외의 에너지 수입의 의존도가 가면 갈 수록 축소될 것이고 그에 따라 전세계의 석유 운송로를 지키기 위한 미 해군의 역할이 도전을 받게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미국 셰일 생산 산업 단체의 홍보이사로 보일 정도로 이 분야의 애착이 있는 자이한의 이 책 1부는 앞으로 미국이 세계에 발을 빼게 되는 이유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2부는 이러한 세계에 대한 미국 탈개입의 시기에서 필연적으로 초래될 3개의 전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유럽 대 러시아, 이란-사우디아라비아, 중국-일본 등 각 국가 및 세력의 대규모 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을 꽤 상세한 국제 정치와 지리경제적 수단을 동원해 독자들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자이한의 글을 읽으면서도 약간 이해가 안 되는 점은 냉전 시기 이후 나날이 축소되는 미국의 국방비 지출에서 2001년 9. 11 이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하게 됨으로써 당시 여건이 좋지 않았던 미국 경제에 적지않은 타격이 됨과 동시에 한동안 이 국방비를 미국 전체가 지탱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조지 W. 부시가 전격적으로 중동에 개입함으로써 집권 시기에 대규모 국방비 지출이 있긴 했지만 전체적인 시기로 보면 국제 외교와 정치 무대에서 미국의 ‘거대한 악의 대항마’를 만들어 다시 군사 강국을 유지하는 것에는 아무래도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입니다. 물론 지금도 미국의 군사력은 미국 밑의 순위에 있는 국가들을 합치더라도 비할바가 없습니다만 저는 ‘셰일 혁명’에 의한 에너지 수급 문제의 패러다임 전환보다는 이미 미국은 군사력 투입에 점차 발을 빼고 있던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뒤이어 오바마 정부는 잠깐 ‘아시아로의 회귀 (pivot to Asia)’를 잠깐 대외에 천명하긴 했지만 사실상 직접적으로 어떤 정책이 추진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근래 중국의 지난 시절의 대국의 권리를 노골적으로 획득하려고 하는 것도 바로 지금 미국의 정치경제적 상황도 적지 않은 요인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지역내에 자신들의 이익을 해치는 지역 패권국이 나타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으므로 아주 수수방관은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러 국내적 요인으로 발생한 미국의 군사비 감소가 영향력 축소에 기여했고, 국내적 에너지 수요 문제가 이유가 될 수도 있지만, 중대한 요인은 되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책에서 제가 가장 동의하기 힘든 부분은 앞으로 발생할 중국-일본의 지역 대결에서 방향타를 잡고 있는 타이완과 한국을 분석하며, “한국으로서는 일본과 손잡는 게 뻔한 선택인 듯 보인다”고 애매하게 언급하며, 중국과 일본 사이에 줄타기를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며, 우리를 친중과 친일 양자 사이의 가능성을 살펴보며 분석을 시도하고 있지만 자료는 매우 부족합니다. 중국은 현재 우리의 제1 교역국이고, 일본은 미국이라는 수레바퀴 동맹의 한 축인데 한미 동맹관계를 고려하면 일본과 협력할 수 밖에 없다고 여기겠지만 이 미국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역사 문제를 빗대어 오로지 아시아인들 특유의 민족주의 근성이라고 말해왔던 것을 고려해 보면 한일관계에 대한 서양인들의 특유의 인종주의적 시각을 볼 수 있는데요. 우리의 내부에서 미래 있을 수 있는 중국과 일본의 경쟁에 과연 어느 한쪽의 손을 드는 것이 과연 이익일 것인가에 대해서는 면밀한 관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가 그만큼 중요해졌다는 평가는 그럴만하다고 여기나 과연 중국이 미국의 포위망을 뚫고 자기들 인근 바다의 제해권을 획득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저는 매우 비관적입니다. 이것과는 반대로 중국 자체를 완전히 취약하고 닫힌 국가로 자이한은 보고 있지만 동남아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과 파키스탄과 지부티, 스리랑카에 해군 기지를 조차하고 있는 상황을 볼 때 완전히 중국이 손을 놓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더 살려고 하는 중국이 남중국해와 말라카 해협 등지에서 군사적 방법을 모색하려고 할 때가 대규모 전쟁이 날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우디-이란의 중동 지역 맹주를 놓고 벌이는 대결에 대해서 이란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될 경우나 중동 최대의 재래식 전력을 보유하고 있는 이란에 대한 위협이 심각해질 경우 사우디가 동맹국인 파키스탄으로부터 핵무기를 도입하게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점은 우려할 만한 부분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중동 자체가 핵전쟁의 도화선이 될 지역이 높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유럽-러시아의 경우도 러시아가 과거의 동유럽 지배권을 획득하는 것을 시도하고 발트해의 3국과 폴란드 일부 지역 내지는 핀란드 지배에 까지 나서게 된다면 독일의 재무장을 초래하고 이런 상황임에도 미국이 참전하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었는데요. 과연 나토 동맹국에 의한 공격이 유럽 동맹군의 참전으로 이뤄질지는 자이한이 이미 말한대로 러시아가 폴란드를 차지하려고 든다면 폴란드 스스로는 적지 않은 기간동안 게릴라전을 펼쳐야 한다는 점을 들어 유럽이 대 러시아 단일대오에 설지는 반 정도의 의문을 갖게 됩니다.

대충 짐작하시겠지만, 글의 얼마간 내용을 보더라도 자이한의 여기 이 책은 꽤 도발적입니다. 미국의 영향력 축소가 3지역의 큰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단순히 현실주의적 시각을 넘어 음울하기까지 합니다. 여기에다 전세계적으로 이미 노동층의 심각한 인구 감소와 이런 이유로 시장 붕괴의 시나리오까지 얻게 될 수 있는 산업국가들이 존재할 수도 있다고 그는 보고 있습니다. 사실상 그의 이런 이해와 분석은 미국이 계속 앞으로 패권국으로 남을 이유로도 분명해 보이는데요. 만약 그렇다면 우리와 같은 중견 국가들은 자국책을 찾아야만 하는지 그게 불가능하다면 국제 무대에서 어떠한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지 일단 많은 이론적이고 외교적 노력들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뭔가 잡음이 있더라도 한미 동맹이 유지되는 것은 국익에 이로운 일이나 마찬가지로 일본이 과하게 중국을 도발하여 미국이 개입하거나 이로인해 대 중국 봉쇄 동맹이 연결되어야만 하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기도 합니다. 확실히 트럼프의 미국은 그 불안정성이 지대하다고 봐야하는데 이 점과 관련해서도 자이한은 미국의 포퓰리즘 시대에 들어섰다고 보는 등의 기존의 엘리트들이 민주주의에 대해 회의를 보이는 것과 비슷한 관점이 보여 이 점도 매우 불편했습니다. 국제 정치와 외교 문제에 관한 전문가가 이나라 일반적인 독자들이 이 책을 어떻게 보고 받아들일지는 예상하기 어려운 부분이나 분명히 해석 수단으로서도 자이한의 논리는 과한 부분이 있습니다. 과거 냉전 시기의 미국 역할론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 사람들도 분명 많고, 베트남과 쿠바를 논하지 않더라도 니카라과와 파나마, 그레나다에 있었던 미국의 행적을 눈감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면에서 자이한은 미국 없는 세계의 묵시록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전부 일독을 마친 저로서는 모든 것을 동의하기는 어려웠습니다. 한편으론 캐나다 앨버타에 대한 그의 집착은 꽤 귀엽기까지 했는데요. 국제 정치에 대한 여러 시각들 가운데 이런 부분도 있을 수 있다는 관점으로 타협하시고 보면 흥미로운 것들도 확실히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이쯤에 글은 적당히 써야하는 압박이 있어서 이 정도로 마치겠습니다.

‘본문 번역 중에 ‘빡세게’라는 표현이 있던데, 제가 국어 사용의 엄숙주의자는 아니지만 문어체에 다른 표현도 많은데 굳이 일상 대화에서나 쓰일법한 빡세게라는 식으로 했어야 했는지 의문입니다. 이춘근 교수가 서문에 역자가 이 책을 상쾌, 통쾌해 했다고 언급하는데 서평을 쓰고 나서 원서를 주문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이 점은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권력의 미래
조지프 나이 지음, 윤영호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하버드 대학의 케네디 행정대학원의 석좌교수이자 전임 학장인 조지프 나이는 리버럴한 국제정치 학자들 가운데 특별한 위상을 갖고 있습니다. 헨리 키신저와 함께 학자이면서 공직에 참여했고, 양자의 위상을 더한다면 키신저보다 더 명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 바로 조지프 나이일겁니다. 개인적으로 조지프 나이의 글은 이번이 두 번째인데요. 얼마전에 서평을 썼던 존 G. 아이켄베리에 이어 큰 기대감을 갖고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원제는 The Future of Power로 지난 2011년 처음 출간되었습니다. 국내에는 2012년 세종서적에서 번역 출판을 했는데요. 아쉽게도 이 책은 현재 절판된 상태입니다. 아마도 이런 종류의 책들은 일반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어렵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새 판이 끝나 시중에서 구하기 힘들다는 점은 정말 아쉬운 부분입니다.

조지프 나이는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권력에 대한 범위는 국제정치학, 국가간의 관계, 세계체제, 제도적인 측면에서의 의미로 한정하고 있습니다. 사실 권력의 대표적인 사전적인 해석은 “다른이에게 어떠한 것을 하게 만드는 동인, 힘, 강제력” 정도가 될 것입니다. 여기에선 나이 그가 국제정치학계에 내밀었던 ‘소프트 파워’와 기존의 ‘하드 파워’를 묶어 ‘스마트 파워’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거의 자유주의적 현실주의에 수반하는 용어라고 인식되었는데요. 조지프 나이가 흔히 국제정치에서의 신자유주의자라고 평가받는 것으로 봤을 때, 스마트 파워에 닿는 그의 사고는 키신저나 럼스펠드와는 다른 입장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부분은 그가 ‘국제정치에서의 신자유주의자’라고 해서 네오콘으로 알려진 신보수주의자들과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다만 권력의 다른 형태인 군사력 투입과 관련되어 그것이 필요할 때는 사용해야 하지만, 그 전까지는 소프트파워 같은 온건한 방법도 사용해야 한다고 언급하고 그렇지만 북한 핵문제와 관련해서는 소프트 파워 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으로 어느 정도 극단에 이르지 않고 절충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주장들이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앞선 서문에서 1970년대 중반 프랑스는 파키스탄에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핵 재처리 시설을 이전하기로 합의했는데, 여기에 포드 및 카터 행정부가 프랑스를 설득했고 결국 프랑스는 이 계약을 철회했고, 이처럼 프랑스의 태도는 설득과 신뢰를 통해 바뀌었다며 여기에서 조지프 나이가 이해하고 있는 권력이란 바로 비물리적인 타협과 설득에 기반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 권력이 반드시 영향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미국 스스로의 이익과 안보를 위해 물리적 및 비물리적 방법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온건하다거나 우유부단하다는 등의 외부 인식에 개의치 않아야 한다는 일종의 현실주의적 입장도 발견할 수 있는데요. “강력한 행위자들은 약자들을 아예 테이블에 앉지도 못하게 할 수 있으며, 설혹 약자들이 테이블에 앉더라도 이미 게임의 규칙은 자리를 선점한 강자들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고 덧붙이고, 직면한 세계 정치경제적 이슈들을 논하고 해결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결성되었던 G7이 오늘날 G20로 바뀌었어도 세계의 수많은 국가들이 여기에 초대되지 못할 정도로 국제 정치의 현실 인식이 어떠한지 살펴볼 수 있는데요. 이 글은 이와 비슷한 현실에서 ‘그 권력’이 현재 중국의 대두와 함께 어떻게 변화되었는지에 대해 마찬가지로 찾아보고 있습니다. 1부는 그러한 권력의 종류인 군사력, 경제력, 소프트 파워를 분석하고, 2부는 오늘날 대표적인 권력 이동인 분산과 전이인 개방된 인터넷 시대의 사이버 파워와 미국의 쇠퇴로 해석되는 권력의 전이를 집중적으로 따져봅니다. 이에 반해 미국의 떠오르는 지경학 이론가 피터 자이한은 미국의 쇠퇴는 어림도 없는 주장이며, 잠시 숨고르기를 할 뿐이라고 언급했는데요. 마찬가지로 존 아이켄베리도 미국의 패권을 위협하는 중국의 대두라는 시기에서 “중국을 흡수할 만한 개방성, 경제 통합, 역량을 국제 사회는 갖추고 있다”고 그 역시 중국의 급진적 대두와 미국의 쇠퇴에 조심스러운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조지프 나이도 세계의 절반 정도의 영향력을 갖고 있는 유럽과 일본과는 미국이 견고한 동맹 체제로 이 양대 세력이 설사 미국의 영향력을 다소 뒷걸음치는 것으로 만드는 요인이라 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자유세계 및 자유진영의 통합 영향력은 서로 발전된 것이라 봐도 과도한 해석은 아닐겁니다. 현재에도 국제 체제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중국을 적대국으로 인식해야 하는 것인가와 이 글 6장의 미국의 쇠퇴와 권력 전이에 조지프 나이가 중국을 많은 분량을 할애해 평가하는 것은 바로 “중국의 정치적 변화와 불확실성에 영향을 받을 것이다”라고 확신하며 금세기 중반까지 중국은 전반적인 권력에서 미국을 능가하지 못하리라는 결론을 내고 있습니다. 인터넷과 네트워크로 크게 변화된 세계에서 기존의 군사력이나 경제력의 파급력으로 다른 국가들을 국제 사회에 추동하고, 중국과 러시아와 같은 세계 체제에 반하는 의도를 갖고 있는 국가들을 관리하는 것은 분명 수단의 한계는 존재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무자비한 현실주의자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필요할 때 힘의 투사와 군사력의 투입이 있어야하며, 소프트 파워 같은 것은 별개의 보조 수단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주장은 너무나 제한적인 해석입니다. 사실 그동안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자신의 시장을 열어 유럽을 재건시키고, 많은 동맹국들의 번영에 이바지 한 것은 분명합니다. 피터 자이한 같은 이는 이러한 체제(일종의 미국의 희생으로 받아들이는)가 이제는 변화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데요. 결국에는 특히 미국의 광범위한 해군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동시에 아이켄베리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중국이나 러시아를 계속 국제 사회에 끌어들여야 하는 점이 앞으로 얼마간의 시간 동안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집니다.

조지프 나이가 주창했던 소프트 파워는 그것을 이용하여 어떤식으로 권력을 획득하는지에 따라 해악이 될 수도 있고, 공익이 될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권력은 매번 영향력을 수반하는 것은 아니어서 중국과 여타 다른 국가들이 다른 국가들을 강제로 이끌어 내기 위해 소프트 파워를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것은 지양해야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글에서 논의되고 있는 사이버 세계에서의 국가들 혹은 비국가단체에 의한 광범위한 상대를 향한 노골적인 사이버 해킹에 대해 과연 어느 정도의 제재 가능성을 제도로 만들어 낼 수 있는지 그것이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중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수많은 다국적 기업과 미국의 공공기관을 해킹한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미국도 이에 못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원자력 발전과 핵무기 보유고에 대한 치명적인 사이버 공격이 비도덕적 수단에 자행된다면 이것은 세계에 큰 절망으로 다가올 수 있는데요. UN은 이와 관련하여 사이버 관습법을 마련하려고 고민중이라는 기사를 보긴 했습니다만 이 사이버 해킹을 단순히 변화된 권력 이동으로만 한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도덕의 결여로만 그치지 않지 않을까 고민입니다.

끝으로 미국의 많은 학자들은 세계 안보에 기여하고 있는 미국의 군사력을 공공재로 여기는 많은 국가들과 미국 내부의 목소리에 다소 혼란스러운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과거에 미국은 고립주의적 전통이 있었고, 최근 두 차례의 전쟁에 개입하면서 막대한 군수 산업의 초과 이익을 감안하더라도 군사비 지출에 거의 한계에 다다른 것으로 보입니다. 많은 서방 국가들과 미국 동맹국들은 이러한 역할을 중국과 러시아와 같은 권위주의 국가들이 바통 터치를 하는 것을 절대 좌시하지 않을 것이지만, 이 양 국가들은 앞으로도 지속적인 군사력 증강을 통해 미국에 반대급부를 요구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보입니다. 로버트 코헨은 “패권 이후 시대에 상호 협조와 무임승차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 기구를 조직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요. 억압적인 수단의 권력을 상대에 사용하려고 하는 일부 국가에 대하여 온건한 다수 국가들의 ‘스스로 동의하는 소프트 파워’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면 충분히 긍정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보는데요. 미국이 캐나다와 전쟁을 할 의도는 전혀 없기에 서로간에 주고 받는 관계가 지속되는 것처럼 상대적인 약소국들이 소프트 파워 자체를 굴욕적인 수단으로만 여기는 것은 현명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조지프 나이의 이 연구물 자체가 미국 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의 시민들에게도 어떤 영감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국 정치와 동아시아 외교정책
서정건.유성진.이재묵 지음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1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국 정치 과정의 연구 및 동시에 미국 외교 행위 과정을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미국에 의한 한국, 중국,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짚어보고자 하는 목적으로 한국정당학회에서 주관하고 경희대학교 출판 문화원에서 2017년 출판한 일종의 연구 논문집인데요. 집필진으로는 서정건, 유성진, 이재묵이고 모두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연구자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이 책의 주된 출판 목적은 2016년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과 함께 앞으로 동아시아지역내의 미국 외교정책이 이전과는 다른 어떤 변화된 점이 있을지 진단하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북한 핵문제가 차기 미국 행정부의 지대한 관심사이자 해결이 시급한 사안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결말의 6장을 비롯한 총 6개의 논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근래의 미국 정치외교 과정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씽크탱크와 미국 의회지도자들 및 각 행정부의 외교관련 관료들을 독자들이 알기 쉽게 이념과 당적, 정치관 등을 잘 분류해 일반 독자들이 보기에도 관련 부분에 있어서 비교적 상세한 이해를 돕고 있는 점은 다른 여타 국제정치학 및 외교 논점을 담고 있는 글들과는 다른 차별화 된 유익한 점이라 생각됩니다. 그런 점에서 1장과 2장은 국제정치학의 이론과 전통적인 미국 외교 정책을 잘 비교해 우리가 미국 외교정책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살펴볼 수 있게 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그동안 한미 관계가 1950년 한국 전쟁에 대한 군사 원조 및 경제적 원조를 미국이 지원함으로써 전통적으로 후견-피후견 관계로 알게모르게 고착화 되었는데, 이 점의 반증 논리로 5장에서는 “미국의 주요 정치 엘리트들이 한반도를 미국의 국익을 수호하는데 있어 주요하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은 최근 시카고국제문제협회가 조사한 엘리트 의견 조사에 경험적으로 뒷받침된다.”고 밝혀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공화당과 민주당 행정부의 지도자들이 미국의 안보를 가장 먼저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과거 냉전 시기의 일본이 갖는 미국의 안보적 특수성과 오늘날 G2 시대에 중국 부상과 관련해서도 미국에게 일본은 이러한 안보 지렛대를 제공하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더욱이 동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이 일본의 위치는 미국의 아시아 동맹의 핵심축 (linchpin) 이라고 여기며, 미국의 관료와 지도자들이 앞으로 한미일 삼각 동맹을 원하는 것은 바로 미국의 안보와 경제 및 지역 균형 정책에 바로 자신들의 이익이 달려 있기 때문일 겁니다.

미국은 닉슨 행정부 이후로 헨리 키신저의 주도아래 특히 현실주의적 입장을 근 20여년 동안 유지시켜 왔습니다. 그 이전에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미국 외교 정책의 기조였으나, 때로는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세계 확대를 기조로 삼는 민주평화론자들과 신보수주의자들 (네오콘)이 있었고, 고립과 개입을 넘나드는 잭슨주의자들과 과격한 윌슨주의자 등 굳이 이념과 이론으로 분류를 하자면 위와 같지만. 근래 출현한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가 완전하게 새삼스러운 이론적 틀이 아니라 원래부터 미국이라는 국가가 세계 패권과는 상관없이 자국이해적인 측면이 원래 강했고, 많은 국제정치학자들이 현실의 국제 무대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해 추동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 아직도 국제정치가 얼마간의 온정주의가 바탕이 된 낭만적이고 이상의 사고로 해석하는 것은 그 자체로 불행한 일이 아닌가 판단해 봅니다.

사실 이 책의 가장 큰 핵심은 “미국 외교 정책 결정 과정에서 대통령과 정당, 이익 집단 등 중 국내적 정치적 행위자들의 선호가 어떻게 구성되는지가 매우 중요하다”는 점인데요. 국제 정치 무대에서 안보를 비롯한 세계 질서 유지라는 조정자로서의 미국의 존재는 특히 군사동맹에 의거 일정 부분 안보를 의지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매우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이러한 미국의 외교 정책 추동의 요인들에 대해 정말로 막대한 연구 자금을 들여서라도 투입해야만하며, 국제정치학자인 존 미어샤이머가 강하게 비판한 ‘미국 의회에 대한 이스라엘 로비’ 수준이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대미 지렛대가 될만한 수단들을 갖춰 놓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위와 같은 측면에서 오늘날에도 일본이 대미 종속이 심화되고 있고, (실체가 있는지 없는 모를) 대일본 중국 위협 상쇄를 위해 일본이 러시아와 가까워지려고 한다면 미국이 대응에 나설 것이라는 이 글에서의 판단은 국가의 외교에서 얼마만큼 다른 대안을 만들어내고 비편향적인 수단들을 갖춰내는 것이 왜 중요한지 알게 해줍니다.

그리고 더 엄밀히 분석한다면 과거의 미국이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이상을 위해 마냥 국제 사회에 노력한 국가는 아니었습니다. 이란-콘트라 사건도 그렇고 파나마와 그레나다에 군대를 투입한 것이나 쿠바 피그만 침공 등 베트남과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의 군사작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 여부에 따라 할일은 해왔던 국가입니다. 이것이 패권을 가진 국가의 자율성이라고 받아들여서는 안되며 오직 자국의 안마당과 지역내의 안보를 위해 수단을 동원한 것이죠.

끝으로 앞으로 작게는 동아시아 지역과 크게는 세계 안보에 있어서 크게 문제가 될 만한 사항은 북한 핵문제가 만약 이대로 해결이 가능하다면 순위에서 빠지게 되고, 이어 과거 지위를 회복하고 싶어하는 중국과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가 테러 단체에 탈취당할 위협이 높은 파키스탄의 정국 불안 가능성 정도 일겁니다. 저는 특히 파키스탄의 핵무기가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하는데요. 테러 집단에 손쉬운 먹잇감이 될 수 있는 것이 이 파키스탄의 대량 살상 무기입니다. 이게 과연 막연한 기대감 말고 실제적인 관리가 될 것인지믄 앞으로 20여년 과정에서 면밀히 지켜봐야 되는 문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처럼 다른 일면으로 보면 소장 학자들이라고 봐도 무방한 이 연구가 진전된 논의를 독자들에게 제공한다는 점은 칭찬받을만한 부분이겠죠. 다만, 한가지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은 2016년 미국 대선을 트럼프와 샌더스 양 극단주의의 대결로 여기서는 이해하고 있었는데요. 크게 아쉬운 부분입니다. 포퓰리즘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만한 분들이 이런식으로 판단한 것은 다소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그리고 중간에 한미일 삼각 동맹과 관련해서도 너무 미국 쪽의 이해만을 받아들여 한일 양국간의 영토 및 역사문제를 가볍게 보는 것으로 여겨지는 점도 마찬가지로 뭔가 고민이 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본 없는 자본주의
조너선 해스컬.스티언 웨스틀레이크 지음, 조미현 옮김, 김민주 감수 / 에코리브르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의 공동저자 중 한명인 조너스 해스컬은 영국 브리스틀 대학교와 런던 비즈니스 스쿨에서 강의하고 미국 다트머스 대학에의 객원 교수를 역임한 바 있는 저명한 경제학자입니다. 이 책의 소개와 기사를 조금 찾아본 결과로는 조너선 해스컬은 특히 영국 정부와 공공기관 등과 여러 연구를 해온 연구자로도 알려져 있더군요. 마찬가지로 공저자 중 다른 사람인 스티언 웨스틀레이크 역시 케네디 장학생으로 하버드 대학교에서 경제학 및 정부학을 연구한 학자입니다. 이 렇게 신자본주의에 관한 해박한 연구서는 2018년 출판되었고, 원제는 Capitalism With Out Capital 입니다. 국내에도 마찬가지로 작년에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우선 일찍이 앨런 그리스펀은 앞으로의 세계 경제가 첨단 기술과 정보 통신 산업이 주도하는 경제로서, 이것을 신경제 New Economy라 명명한 바 있습니다. 즉 이러한 자본주의 패러다임 변화의 시대로서 과거의 자본을 유형의 자산이라고 정의한다면, 앞으로는 유형이 아닌 아이디어, 지식, 예술적 컨텐츠, 소프트웨어, 브랜드 및 네트워크와 관계 등을 일컫는 무형 자산이 주가 되어 선도하는 신자본주의에 대한 개념과 상세한 전망을 담은 연구가 바로 이 글입니다. “지난 몇 십년간 형체가 없는 것들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되었음을 시사한다”며 마침 이 글의 주제가 어떠한지 대략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사실 이 책의 2부 5장 : 무형자산, 투자, 생산성 및 장기 불황과 6장 : 무형자산과 불평등 확대를 주목해 읽게 되었는데요. 자본이 축적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많은 경제학자들이 증명하는 것으로 이런 차원에서 오늘날 소득의 불평등에 이 무형자산에 따른 불평등이 또 다른 요소로서 가능성을 보이지 않나 싶었는데, 대략 제 추측이 옳았습니다. 일단 무형 자산은 4S 즉, 확장성, 매몰성, 스필 오버, 시너지 효과 등의 대표적 속성을 갖고 있고, 이들과 관련해서 저자들은 스필 오버와 시너지와 관련된 부분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스필 오버란 무형 자산과 관련된 기업과 각 주체들의 투자들이 일종의 서로간 긍정적인 파급효과를 일으킨다는 것으로 동종 산업 뿐만 아니라 상이한 업종 간에도 의미있는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네트워크와 자동차라는 자산을 통해 발전한 우버의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이들 무형 자산에 관련된 일차적인 결과가 도출되는 것은 오늘날 IT 산업의 발전과 함께 이 무형 자산이 놀랄만한 성장을 해왔다는 점입니다. 자본주의가 고도화 됨에 따라 노동의 역할이 중요해 질 것이라는 전통주의적인 자본주의 경제학자들의 예상을 넘어 이 무형 자산의 증대는 전통적인 노동의 역할을 변질시키고 결과적으로 자본창출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요소를 갖고 있는 노동자들이 아닌 결핍이 내재되어 있는 다수의 노동자들이 더욱더 불평등의 길로 내몰릴 것이라는 짐작이 들었습니다. “노동자들이 엘리트들과 사회 현실에 소외되어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현재의 노동시장의 패러다임 변화가 결국 저자들도 일정 부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결론에 이르고 있습니다. 개인의 노력 만으로 이러한 무형 자산의 요소를 습득하고 훈련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불명확하며, 장기 불황 시대에 각 관료주의와 정부가 유아 계층을 비롯한 청소년 교육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선험적 주장들은 그래서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판단해봅니다.

세계 경제를 선도하는 많은 선진국들은 그렇지 않은 국가들에 비해 무형 자산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R&D 라는 측면도 정확히 수치를 계산할 수 없는 이 무형 자산의 스필 오버와 시너지 효과를 갖는 수단으로서 저작권과 특허에 관련한 보장에 많은 국가들이 힘을 기울이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부분을 반증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우수한 경영과 높은 성과라는 강한 문화를 가진 기업들”은 앞으로도 자본 산출에 다른 수단인 무형 자산에 힘을 쏟을 가능성이 높고 그렇지 않은 기업과 국가는 더욱더 도태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적게 나마 인지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공동 저자들의 이 연구물일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광범위한 금융에 대한 설명도 담겨져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었는데요. 사실은 금융과 이를 뒷받침하는 네트워크에 대한 설명으로 한정되어 있어서 저처럼 실망감을 맛보고 싶지 않은 분들께는 이 책을 강하게 추천드리기는 어렵겠습니다. 다만 제4의 혁명과 신경제와 같은 최신의 정보 및 자본주의의 변화된 모습을 지식으로 얻고 싶은 분들은 구매와 일독을 권유드려봅니다. 유럽의 여러 국가들의 통계와 상세한 도표, 최근 발표된 여러 경제 논문들을 소개하고 있어서 최신 경향을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군요.

엄밀하게 따져 본다면 전통적인 유형의 자산과 여기에 언급된 무형의 자산이 서로 만나서 시너지를 일으키는 것이지 앞선 양자의 경계가 명확하게 분리되어 완벽하게 자본주의의 흐름이 변화되었다고 보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물론 전통적인 제조업 수준의 상품 생산과 그것을 시장에 공급하는 것만으로는 기술의 발전 시대에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는 것은 분명할 겁니다. 다만 무형 자산을 수치화하려고 하고 그 파급을 예측해보려고 했다는 점은 충분히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2019-12-20 15: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내용을 정밀하게 분석해서 나열하고 정리해서 결과를 말해주니까 어느정도 책을 고르는데 도움이돼네요. 긴글쓰신다고 수고많으셨습니다.ㅎㅎ

베터라이프 2019-12-20 23:26   좋아요 0 | URL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쓰려고 노력하는데 어쩔수 없이 어떤 부분은 주관적이고 편파적이 되기도 하네요 ^^ 하여튼 감사합니다
 
일본의 한국식민지화 - 담론과 권력
Alexis Dudden 지음, 홍지수 옮김 / 늘품(늘품플러스)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국 코네티컷 대학의 역사학과 교수이자, 특히 일본제국주의 시대와 관련된 동북아 역사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 온 알렉시스 더든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학자입니다. 지난 2015년, 일본 종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 내 역사학자 성명을 이끈 공로로 만해평화상을 받은 이력이 있는데요. 당시에 일본 아베 정권에 대한 비판과 함께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바가 있습니다. 그녀의 ‘일본의 한국식민지화’라는 이 글 또한 그러한 연장선상에 있는 연구라고 생각되는데요. 다만 이 책에 대한 서지 정보가 확실히 잡히지 않아 구글링을 하게 되었는데, 출판 연도가 2004년으로 나와 있지만 정보가 정확한지는 약간 불명확합니다. 이 점 양해 말씀 드립니다. 국내에는 출판사인 늘품플러스가 2016년 번역 출판하였습니다.

알렉시스 더든이 이 책에서 밝히고자 하는 점은 이렇습니다. 1차대전 발발 이전의 제국주의 시대에서 야만국은 마땅히 문명국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계몽적 통치’에 대한 해석과 이를 바탕으로 일본이 근대화 된 군사무기로 팽창에 나서지만, 그것보다 “권력 다툼에서 군사력만이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넘어서 일본이 이 시기의 국제법과 국제조약 및 외교용어들을 조선과 청나라에 능수능란하게 교묘한 술수로 사용하며 팽창주의의 합법성을 얻으려고 한 이면을 파헤치고자 쓴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금 장황하지만 결국 요점은 “이른바 문명 국가들은 야만적인 국가들을 합법적으로 정복하고 통치할 수 있다”는 당시 식민지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론적 잣대인 계몽적 통치와 이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조선을 병탄하고, 당시의 조선을 야만국으로 규정한 일본의 외교적 술수에 대한 분석이 주된 요점입니다.

일본은 1853년 미국 매튜 페리 제독의 흑선에 의해 소위 불평등 개항을 강제로 맞게 됩니다. 당시의 일본 식자들은 이러한 굴욕적인 불평등 조약이 후에 일본이 기준에 맞는 힘을 되찾게 될 때 극복할 수 있다고 여겼지만, 그것보다도 도쿠가와 막부가 붕괴하고 일왕이 전면에 등장하는 정치적 격변의 시기와 부분적 근대화를 통한 국력을 신장한 경험으로 자신들의 제국주의 시대를 열게 되는데요. 물론 저는 이 점을 옹호하고자 저런 수사를 붙인 것은 아닙니다. 저 역시 알렉시스 더든의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짤막한 평가인 “일본제국주의 역사 속에는 한국, 중국, 그 밖의 도처에서 강제로 이주당해 공장과 군막사에서 노동자로, 성노예로 착취당한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가슴 복잡한 이 문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지금도 일본의 대다수의 지식인들과 무지한 시민들은 2차대전 이전의 아시아에 대한 침략행위가 일본제국이 종말을 고함으로써 끝났다고 동시에 그 책임이 소멸했으며, “일본의 팽창주의 산물인 제국이 붕괴된 후 반세기가 지난 현재,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뉘어 서로 다른 방법을 이용해 마치 입을 맞춘 듯 서로 도와가며 역사적 과오를 정화하하려고 하고 있다”고 저자 역시 비판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 글의 시작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의 진화론적 사회학에 입각해 유럽 제국주의의에 의한 식민통치를 번영이라 여기고 이 왜곡된 평화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여기고 있던 당시의 시대상이 저자인 더든의 글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일찍이 E. H. 카는 1차대전 이전의 이러한 이상주의적이고 낭만주의적인 평화 분위기가 끔찍한 대전의 원인이었다고 여기는 것에 한편으로 동의가 될 만큼 이들은 자신들을 문명국이라 자처하면서 번영의 시대라고 여기고 있었죠. 가까스로 신흥국의 반열에 들어선 일본은 자신들도 역시 열강의 틈바구니 안에 들어가길 원했습니다. 여기에는 제레미 벤담이 고안한 international 인터내셔널, 국제 및 국제주의와 국제법과 관련한 당시 동아시아에는 생소했던 이들과 관련된 연구를 일본인들이 끊임없이 지속해 왔고 이것이 단순한 상업행위를 통한 교역을 야만과 비야만을 구분하는데 그치지 않고 도로 조선과 청나라를 야만으로 규정하는 데 교묘히 쓰였다는 점에서 통렬한 감정이 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이 시기의 정한론과 조선 병합의 목적을 추구한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에 말려들어간 이유도 이와 같이 인도주의적 원칙을 수호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이 얼마나 교묘한 언술에 지나지 않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기들 손으로 더러운 일을 하지 않기 위해 이완용과 송병준 같은 부역자를 이용해 추잡한 짓을 벌인 일은 일본인들이 과연 인도주의와 정의를 입에 담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저는 이 미국의 여류 역사학자의 이 연구에서 특히, 일본이 당시 조선을 의사-독립국으로 여긴 점이 관심을 끌었는데요. 조선이 법적으로 청나라 속국이었던 것은 명백했지만 독립국으로서 조선 국왕이 자주권으로 통치하고 있었으나 이 중국 대륙에 의한 전통적인 동아시아 정치적 관계를 잘 알고 자신들도 그러한 범주안에 속해 있던 일본이 그것을 모른척하면서 조선을 독립과 자주권을 주장할 수 없는 국가로 술책을 부린 것은 1870년대 초 일본에서 불던 정한론으로는 전부 설명할 수 없는 노골적인 야욕이라고 해야할까요. 저자도 분명 인정하는 부분이지만 강화도 조약으로 시작해 1910년 말장난에 불과한 대한제국 병탄을 한일합방으로 포장하기까지 면밀한 정치외교적 과정을 꼼꼼히 갖춰나가면서 당시 열강국들로부터 승인받으며 대한제국 편입을 마무리 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욕심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1943년 미드웨이 해전 패배 후 미국과의 단독 강화 시도를 통해 만주와 대만, 한반도의 지배 만이라도 유지하려고 했던 일본제국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겠죠.

바로 3장이 일본의 동아시아 침탈 과정에서 일본인들이 국제법과 국제용어 해석과 이론 습득에 나선 이유이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조선 사법권 박탈과 관련된 프랑스인 구스타브 봐소나드의 일화가 쓰여져 있는데요. 저자인 더든이 이런 사례까지 조사한 것은 한국 학자들보다 더 치밀한 연구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한국의 국사학계가 당시 메이지 유신에 대한 천편일률적 해석과 일본의 근대에 대한 지속적인 폄하를 해오고 있는데요. 저는 지금이라도 우리 학계가 이것에 대한 면밀한 연구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국내에 많은 학자들은 1905년 태프트-가쓰라 밀약과 1902년 이후 영일동맹이 갱신되면서 인도와 대한제국을 맞교환한 영일 양국의 우호조약에만 신경쓴 나머지 이것만을 알파와 오메가로 여기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정한론에 대한 연구도 이런 차원에서 다시 조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끝으로 오늘날의 일본인들과 일본 정부가 2차대전 종전 이후, 과거의 일본제국과 미군에 의해 민주정치로 개조된 자신들의 현재 정부가 법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과거 제국주의의 유산과는 다르다고 선을 긋고는 있지만 전후 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수정주의적 입장과 종래의 평화헌법 개정과 관련된 시도에서 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우려를 금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과거에 대한 사과가 국격의 손상이라고 여기는 이들의 태도에서 앞으로 역사 문제 뿐만 아니라 정치적 문제까지 일본과 관련된 요건들이 어떤 식으로 결말이 날지는 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어 보입니다. 많은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이 알맹이가 빠진 협력 운운이 차라리 아예 없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이 역사 문제가 과연 해결될 문제일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는 모두가 답을 짐작하실 겁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