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이란 무엇인가 - 차별은 언제 나쁘고 언제 그렇지 않은가
데버러 헬먼 지음, 김대근 옮김 / 서해문집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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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메릴랜드 대학의 헌법학 교수로 있는 여성 법학자인 데버러 헬먼의 이 책은 지난 2008년 “When is Discrmination Wrong? 라는 원제로 출간되었던 것을 서해문집에서 2016년에 소개되었는데요. 이 책의 저자 데버러 헬먼은 발표한 논문과 글이 대부분 ‘차별’에 관한 주제인데, 개인적으로는 오랫동안 같은 분야의 연구로 천착해온 학자가 내는 글들은 항상 기대를 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이 글의 저자가 주장하는 차별에 대한 정의는 간단히 설명하면 “비하가 수반되어 도덕적으로 불합리하고 부당한 것을 뜻합니다. 원칙적으로 합당하다는 평가를 받는 ‘구별’과는 구분해서 해석하는 것을 권유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구별은 비하나 부당한 평가와는 상관없는 객관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일체의 구분같은 것으로 여겨지는데요. 여기에 많은 사례들이 소개되어 있지만 가장 일례인 것은 학교에서 아이들의 이름을 알파벳으로 구분하여 강당에 분류해 놓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특히 “이러한 분류 행위가 비하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특정 맥락에서 특정한 구별을 짓는 사회적 또는 관습적 의미에 따라 좌우된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는데요, 저자가 속해있는 미국이라는 국가에서는 아주 대표적으로 흑인에 대한 차별 문제가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원래 미국의 건국과 더불어 성립된 초창기 헌법이 사실상 “백인 남성들”을 기반으로 만들어져 이후 토크빌이 언급했듯이 “토지 보다 노동력이 더 높은 비용으로 차지했던 미국의 특수한 상황에서 노예의 수입에 대한 필요불가결성”은 오랫동안 미국 사회에서의 흑인의 지위 문제를 야기했고, 지금도 흑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인종적 편견은 대체로 심각한 편입니다. 얼마전에 제가 이곳을 통해 리뷰했던 제임스 Q. 위트먼의 ‘히틀러의 모델, 미국’에서도 이러한 실제적인 모습을 잘 살펴볼 수 있습니다.즉, 미국법에 있어서의 인종 분리와 관련된 규정이죠.

미국 사회에 있어서 흑인들과 관련된 관행이 관습법적으로 흑인에 대한 교묘한 ‘인종 분리’에 법적 근거가 되었고, 이것을 차별로 인식하고 이론적으로 규명하고자 하는 노력이 법학계 내에서 시작된지는 얼마 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차별을 규명하고자 하는 저자의 노력은 차별의 인식적 원인이라고 볼 수 있는 ‘비하’에 대해 다각도로 분석하고 있는데요. ‘비하가 평등의 문제인가?’ , ‘정말 비하만으로 충분한가’ , ‘모든 비하는 부당한가’ 등으로 면밀한 관찰을 하고 있는데요. 다만, 실제 범죄자를 법적인 처벌로 인한 교도 시설에의 구금이 그걸로 끝나지 않고 시설 내의 다른 죄수들에 의한 폭행과 강간 등을 용인함으로써 범죄자를 비하한다는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처벌 자체로는 범죄자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등의 사례들을 인용하며 약간의 예외적인 측면들도 소개하고 있는데요. 하지만 차별과 관련된 사례들은 대부분 흑인과 여성에 대한 것으로 할애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법과 관행이 어느 정도인지 저와 같은 독자들은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겠더군요.

이렇게 앞선 1부가 차별에 대한 여러 사례와 해석이었다면 2부는 맹목적인 차별들에 대한 대안으로 소개하고 있는데요. 여기 내용들에서 상당히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차별 금지법’과 관련하여 대체로 올바르게 금지되는 합리적 차별에 대해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데, 위의 차별 금지법은 이러한 합리적 차별까지 금지한다는 측면에서 저자는 부정적으로 보는 듯 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무엇보다 객관성의 입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저자는 일정 부분 평등의 가치를 깊이 인식하지 않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부당한 차별을 어떻게 정확히 객관화 시킬 것인가는 문제도 어려운 부분이고 관행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흑인들에 대한 인종적 편견인 “지적 능력이 떨어지고 도덕적으로 덜 통제되며, 더 폭력적이고,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관점을 지지하는데 사용되어 왔다면 이것에 대한 부당성의 측면에서 실제 법과 현실의 괴리를 전면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더 중요할텐데요. 이것을 일일이 흑인들이 비하를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를 따져서 차별의 유무를 따지자는 것은 물론 개념적으로는 그렇게 해야하지만 그것이 사회 전반에 어떠한 실제적 효력을 가질지는 저로서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유색 인종과 같은 소수자의 자녀들이 학과 공부와 관련된 차별과 소수자의 입학을 고의로 낮추는 것에 대한 비판 등은 꽤나 인정할만 했습니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앞선 이 합리적 차별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그 경계를 정확히 설정해 설명하는 것이 설득력을 높일 수 있는데 이 부분은 조금 아쉬웠습니다. 전체적으로 이러한 차별의 의도가 사회적으로 고착화되고 파급효과가 큰 것임에도 객관성의 문제나 각 개인의 비하 여부, 의도와 확인 등을 따져서 가려보자는 것과 같은 것은 인종적이고 여성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거나 계급적 차별 의식을 갖고 있는 반대에 있는 다수의 경종을 올리기에는 미흡해보이는 한계가 있어 보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사회의 다수 의견이 법이 부당하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 사법 체계가 그것을 인지하고 받아들이기 보다는 법관들과 법 자체의 정당성을 신봉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결과를 초래하는 ‘법의 판단이 곧 옳다는 측면’의 집단인식을 너무 과소 평가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공동체가 비판이나 모욕 등에 쉽게 동요하지 않는 것을 시민 도덕으로 삼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저자의 인식과 마찬가지로 좀 더 우리가 법앞의 평등을 중요한 가치로 인식하고 일상화 된 차별 의식을 무비판적으로 여기는 것을 반성해야 되지 않나 싶습니다. 또한 차별의 당사자가 느끼는 비하에 대한 좀 더 상세한 분석과 실례가 있어야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이론적으로는 그 각각의 전개가 충분히 설득적이긴 합니다만 앞에서 “객관성에 대한 고려가 시급해 보인다”고 저자가 밝힌대로 추후에 논의를 보강한 글을 저자가 냈으면 하는 이기적인 바람을 가져봅니다. 끝으로 편집상의 문제인지 1곳의 오탈자가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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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현대 사회 - 인간과 철학
찰스 테일러 지음, 송영배 옮김 / 이학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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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포드 대학에서 수학한 후, 캐나다의 명문대학이라고 평가받는 몬트리올 맥길 대학의 철학 및 정치학 교수로 있는 찰스 테일러의 명저 ‘불안한 현대 사회’를 읽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 찰스 테일러는 현대 도덕 철학과 정치 철학에서 영향력을 갖고 있는데요. 엄밀히 비교 대상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라인홀드 니버와 비슷한 업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저는 이 책을 중고책으로 구했는데요. 2009년에 4쇄인걸 보니 인문학이 점차 사장되고 있는 한국 춢판 시장에서 꽤나 판매고를 올린 것으로 여겨집니다. 아마도 그만큼 저자의 명성과 글이 한몫을 한 연유겠죠.

찰스 테일러는 그 특유의 예리한 분석으로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3가지 불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삶의 의미의 상실, 둘째로는 삶의 목표의 소멸, 마지막으로 자유 및 자결권의 상실로 소개하는데요. 저자의 솔직한 답변으로 이 책은 첫번째 불안에 대해 책의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고 밝히지만 제가 볼때는 이 3가지의 문제들이 큰 틀에서는 함께 분석되고 있는 듯 합니다.

저자는 현대 사회에서 자본주의가 심화 발전됨에 따라 사회 각각의 개개인들에게 도구적 이성이 명백하게 자리잡게 되었다고 다소 부정적으로 언급합니다. 즉, 여기서 도구적 이성이란 “우리가 주어진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을 어떻게 하면 가장 경제적으로 응용해 낼 수 있을까 계산할 때 의지하게 되는 일종의 합리성”으로 결론적으로는 이러한 도구적 이성이 개인의 파편화에 일조하고 약간의 확대 해석을 통한다면 현대 사회에서의 개인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에 있어서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한데요. 이러한 도구적 이성을 합리화하는 상대주의는 잘못된 것이며, 나르시즘에 기대어 소위 사회적이고 자본주의적 성공을 목표로 한 것은 결국 좋은 삶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중립성의 자유주의적 측면에서는 좋은 삶이란 개개인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추구하는 것일뿐이라고 심히 옹호하지만 “젊은이들이 자신의 이해를 초월하는 대의 명분들에 대하여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겠는가?”에서와 같은 뼈아픈 질문은 자기 만족에만 기반하는 나르시즘적인 태도와 서구의 대표적인 당대 문화라고 여겨지는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도취적인 것들에 대한 강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알렉시스 토크빌은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서만 갇혀있는” 그런 개인들로 구성된 사회에서는 자기 정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과 이처럼 개개인들이 원자화되어 극도로 개인주의화되는 것을 경고해 왔는데요. 저는 앞서 평가한대로 이러한 자본주의적 물질적 성공에만 매몰되는 것은 사회 전체적인 불안의 측면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정치 체제에 있어서도 일종의 악영향이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테일러는 ‘자기 진실성’ 요청되며, 이러한 자기 진실성은 매우 본질적인 것이므로 각각의 개인들의 개성으로 표현되는 정체성과, 타인들의 인정과 관련한 논의를 세밀하게 이어가고 있습니다. 자기 진실성에 기반하거나 그 배경이 되는 타인들의 인정이 정체성의 기준에서 건전한 민주 사회의 적절한 양태인 것은 아니지만, “나의 정체성들을 규정해주는 관계들은 원칙상 없어도 되거나 다른것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 없다”고 점진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물론 도구적 이성과 자기 진실성이 여기에서 완벽히 대립되는 구조라 볼 수는 없지만 방관자적인 중립성의 자유주의와 주관주의들로부터 왜곡되는 사회 구조를 설명하고 이를 개선시켜주는 개념화에 있어서는 양자를 비교하는 것은 적절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물질적 성공과 지위를 위한 노력들이 무조건 적으로 해롭지는 않다고 주장하는 사상적 흐름도 분명히 존재하며, 거의 이런 주장들을 하는 부류가 우파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흐름이 막바지에 귀결되는 것은 점차 사회와 정치를 불신하는 개개인들의 행태를 조장하는 기득권들의 숨은 의도를 충족시킨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사회 내에서 개개인들의 심각한 파편화가 진행되는데에 숨어있는 본질들은 오로지 성공만을 위한 인간관계에 집착하게 만들거나 대의적인 가치가 쓸모없고 시대착오적인 것이라 주장하며 악용하는 자들의 손아귀에 있다는 것이겠죠. 테일러는 이와 관련하여 의도하지 않은 해체주의적 입장에 있는 지식인들과 사상가들에게 이런 측면의 정보를 알려주는데요. 사실 더 불행한 측면은 도구적 이성이 개인들에게 도저히 저버릴 수 없는 유혹을 하고 있고, 자본주의 사회의 일방적인 측면이 이미 경제적 불평등과 정치적 불평등이 만연한 현재 민주주의의 병페에 더 부채질을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사실 저도 테일러의 이 책을 보면서 느낀바가 컸는데요. 개인적으로 약간의 생업과 더불어 이렇게 많은 책들에게만 파묻혀 지내면서 많은 병폐를 포함한 사회에 대한 비판을 할 자격이 있는지 몸소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 책은 현대 철학과 관련하여 많은 대학들에서 교재로 쓰일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는데요. 많은 젊은이들이 이 책을 깊고 진지하게 일독해 봤으면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약간의 논외지만 글 본문에 ‘대한민국 훈장’이라는 몇줄의 문장이 등장하는데요. 저자인 테일러가 한국인 독자들을 위해 대한민국 운운하는 문장을 넣었을리는 없고, 그 앞뒤 문장에 한국이 언급될만한 어떤것도 없습니다. 만약 역자가 원문의 어떤 나라를 대한민국으로 임의로 바꾼것이라면 이건 문제가 아닌가 싶은데요. 아.. 여기에 써봤자 출판사 피드백은 힘들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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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국가 - 우리가 목도한 국가 없는 시대를 말하다
지그문트 바우만 외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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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히 벡과 앤소니 기든스와 함께 후기 근대론을 대표하는 지그문트 바우만과 저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탈리아의 사회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카를로 보르도니의 대담집인 이 ‘위기의 국가’를 읽었는데요. 안규남씨가 번역을 맡았고, 반가운 출판사인 동녘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여기에 참여한 두 사람이 뛰어난 논리로 대담을 진행하는데요. 그 주제들의 범위는 정치학 뿐만 아니라 철학, 사회학, 역사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난해하지 않았던 것은 역자의 노력이라고 생각됩니다. 다만 편집상으로 띄어쓰기가 잘못된 부분이 한 군데 있었는데, 그것은 옥의 티라고 할 수 있겠죠,

이 책의 제목인 ‘위기의 국가’는 간단히 말하면, 개인들에게 근대화 이후의 국가가 약속하고 보장했던 여러 안전 장치가 철회되고, 그것의 원인이라 볼 수 있는 무덤에 있는 ‘애덤 스미스’를 다소간 시장에 유리하게 해석해 자본주의가 국가 전반에 영향을 끼치고 그것을 바탕으로 시장주의가 점진적이기 보다 배타적으로 발전시켜왔던 상황과 그 결과를 앞서 언급해 드린대로 정치와 사회학, 역사, 철학 등으로 여러 방면에서 고찰해보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 한가지 명쾌한 것은 이러한 상황이 많은 학자들이 오도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과잉’이라는 것은 아니라고 밝히고 있는데요. 사실상 인간의 역사에서 민주주의가 과잉된 시기는 없었고 이것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악용하는 사람들의 문제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민주주의가 과잉되었던 시기가 있었는지는 조금만 살펴봐도 알 수가 있는 것이죠. 역설적이게도 모두에게 주어진 투표 권리가 그것을 통해 선출된 정부나 권력이 우리들에게 항상 이익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자체가 오늘날 만연해진 반정치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시민들에게 선출된 권력 혹은 정부가 항상 시민들을 위해 일하지 않는 현실은 전세계에서 너무나 많이 목격되어 도저히 부정할 수도 없는 것이죠.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1장과 2장이 위기가 닥친 국가, 정치가 없는 권력의 원인과 과정을 잘 설명해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3장은 조금 더 심화된 이론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그러니까 핵심은 대처와 레이건의 신자유주의가 위기의 국가를 초래했으며 그것의 종말은 2008년 세계 금융 위기였다고 결론이 납니다. 인간의 역사가 근대성을 획득함으로써, 자유와 보장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는 진자의 모습으로 나타났고, 그래서 사실상 진보는 과거의 유산이 되었지 현세대에서는 적용하기 힘들게 되었다는 바우만의 입장입니다. 신자유주의로 인해 시장과 결탁한 정부에 시민의 안전 보장과 복지와 관련된 문제에 진보가 목소리를 내지 못하리라는 것은 명백한데요. 자유와 보장의 양 가치는 높은 수준으로 서로 동시에 달성하기 힘든 속성을 지녀서가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속성이 뿌리깊게 전 사회적으로 내리면서, 바우만은 “1퍼센트의 최상위 부자들이 부의 90퍼센트 이상을 가져가버리는 걷잡을 수 없는 불평등을 아무런 부끄럼없이 과시한다는 점에서, 이 시기는 훨씬 더 수치스러운 시대이다” 라고 냉정하게 평가합니다. 가진자들의 자유와 욕망은 더할나위 없이 충족되고 그 반대에 있는 삶의 보장조차 확실할 수 없는 계층의 자유는 그만큼 희생되는데, 이러한 모습을 일견 관찰해봐도 많은 전문가들이 말하는 ‘민주주의의 과잉’은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죠. 이와 관련된 두 사람의 비판은 많이 나오는데요. 특히 경제적 신분이 불안정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프레카리아트’는 핵심입니다.

이렇게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은 민족주의와 포퓰리즘이 비정상적으로 대두할 가능성이 있고, “기득권자들은 유권자들에게 충성을 하거나 그들의 불평불만에 귀 기울일 의무도 없고 그들의 불만을 가라앉히기 위해 자신들의 이익을 희생할 생각도 없는 시대”를 더욱 고착화시키는 상황이 될 따름입니다.

3장은 과거의 근대는 공리주의가 주장하는 공공선을 바탕으로 정부가 마땅히 해야되는 책임을 인지하고 있던 시대였으며, 탈근대화와 포스트 모더니즘, 포스트 모더니티에 대한 철학적 사회학적 고찰을 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다소 이론적이어서 읽기가 난해하긴 했습니다만 1장과 2장의 연계된 논의가 이론적으로 보충되면서 결론이 난다는 점에서 다소간의 인내심이 필요하더군요.

약간의 논외지만, 앞 장에 메르켈 독일 총리에 관해 다소 신랄한 비판을 하고 있는데요. ‘메르키아벨리’ 라는 우리가 아는 마키아벨리를 연계시켜 군주의 무자비하고 가공할만한 비결의 최신판이라는 수식어를 메르켈에게 더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전략을 희화화 하면서 EU 가맹국에게 가혹한 수단을 적용하고 있는 행태를 꼬집고 있는 듯 합니다. 이 ‘메르켈 현상’은 오롯한 경제 일방주의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메르켈과 그녀의 독일이 주변을 강제하는 불통의 대표적 현상이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이 책은 몇번이고 계속 읽어볼 만한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권력에 자발적으로 봉사하는 지식인들이 태반인 시대에 이 두 사람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거의 기적과 같은 일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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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리더는 거짓말을 하는가? - 지도자의 거짓말에 관한 불편한 진실
존 미어샤이머 지음, 전병근 옮김 / 비아북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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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정치학계에서 손꼽히는 현실주의 이론가이자, 오늘날 새뮤얼 헌팅턴과 더불어 많은 학자들과 전문가들에게 인용되고 있는 이가 이 책의 저자 존 미어샤이머인데요. 마찬가지로 그는 미국 내에서 유명한 중동 정세 전문가이고, 최근에는 G2라는 단어와 함께 대두하고 있는 중국에 관한 여러 글과 논평을 내고 있기도 합니다. 특히 “(가까운 미래에) 중국이 평화적으로 부상하기란 어려울 것이다”라는 예측을 하고 있는데요. 저 역시 중국과 관련한 미어샤이머의 주장에 수긍하는데요. 여러 사람들의 평가대로 그는 면밀한 현실주의 이론가지만 동시에 견고한 지식이 바탕이 되어 상당히 설득적이기까지 합니다. 물론 미어샤이머 역시 상당한 논란이 되기도 하는데요. 과거 네오콘과 관련된 몇가지 평가에 대한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글은 저자인 미어샤이머가 서두에 밝힌대로, ‘거짓말’과 관련된 거의 최초의 사회학적 내지는 국제정치학적 분석을 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주제의 글을 쓰게된 계기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경험으로 역시 밝히고 있는데요. 인간심리학이나 관계학 등의 거짓말이 아니라 정치와 외교가 관련된 ‘거짓말’에 대해 여러 역사적 사례를 바탕으로 상세하면서 꽤 논증적인데요. 일단 국가와 정치권이 전략적 이익과 여러 가능성을 두고 행하는 거짓말에 대해 미어샤이머는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국가 간 거짓말, 공포 조장, 전략적 은폐, 민족주의 신화 창조, 자유주의 규범에 반하는 거짓말로 이것들이 발생하는 요인과 과정, 결과로 인한 이득에 대해 밝히고 있고, 이어 8장과 결론에서는 이러한 5가지 거짓말들이 초래하는 나쁜 영향과 오늘날 민주국가의 리더들이 각각의 이유로 행하는 전략적 거짓말들이 초래하는 위험성으로 결론을 내고 있습니다.

미어샤이머는 미국의 대표적인 네오콘인 어빙 크리스톨의 입을 빌어 “다수 대중이 진실에 대처하는 능력이 없다”고 소개하며, 동시에 민주 정부의 엘리트들이 다수의 대중들을 마땅히 통솔해야 하며, 이러한 책임과 역할에는 국가 리더 즉 대통령과 같은 국가 수반들이 자신과 국가를 위해 서슴없이 벌이는 거짓말들에 대해 시작합니다. 이 책에서 지도자는 크게 두 개의 거짓말을 하는데, 첫째는 국가 이익에 봉사하기 위해서이며, 둘째로는 그냥 이기적인 거짓말인데, 아마도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함일텐데요. 앞서 언급한 5개의 거짓말에 맞는 사례들을 결과론적인 이익의 차원에서 평가하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과거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의 선전포고를 이끌기 위한 비스마르크의 책략이라든지, 나치 독일의 히틀러가 체코와 폴란드에 관련하여 영국과 프랑스를 기만한 행위, 2차 대전 당시 연합국 내에서도 암암리에 벌어졌던 기만 전술, 미국 케네디 행정부 때 발생한 쿠바 미사일 위기 때, 미국 정부가 뒤로는 소련과 협상을 했던 것을 20년간 숨긴 것이라든지, 존슨 행정부의 베트남 통킹만 사건, 루즈벨트가 국민의 참전 동의를 얻기 위해 벌인 USS 그리어호에 대한 거짓말 (이것에 대해 미어샤이머는 적절한 거짓말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표적으로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은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와 관련된 수많은 거짓말, 민족주의적 신화 창조와 관련하여 과거 이스라엘이 벌여왔던 거짓말 등을 꼽고 있습니다.

특히 이들 거짓말과 관련된 은폐 작전은 많은 민주국가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높고, “2003년 3월 중순 이라크 전쟁이 시작됐을 때 미국 국민의 절반 정도가 이라크의 독재자가 세계무역센터를 무너뜨리는 데 일조했다고 믿고 있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고 언급하며 정치권의 정당성을 위한 이런 거짓말들이 우리에게 어떤식으로 파생되는지에 대해 그는 명백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국내 정치에서 국가 리더는 정치적인 이익 등에서 자신의 국민들을 조직적으로 속이기도 하지만, 실제적으로 이러한 ‘국제적 거짓말’ 들이 자주 동원되면 자유주의적인 신뢰의 측면이 심각하게 훼손되지만 이러한 거짓말을 함으로써 얻게되는 이익이 국가 리더를 비롯한 정치권의 고려에 있어서 크다고 보는데요. “국가간 거짓말 나라를 목표로 하고, 공포 조장은 국내 전선을 겨냥하는 반면, 전략적 은폐는 보통 국내외 양쪽 청중 모두를 조준한 것”이라고 보는 것 또한 원론적인 신뢰 실격의 가능성 보다 거짓말의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이익이 크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번번히 행해지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러한 이익적 고려해서 발생하는 거짓말들이 특히 동맹국들의 신뢰 상실과 관련해서 시사하는 바는 큽니다. “과거 헨리 키신저, 로버트 맥나마라 등은 소련의 대규모 재래식 공격이 닥치더라도 서유럽을 보호하기 위해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소회하며, 당시에는 미국의 핵우산이 서유럽의 동맹국들에게 드리워져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지만 사실상 이것은 보여지는 진실과는 다른 것으로 보여져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양면적인 측면에서 국제적 거짓말은 잠재적인 위험을 야기해 심각한 우려를 낳을 수 있으며, 신뢰가 훼손 상태에서 다른 국가와의 대화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고, 이러한 거짓말에 의한 정치가 비교적 손쉬운 측에 속해 국민들이 정치에 갖는 진정성에 나쁜 영향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겠죠,

결론적으로 무정부주의적 국제 정치에서 스스로의 자립을 위한 거짓말은 매우 필요한 수단일겁니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기만과 은폐는 국가 진로에 일정 부분 이득이 될 수 있고, 국민들의 동요를 미연에 방지하거나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하는데 (물론 적법한 수단은 아니지만)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저자인 미어샤이머는 헨리 키신저 만큼은 아니지만 국제정치에서 현실주의 이론가로 알려져 있는 관계로 이러한 국제 거짓말의 효용과 이익에 대해 어떻게 보면 필요불가결의 이해를 보이기도 합니다만, 이라크 전쟁 당시 조지 W. 부시와 존슨의 통킹만 사례를 들면서 오용된 측면과 전체적으로 국제 정치 무대에서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일정 부분 인정하고 있습니다. 최종적인 ‘국제 거짓말’의 판단을 독자들에게 맡기고 있는 듯한 인상도 있습니다만, 아마도 정치와 정치가들의 거짓말 매커니즘에 대한 달갑지 않은 정보와 이해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은 꽤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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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케넌의 미국 외교 50년 - 세계대전에서 냉전까지, 20세기 미국 외교 전략의 불편한 진실
조지 F. 케넌 지음, 유강은 옮김 / 가람기획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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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미소간의 냉전이 첨예하게 전개될 시기에 소위 ‘냉전의 아버지’ 혹은 ‘냉전의 설계자’ 라는 평가로 유명했고, 미국 외교 역사상 현재에도 중요한 평가를 받는 조지 F. 케넌의 강연록을 엮은 이 책을 일독했습니다. 원제는 American Diplomacy 인데요. 지난 2012년 미국에서 출간되었고, 이듬해인 2013년 가람기획에서 한국어판으로 최초 번역을 했습니다. 저에게는 이 가람기획이라는 출판사가 내심 반가운데요. 제 서가에도 역사와 관련한 이 출판사의 책들이 제법 꽂혀있습니다. 지난 대학 시절에 관심깊게 읽었던 여러 역사물이 이 출판사의 출판물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유명한 존 J. 미어샤이머가 친히 서문을 썼는데요. 케넌의 이 책은 엄밀히 따지면 일종의 연구물일 수는 없지만, 강연록의 형태임에도 꽤나 지난 사반세기의 국제 정치와 관련하여 꽤 시사하는 바가 컸습니다. 얼마전에 리뷰했던 리처드 돕스의 ‘1945’에서도 짧게 이 케넌이 언급되어 나오지만, 과거 헨리 키신저와 같이 국제 정치에서 면밀한 현실주의자로 개인적으로 그를 해석하고 있었는데요. 글을 찬찬히 읽어보니 이와같은 제 생각이 조금 짧지 않았나 싶습니다. 국제 정치를 대하는 이들을 크게 자유주의자와 현실주의자로 나뉜다면 이 책에서 보여지는 케넌은 엄밀히 완벽한 현실주의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 글의 1부는 찰스 R. 월그린 재단에서의 강연을 실고 있는데요. 크게 6개의 부분으로 1898년 대 스페인 전쟁과 아편전쟁 즈음에 중국에 대한 서구 열강의 침탈의 시기,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후의 일본의 대두, 양차 대전, 그리고 짧은 현대 세계의 외교를 담고 있습니다. 찬찬히 소개를 해 드리자면, 1898년 스페인과의 짧은 전쟁 당시 쿠바의 정권 사태와 메인호의 침몰로 인한 신속한 전쟁, 그리고 그 결과로 필리핀을 스페인으로부터 양도 받는데요. 케넌은 이 상황을 적나라하게 서술합니다. 당시 미국인들이 다소 제국주의적 분위기의 열망에서 시급하지 않은 필리핀을 손에 넣고, 아시아 최초의 민주주의 국가였던 필리핀을 병합한 것이 과연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었는지, 이미 태평양의 거점으로 하와이를 두고 있으면서 앞으로 전개될지 모르는 중국 진출에 대한 거점지로 필리핀을 택하고 그것을 정당화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은 면이 분명 있다고 보고 있는데요. 하와이를 점령하면서 과거 아메리카 원주민을 나치의 유대인 청소만큼 적극적으로 격멸하고 제거하는 방식으로 답습해 오늘날 “무기력하고 치욕적인. 관광객들의 볼거리로 전락시킨 것”으로 히틀러의 독일과는 달리 민주주의의 미국은 설사 패망하고 좌절하더라도 최소한 반성할 수 있는 기회는 있을 것이다라고 그가 말하는 것은 진정성이 있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서구 열강의 침탈을 받을 찰나에 미국이 개입해 ‘문호개방’이라는 기본적 조건을 설정해 관리한 사실이라든지,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이후 그 지역에서의 일본의 기득권과 영향력을 인정했지만 미국이 추구하는 아시아 지역에서의 목표는 결국 2차대전 이후 일본을 중국과 만주, 한국에서 쫓아내는 것으로 달성했는데 베를린의 독일과는 어떻게 도쿄가 그 전후처리가 달랐는지에 대해 지정학적인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태평양을 내해로 여기는 미국인들이 일본을 자신들의 영향력에 두고 소련을 상대하는 것이 그들의 이익에 부합되는 것인데, 그것을 굳이 지정학적인 관점으로 이해시키는 것은 뻔히 보이는 것이긴 합니다만 이 부분에서 케넌은 명확히 ‘미국의 전통적인 민주주의의 설계자’의 입장에서 전후의 일본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열강의 공세에서 무력했던 중국을 정당한 무역 권리라는 이름으로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던 미국의 입장이 바로 케넌이 말하는 방식과 비슷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요. 미국인들에게 보편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민주주의적 가치와 옹호가 그러한 사고방식의 근본 같습니다.

그리고 양차대전에 대한 입장에서도 ‘1차대전은 무모한 살육의 한 가운데 있던 파괴적 전쟁’ 이었고, ‘2차대전은 독일을 바꾸기 위한 싸움, 독일의 행동을 바로잡고, 독일인들을 다르게 만들기 위한 것’ 으로 이미 뮌헨 협정 이전에 영국과 프랑스와 미국이 관여하여 ‘역겨웠던 히틀러 정권’을 유하게 만들 수 있었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 못했고, 오로지 무조건적인 항복과 그를 위한 무차별적인 나치 독일과의 총동원적인 전쟁이 ‘무조건 정의로운 전쟁 만은 아니었다’는 케넌의 평가를 담고 있습니다. 한국 전쟁과 케네디 정부 하의 쿠바 사태에서 핵무기 사용을 입에 담았던 ‘커티스 르메이’ 와는 달리 조지 케넌은 원칙주의적이고 도덕적인 측면이 있어 보입니다. 이는 키신저와도 다른 부분입니다. 양차대전 이후 소련을 상대하는 것에 대해 조심스럽고 숙고하는 자세로 봉쇄에 나서야 한다는 것과 처칠에 이어 다음 영국 수상에 오른 ‘사회주의자’ 애틀리가 소련을 극도로 혐오했던 것과는 달리 케넌은 공산주의에 대한 아주 세밀한 분석과 소련 자체를 독재 권력에 준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이를 미국 정부가 적절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입장도 케넌의 실용주의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글 말미에 아이젠하워와 마찬가지로 ‘군산복합체’에 대한 일종의 우려와 경고, 미국 내부에서 불타오를 수도 있는 막연한 애국주의 등에도 경고를 하는 것에서 그가 원칙주의적 입장에 서 있는 것으로 보여지지만, 반대로 여기에 보이는 도덕과 법치주의에 너무 몰두하지 말고 국익을 고려하고, 너무 이상주의에 몰입하지 말고, 세력 균형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등의 주장들은 그가 기본적인 현실주의자의 표면도 보였습니다. 다만, 과거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일정부분 인정했다는 측면과 세력 안정을 위해 1차대전 이후의 일본의 기득권을 인용한 것은 우리로서는 유쾌하지 않은 부분일겁니다. 개개인에 따라 이 책의 여러 주장들에 대해 호불호나 상반된 평가가 있을 수 있지만, 전체적인 그림에서 미국의 외교와 정치가 어떤 방식으로 흘러가는지에 대한 충분한 이해는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곁가지이긴 하지만 케넌이 생각하는 외교와 국제정치에 대한 일면을 또 엿볼 수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저에게는 꽤 정형화되어 있던 그간 케넌의 이미지가 (일정 부분) 제대로 이해되기 시작하지 않았나 싶은데요. 앞으로 그와 관련된 책들을 좀 더 찾아봐야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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