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세계 - 미국 외교정책과 구질서의 위기, 그리고 한반도의 운명
리처드 하스 지음, 김성훈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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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부터 미국 외교 협회의 회장으로 재임하고 있는 미국 외교가의 존경받는 이론가인 리차드 하스의 최근 출간된 ‘혼돈의 세계’를 일독했습니다. 원제는 A World In Disarray 입니다.

개인적으로 리차드 하스의 글은 두번째 접하는데요. 지난 2005년에 국내에 출간된 ‘미국 외교 정책의 대반격’ 을 작년경에 읽었는데요. 전체적으로 이번 책은 배경과 주장이 얼마전에 출간된 브레진스키의 ‘전략적 비전’과 유사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현실주의적 측면에서 세계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은 아직도 필요하며, 어느 국가도 이를 대체하기 어렵다는 분석과 앞으로의 세계 질서가 그렇게 부정적이지는 않다는 해석도 브레진스키의 논리와 비슷합니다.

전체적인 내용은 과거 냉전시기의 국제 정치와 그 이후의 세계 질서의 흐름과 변화, 특히 탈냉전 시기를 거치는 과정의 지역별 국가들의 정치외교적 행위, 그리고 이를 대체로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는데요. 저자인 그가 설명하고 있는 내용들은 편향되거나 치우치지 않고 있는데요. 이런 점은 글을 읽는 내내 긍적적인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실 그동안 접한 미국의 나름 권위있는 학자들의 이론적 주장에는 ‘전세계에 대한 미국의 역할론’에 대해 다소 주관적이고 배타적인 내용들이 들어있기도 한데요. 하스는 그런 부분에서는 호주의 국제정치학 권위자인 휴 화이트와 유사하지 않나 싶습니다.

책에서 그가 밝히고 있는 내용들중에 통찰력이 느껴지는 부분은 만약 중국의 경제 성장이 조금이라더 더디게 된다면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이를 보상하려고 더욱 민족주의적 정책을 추진할 수도 있다는 부분과 중동의 시리아가 명백하게도 다수의 민간인들에게 화학 무기를 사용했음에도 당시 오바마 대통령이 어떠한 행동에 나서지 않은 것은 미국과 동맹을 맺고 있는 국가들에 대해 우려를 안겨주었다는 잠정적인 분석에도 크게 긍정했습니다. 더욱이 오늘날 북한으로 비롯되는 핵개발 문제점에도 국제 사회에 NPT 체제를 오랫동안 유지시키면서도 강력하게 핵을 보유하려는 국가들의 시도를 전혀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지역 질서를 포함해 세계 안보에 위기를 안겨준 이러한 몇 가지 사건들의 분석이 탁월하다고 느껴되더군요. 덧붙여, 파키스탄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가 잠정적으로 세계 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동의하는데요. 파월 전 국무장관의 입을 통해 파키스탄의 핵이 주변으로 유출되지 않고 통제가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은 과거 오바마 대통령이 ‘파키스탄의 핵은 안전하다’고 발표한 것과 교차되어 ‘안전하지 않은 파키스탄의 핵무기’ 에 대한 반증이 아닌가 싶더군요. 뭐 미국 정부로서는 그렇게 밖에 대외적으로 밝혀야만 했을 겁니다. 그 입장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면서 어쩌면 당연하게도 러시아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리아 문제와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의 나토 가입 등과 관련된 정치 외교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해 미국 정부가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하면서 강력한 민주주의 체제를 통해 발전하고 있는 여러 양자간 동맹국들과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만 ‘미국이 동맹국에 대해 안보를 제공하므로, 이 국가들은 무모하거나 도발적인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단언하는 것은 다소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요. 특히 일본의 경우는 위의 금언이 절실히 필요한 국가임에도 미국이 잠재적으로 동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정치 군사적 역할 증대를 원하고 있는 상황에서 뭔가 모순된 상황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약간의 괴리감이 들어서 반박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물론 글의 맥락은 대만을 빗대어 말하는 것으로 나와 있었지만 사실상 미일 동맹은 일본의 재무장을 제한하는 측면의 효과도 있었기에 과거 키신저와 저우언라이의 미중 수교 교섭에서 이러한 사실이 논의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차드 하스의 이번에 출간된 글은 독자들에게 현실주의적 국제 정치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면서 동시에 대체로 이해하기 쉽게 서술되어 있어서 좋은 평가를 주고 싶더군요. 어쩌면 국제 정치 이론에서 논의되는 이론적 주장들 가운데에서는 독자들에게 기본적인 배경 지식을 제공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리차드 하스가 결론적으로 주장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아직은 전세계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은 얼마간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최근 몇년간의 미국 경제 악화로 인한 국방비 감소로 인한 재정적 상황이 좋지 않아 이 점이 우려스러운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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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슬람은 서구의 적이 되었는가
타마라 손 지음, 김문주 옮김 / 시그마북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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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 타마라 손은 미국 조지타운대학교에서 이슬람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정통한 이슬람 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지금까지 100편이 넘는 논문과 글을 썼다고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는데요, 그래서 조금 기대를 안고 보게 되었습니다. 책은 작은 문고판 크기의 200페이지가 안되는 얇은 분량입니다.

원제는 Is Islam An enemy of The West 인데요. 구글에서 검색을 해보니 원서판과 지금 이 국역판의 표지가 똑같더군요. 제목의 의미도 크게 벗어나지 않게 번역을 한 것으로 나오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여기 제목에서 이슬람을 서구의 적으로 대비시켜 표현되어 원제와는 달리 자극적으로 만들어 놓은게 아닌가 싶었는데 이것은 저의 오해였습니다.

우선 책의 전체적인 내용은 평이한 편입니다. 흥미롭다거나 새로운 인상의 논점은 거의 없었는데요. 다만, 명백하게 이슬람인들과 이슬람주의적 테러 단체와의 구분을 명확히 해줄 것을 독자들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이 책이 나오게 된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저자의 의도에는 공감하는 편입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대로 이슬람을 믿는 평범한 이슬람교도들은 민간인들에 대한 테러와 살해에 동의하지 않는 편이고, 이것을 코란이 내세우고 있다는 테러단체들의 주장에도 반대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죠. 더 본질적으로 저자는 알 카에다와 같은 이슬람주의 테러 단체가 코란을 비롯한 종교 해석과 이론 연구를 무시하고 오로지 마오쩌둥 식의 정치투쟁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꼬집고 있는데요. 이는 얼마전에 사실상 격퇴당한 IS가 칼리프가 통치하는 이슬람 국가를 세우려고 한 것과 같은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와 메디나를 아우르는 칼리프 국을 건국하려는 거의 실현 가능성이 없는 욕망을 기저에 놓고 있는데요. 여기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라고 봐야겠죠. 과거 이란이 팔래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정교 일치 국가를 세운것처럼 이란의 적대적이고 파괴적 형태가 IS 모델이 아닌가 싶습니다.

유럽이나 미국에 거주하는 즉, 민주주의 사회에서 삶을 보내고 있는 이슬람인들은 세계의 민주주의 원조 국가인 미국이 다소 전제주의적이고 독재체제를 보이고 있는 중동의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 등을 국익의 명목으로 후원하고 지지하는 것에 대한 격렬한 비판 의식을 갖고 있는데요. 물론 2차대전 이후 냉전시기를 거치면서 핵전쟁의 위협을 안고 있던 동서 대립의 시기에 미국이 안보를 이유로 많은 독재국가를 묵인하고 지원한 것은 사실입니다. 거기에다 이스라엘을 위한 배타적이고 일방적인 정책을 미국 정치권이 그동안 보여왔기에 그런 부분에서도 많은 이슬람인들에게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타마라 손도 이 부분을 언급하고 있는데요. 2차대전 이후에 영국과 미국의 소위 ‘이스라엘 건국 지원’ 이후 수십만의 팔레스타인 난민을 발생시키고 자신들의 안보를 위해서라면 무슨짓이라도 하는 이스라엘을 보노라면 현실적인 분노를 느낄 수 밖에 없을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슬람인들의 국가가 인권과 민주 정치를 외면하고 현실 정치에 종교를 잣대로 삼는 비이성적인 행위들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것은 자신들도 되짚어 봐야하는 문제인데요. 종교인 이슬람 교리가 현실에 우선해 이를 기반으로 해석하는 것은 많은 이슬람인들이 생각해봐야 될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많은 유럽인들이 유럽에 이슬람인들의 이주가 증가하면서 종내에는 강고한 배타적 이슬람주의가 기승을 부려 역겨운 파시즘으로 오도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에는 이 점이 문제라고 봐야겠죠.

아직도 서구 유럽인들과 이슬람인들이 이렇게 서로 터부시하는 시선과 몰이해의 측면이 이런 뿌리깊은 내재적 갈등을 수반하지 않았나 하는 해석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테러주의를 표방하는 이슬람 테러단체에 대해 반대하는 이슬람 내부의 일관된 태도가 있어야만 하고, 좀 더 세속의 일에 종교를 끌어들이는 일을 자제하면 좋겠지만 코란의 규율이 이런 반세속주의에 도움이 되지는 않겠죠. 그만큼 교리를 신봉하는 이슬람인들이 절대 다수이기 때문에 어려울 가능성이 높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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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자본권력의 불량한 역사 - 정권은 재벌을 만들고 재벌은 권력을 지배한다
안치용 지음 / 내일을여는책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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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저널 발행인 겸 한국 CSR연구소 안치용 소장의 최근 출간한 ‘한국 자본권력의 불량한 역사‘를 일독했습니다. 포탈에서 한국CSR연구소를 검색해보니 자세한 결과가 잘 나오지 않더군요. 일부 기사에서 기업의 지속가능한 사회 발전 등을 연구하는 연구단체 인 듯 한데요. 약간 첨언이지만 안치용 소장은 과거에는 신문사 기자로 오랫동안 재직한 경력이 있더군요.

이 책의 전체적인 내용은 해방 이후의 한국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해 온 한국 재벌에 대한 기원과 분석이 주 내용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여기에 인용된 자료들이나 주석으로 나오는 다른 연구자 내지는 학자들의 면면을 봐도 재벌에 대한 논조가 어떨지는 짐작이 되었습니다. 재벌에 대한 긍정적인 부분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이와 동시에 제가 들었던 생각은 현재 공정거래위원회 김상조 위원장이 잠시 떠오르더군요.

거의 재벌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만, 그 연원과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서 1945년 해방 이후, 미 군정과, 한국 전쟁 등 한국 정부 수립 시기 및 6.25 동란과 이후의 한국의 정치 역사 들을 자세히 원용하고 있는데요. 달리 표현하자면 다른 측면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다루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우리 나라의 자본 이식 과정은 거의 외적 요인에 의한 경우라고 볼 수 있는데요. 말할 가치도 없는 일본의 자본이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과 관련해서 저자도 언급을 하고 있지만 오로지 일본 제국을 위한 자본이 식민지 조선에 들어와서 그것에 아주 부합하는 역할을 한 것이 역사절 사실일겁니다. 저자도 이 부분과 관련하여 당시 식민지 상태의 조선에서 제대로 자본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조선총독부의 유무형의 승인 전제되어야 하는데, 이런 측면에서 조선 고유의 민족 자본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었느냐 하는 분석에 동의할 수 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한국 전쟁 이후엔 남한 북한 할 것 없이 한반도 전체의 산업 기반 시설이 파괴된 상황에 이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것은 거의 의미가 없다고 봐야겠죠.

이렇게 해방 이후 일본 자본가와 기술자 및 권력의 공백의 틈새에서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 및 미국 정부의 자본주의적 토양을 배양시킨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초기 재벌가들의 창립자들이 여러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의 사업을 일구고 이후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와 전투환 노태우의 신군부 쿠데타를 포함한 군부 독재 기간에 이들이 어떻게 당시 정권과 영합했는지 여러 자료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다른 자료들은 십분 양보해서 둘째치고라도 정권에 검은 돈을 건네준 재벌 그룹들의 명단을 보고서 부당한 권력에 영합한 이들이 현재의 한국 경제를 이끌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합당하지 않은 권력과 사익을 추구한 자본이 어떠한 일을 벌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역사의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다 보니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적 합당성을 국민들에게 얻기 위해 한일 기본 조약을 통해 얻은 자금과 월남전에 청년들을 파병해 얻은 특수 등을 중화확 공업 등 경제 기반 산업에 투자해 그것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부분에서 바로 이웃나라의 현실과 사뭇 유사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당하지 못한 권력에 대한 정당성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하는 통치권자의 태도와 그러한 행태의 결론은 항상 민주주의를 희생시키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특히 이러한 민주주의의 희생은 헌법을 위반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라 뒷맛이 더 씁쓸할 수 밖에 없지요.

끝으로 저자가 이러한 재벌 경제와 전세계의 신자유주의 기조로 봤을 때, 현재는 ‘금권정치‘의 시대로 여기는 것에 비감한 일이지만 동의할 수 밖에 없더군요. 보통 포스트 케인스주의자라고 일컫는 하이먼 민스키도 이와 비슷한 입장으로 시장에서 권력과 자본의 영합을 경고한 바가 있습니다만 이제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해 얼마나 더 효과적인 견제책을 마련할 수 있느냐에 미래가 달려있다고 봐야겠지요. 권력의 집중과 마찬가지로 부의 집중 또한 사회를 이반시키고 종내에는 파국을 일으키는 원인 중의 하나이죠. 그래서 시민 개개인의 학습과 질문이 거듭 중요해지는 시점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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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르포르 컴북스 이론총서
홍태영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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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큰 난제를 안겨주며 힘들게 서평을 쓴 책이었던 자크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에 언급이 된 프랑스 정치 철학가 클로드 르포르의 글을 찾아보게 되었는데요. 그 중에 국방대학교 안보정책학부의 홍태영 교수가 쓴 ‘클로드 르포르‘를 읽었습니다. 이 책은 커뮤니케이션스에서 ‘컴북스이론총서‘의 시리즈 물로 출간하중인 일종의 인문, 사회, 기술 분야의 독보적인 사상가들을 추려서 출간하고 있습니다. 예전 1997년 즈음에 한길사에서 ‘한길로로로‘ 시리즈와 비슷한 컨셉의 출판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뿐만 아니라 시공사에서도 이와 비슷한 시리즈물을 출간한 기억도 나는군요.

약간 논외의 말이지만 저는 학부 시절에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을 읽으면서 약간의 추종자 입장이 되어 그녀의 말과 행적을 쫓아 자료를 수집한 기억이 있는데요. 당시 한참 같이 한나 아렌트와 같이 나오던 인물이 클로드 르포르였습니다. 기억 저편에 놓고 잊고 있다가 이번에 랑시에르의 책을 보면서 다시 접하게 되었지요. 지금 이 책을 홍태영 선생은 얼마전에 출간된 르포르의 ‘19-20세기 정치적인 것에 대한 시론‘을 번역한 바 있습니다. 더불어 요즘의 신기한 현상으로 지젝과 랑시에르가 국내에 활발히 소개되면서 많은 독자들이 찾고 있는데요. 이에 곁가지로 르포르도 많이 언급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뿐만 아니라 르포르는 자신이 천착한 분야의 광범위성과 연계성으로 말미암아 토크빌과 한나 아렌트, 지젝, 랑시에르 등 근현대 정치사상사에서 함께 인용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책을 받아보니 얇은 신국판 크기의 페이지는 100여 페이지 정도 였는데요. 하지만 보기보다 상세한 내용이 담겨있다고 봐야하는데요. 르포르의 삶의 초반의 메를로 퐁티와 장 폴 사르트르와의 관계부터 사상적으로 꽃피우게 되는 퐁티와의 결별과 그 이후의 여러 저작들 중 앞에서 언급한 ‘19-20세기 정치적인 것에 대한 시론‘ 에서 프랑스의 역사에서 민주주의의 행적을 쫓으며 탁월한 해석을 보였는데요. 그가 프랑스인으로 태어나 프랑스 혁명을 눈과 글로 쫓을 수 있었다는 것은 사상적 토양에 있어서 긍정적인 부분으로 거기에다 토크빌이 주의깊게 관찰한 미국의 독립혁명까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학자의 연구를 체계적으로 연구한 것은 학문적으로 더할 나위없이 좋은 부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근현대 민주주의 역사에서 프랑스 혁명과 미국의 독립혁명은 주권 개념과 민주주의의 이념 확대의 획을 그은 사건으로 과거 전제정에서의 소수 권력층을 제외한 다수의 사람들이 인간 본연의 자연권을 배제당했다면, 르포르가 표현하는대로 더이상 국가는 신체와 같지 않게 된 것이죠. 루이 14세에 ‘짐이 곧 국가‘ 라는 표현이 바로 이러한 국가는 살아있는 신체와 같다는 지난 역사의 산물이었습니다.

또한 니콜로 마키아벨리에 대한 독해로 얻게된 정치적인 개념을 통해 우리 시대를 해석했고, 이와 더불어 과거 역사에서 민주주의와 정치적인 것의 선명한 개념을 찾으려 했던 것도 그의 여러 사상적 업적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면서 전체주의를 직시하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였는데요. 그는 민주주의의 적으로서 전체주의를 이해한 것 같은데요. 스탈린의 사회주의 혁명 또한 전체주의와 비슷한 궤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근현대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이 전체주의와 사회주의를 비슷한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주류가 되었으며 그것의 범주는 매우 넓은 편이죠. 저는 개인적으로 민주주의의 위기를 불러일으킬 불안 요인은 전체주의가 아니라 포퓰리즘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물론 양자의 해석이 서로 비슷할 수는 있지만 정치 불신과 양비론을 발판삼아 기존의 정치를 불신하고 도모 대상으로 생각하는 이 포퓰리즘과 포퓰리즘적 정치인들이 더 위험하다고 느껴집니다.

끝으로 현재의 프랑스 뿐만 아니라 요즘은 미국에서도 르포르의 저작을 출간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나라에서도 약간의 ‘신상‘ 같은 사상가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 책을 쓴 홍태영 선생의 2008년 출간된 ‘국민국가의 정치학‘을 곧이어 읽어볼까 합니다. 책을 얼른 구해야겠죠. 이 책을 출간한 출판사가 그리 규모가 크지 않다고 들었는데요. 이런 의미있는 시리즈 물을 출간하는 것에 응원을 보내고 싶더군요. 인문 사회과학이 나날이 도태되고 있는 요즘에 반가운 소식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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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신용 - 왜 기본소득이 필요한가
클리포드 H. 더글러스 지음, 이승현 옮김 / 역사비평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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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학에서 꽤 독특한 위치를 차지고 하있는 클리포드 H. 더글라스의 ‘사회 신용‘을 일독했습니다. 더글라스의 이 책은 1924년에 처음 출간되었는데요. 이번에 우리나라에 1933년 개정판을 베이스로 역시비평사에서 최근에 완역 출간을 했습니다. 출간된 해가 2016년인데, 그동안 잠시 잊고 있다가 이제서야 구해 읽게 되었습니다.

저자인 더글라스는 전공을 수료한 학자 출신이 아니라, 웨스팅하우스의 엔지니어로 일과 관련해 미국과 인도 등의 현지 경험하는 등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 웨스팅하우스라면 원자력 발전으로 유명한 그 회사인 것으로 추측되는데요. 뒤늦게 31세 나이로 캠브리지에서의 학업을 시작하지만 대학과정을 다 마치지 못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어떤 개인사가 있을법 한데, 따로 찾아보지는 않았습니다.

주류 경제학에서는 그의 이 책, ‘사회 신용‘에 대해 케인스가 과소소비론과 관련해 언급하고 있는데요. 약간의 상상에 기대면 그가 제도권과 주류 학자가 아니어서 크게 관심을 받지 못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학계의 기득권은 꽤 배타적인 법이라 할 수 있죠.

책을 전체적으로 요약해본다면, 시장 경제 시스템에서 금융과 이를 수단으로 삼는 금융권력에 대한 경각심과 전통적인 경제학에서의 기본적 이론들을 다시금 재론하는 것이 맥락입니다. 이런 토대에 고용과 산업 전반, 저축 문제, 세금 등을 서로 연계해서 다루고 있는데요. 이번에 국문으로 번역된 책에는 일종의 부제로 ‘왜 기본소득이 필요한가‘ 라고 나와있는데요. 물론 더글라스가 논의를 하는 부분에서 개인의 소득 문제와 그것을 바탕으로 최소한의 개인 소비 욕구와 생활에 대한 언급이 나와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고찰이라고 평가하는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꽤 독특한 도덕적 상벌 이론을 경제와 시장에 인용해 해석하는 것은 신선한 부분이지만 개인의 경제 시스템하에서 노임과 봉급, 배당 시스템에 긴밀하게 얽혀있는 것이 도덕적 규율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조금 맞지 않는 분석이라고 해야겠죠. 뭐 개인의 사적 이익 추구를 제어하고 규제할 수 있는 것은 법률이 효과적이 되어있고, 정부와 기업도 마찬가지로 이런 법률에 기반하는 것이 거의 정설이 되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문제는 실제로는 완벽하게 법률의 적법성대로 돌아가지 않는 현실이겠죠. 이 부분을 여기서 깨내 들면 매우 장황한 글이 될 듯 싶어서 이 정도로 언급만 하겠습니다.

이처럼 이 글이 나온 시점이 1차 대전과 사회 경제 시스템이 정부에 의존해야만 하는 즈음이라 면밀하게 지금의 시점과 맞아들어가지는 않습니다. 다만 한가지 확실한 건 그가 완전한 자유체제의 시장 자본주의를 옹호만 하지는 않았다는 점이죠. 실업자도 살 수 있는, 즉 고용되지 않고도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대책을 도입하는 일이란 부도덕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도덕적으로 타락시킨다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나, ‘노동‘에 의해서만 생계 수단을 얻을 수 있다면, 이들이 일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는 기껏해야 자살할 수 밖에 없을 따름이다 라고 하는 등 이것 말고도 금융 권력에 의한 소위 ‘금권 정치‘에 대해서도 에둘러 비판하고 있습니다. 제도권의 학자들은 이러한 더글라스의 ‘금권‘ 에 대한 언급을 다소 음모론적인 의미로 제한에서 받아들이고 있는데 약간 다른 상황이지만 지금의 미국 의회의 로비스트들을 고용한 각종 이권 단체들의 의한 이익 다툼이 ‘금권‘ 정치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폐해를 보이고 있는 현실이죠.

뿐만 아니라 경제를 다루는 이러한 금권이 기존의 ‘정치 권력‘에 까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으며, 종내에 그는 ‘현재 금융 및 사회 시스템의 붕괴는 확실하다‘ 고 결론 내며, 다시 1914년 이전으로는 돌아가기 힘들 것이다 라는 당시의 상황을 비장하게 말하는데요. 아마도 더글라스는 본래의 시장이 전통적인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자연적인 자정 능력이 발휘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말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금권력을 각 금융기관들이 집중시켜 개인이 사용할 수 있는 화폐와 구매력을 더욱더 제한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은 그래서 더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싶군요. 특히 전세계의 많은 보수 우파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의 소위 보수 우파들은 과거 대처가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에 대안은 없으며, 자본주의 주체가 모순이 없는 뫈벽한 것이라고 믿고 있는 권력과 기득권이 존재하는 것은 매우 사회 현실상 매우 위험하며 이를 단순하게 ˝분배 문제와 실업 문제는 상당 부분 망상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말하는 더글라스의 언급은 우리가 새겨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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