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단의 중국 현대사
왕단 지음, 송인재 옮김 / 동아시아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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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중국 텐안먼 민주화 운동’의 주역이자 이후 중국 정부의 연행을 받고 11년을 복역하다 극적으로 국제 사회의 압력으로 풀려나 미국 하버드대에 입학에 베이징 대학에서 마치지 못한 학업을 마치고 이후 미국과 영국의 여러 대학을 거쳐 현재 타이완 칭화대학에서 ‘중국 현대사’를 강의하고 있는 왕단의 책을 일독했습니다. 이 글은 특별한 연구 글이긴 하지만 동시에 대학에서 강의했던 내용을 실은 것으로 밝히고 있는데요. 책의 내용을 전혀 알지못하더라도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지만 2012년 중국 정부로부터 금서로 지정 받았습니다. 실로 중국의 정치가 어떠한지 충분히 인식될만한 일이 아닌가 개인적으로 생각해봅니다.

총 15강의 형태로 나뉘어져 중국 현대사에 있어서 매우 굵직한 사건 위주로 분류되어 어떻게 보면 각 파트가 독립적일 수도 있겠는데요. 물론 전체적인 맥락의 이해의 차원에서 완독을 하는 편이 아마도 더 유익할 것 같습니다. 대략적인 것들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한국 전쟁, 토지개혁, 반우파 운동, 중소 관계의 파국과 중미 관계 상호 작용, 문화대혁명, 덩샤오핑 시대의 개막과 이후에 6. 4 텐안먼 사건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다만 저의 개인적인 기대와는 달리 문화혁명과 관련한 부분이 다소 간략해서 아쉬움으로 남는군요. 그 외엔 특히 텐안먼 사건과 관련되서는 아주 상세히 기록과 더불어 사실적으로 쓰고 있어서 이 부분과 관련해 도움이 필요한 분들께는 좋은 기회일 것 같습니다. 물론 상당한 분량 만큼이나 이렇게 중국 현대사를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의 권력 지향적인 부분으로 접근해 다루는 것은 꽤 공감할 만합니다. 얼마전에 읽었던 니시무라 시게오와 고쿠분 료세이 공저의 ‘중국의 당과 국가’ 만큼이나 읽어볼 만한 글이 아닌가 덧붙여 봅니다.

이 책이 중국 당국으로부터 금서로 지정된 것은 저자 자신의 이력이 한 몫을 했겠지만, 그것보다도 마오쩌둥에 대한 아주 생생한 분석과 비판이 큰 부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번스타인의 ‘1945 중국, 미국의 치명적 선택’ 도 마오쩌둥에 대한 실제적인 평가와 비판을 했는데요. 번스타인의 글에서는 노련한 정치 술수로 최대의 효과를 내려 했던 마오쩌둥에 대한 묘사가 주였다면, 왕단의 글에서는 권력의 정점에 오르자 자신의 권위에 조금이라도 손상을 주는 사건과 인물에 대해 끝까지 그 책임을 묻는 그 집요함과 혀를 내두를만큼의 뒤끝작렬에 대한 묘사가 류샤오치, 팽더화이, 린뱌오 등과의 관계를 통해 아주 생생히 접할 수 있었습니다. 저자인 왕단도 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북한의 김일성도 이러한 마오쩌둥의 일인숭배에 착안을 한게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한국인으로서 궁금했던 한국 전쟁에 관련해서는 이미 러시아측의 공개된 문서 등을 통해 김일성이 얼마나 스탈린에게 남한 침공에 대한 허락과 지원을 받기 위해 노력했는지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데요. 다소 의외인거는 마오쩌둥의 경우는 스탈린의 김일성에 대한 지원 요구 땨문이 아니라 1950년 10월 2일 중국 공산당 정치국회의에서 린뱌오를 비롯한 정치국위원 전원이 북한 파병 결정에 반대했음에도 마오 스스로가 결정한 것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애초에 스탈린의 요구에 수동적으로 대응한게 아니라 처음에는 기분이 나빴는지도 모르겠으나 최종적으로는 자신이 나서서 결정한 사안으로 한국 전쟁 이후 중국 공산당의 권력 정당성이 강화된 요인이 되었는데요. 전쟁이 고도의 정치행위라면 마오의 그 결정은 딱 상황에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이처럼 왕단은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에 대해 노동 계급의 이념적 지향의 정치 집단이라는 기존의 중국 자신들의 선전보다는 어떠한 사소한 이익이라도 그것이 필요한 것이라면 이념과는 상관없이 아주 쉽게 옮겨갈 수 있는 일종의 이익 집단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조반니 아리기도 이와 비슷한 입장을 보인 적이 있고, 중국 관련 학자들은 아마도 이러한 접근에 충분히 공감할 것으로 보입니다. 즉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으로 일컬어지는 일종의 대 전환의 프레임이라기 보다는 중국 공산당 자체가 권력 유지와 선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이익에 쉽게 가까워질 수 있는 집단이라는 점이죠. 그리고 중국은 사회 전체에 파급력을 끼칠 수 있는 원동력이 ‘민족주의적 욕망’이 잠재해 있다는 점이 언제든지 중국 공산당은 이 민족주의의 배타적 욕망을 이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우려할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끝으로 공산당이 1949년 국공 내전에서 최종 승리자가 되면서 대만으로 넘어가지 않고 남아 있던 소위 민주당 계열 세력들과 합종 형태로 정권의 틀을 만들어 놓지만 결국 마오쩌둥이 반우파 운동으로 비롯되는 중국내 우파 세력의 일소를 통해 자신과 공산당의 권력 집중 작업을 끝낸 것으로 보여지는 부분은 의미심장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인간 고유의 사고와 사상의 자유를 그런식으로 틀어막아 스스로 자살의 길로 내모는 상황은 겪어 본 사람만이 아는 거겠죠.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 거대한 권력이 인간을 소모품으로 만드는 상황은 글로만 접해봐도 매우 충격적인 부분입니다. 그래서 중국과 밀접한 이웃 나라 국민인 우리들만이라도 이러한 중국 정치권력의 사실에 입각한 정확한 과거 행적과 실체를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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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중국, 미국의 치명적 선택 - G2 시대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리처드 번스타인 지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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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유명한 현대 중국학 권위자인 존 K, 페어뱅크 교수가 있던 하버드 대학에서 중국 역사를 공부하고 이후 베이징의 공산 중국에 파견된 미국 언론인으로 이름을 알린 리처드 번스타인의 1945 중국, 미국의 치명적 선택’을 일독했습니다. 원제는 ‘China 1945 Mao’s Revolution and Ameriac’s Fateful Choice’ 인데요. 우리말로 번역한 제목과 원문이 뭔가 비슷하면서 다른 느낌을 주는데, 책을 다 읽고 나니 마오의 중국이 될 수 밖에 없는 의미가 있더군요. 물론 역사적으로도 마오의 공산당이 중국의 권력을 손에 쥐게 된 것이죠. 약간 논외로 얼마전에 소개해 드린 리처드 J. 번스타인의 ‘악의 남용’을 기억하실겁니다. 철학자가 중국 현대사에도 관심있었나 하는 호기심을 절로 느꼈는데, 알고 보니 이 전자와 후자의 번스타인이 서로 다른 사람이더군요. 저는 ‘악의 남용’의 인상이 뇌리에 깊게 남아서 같은 저자인 줄 알고 좋아했었는데요. 저의 착각이었습니다.

이 책의 전체 분량은 약 680여 페이지입니다. 인용된 주와 출처가 표시된 분량이 비교적 적은데요. 그래서 상대적으로 본문의 분량이 그만큼 적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개인적으로 일에 쫓기다보니 완독이 너무나 늦었던 것 같습니다. 거의 8일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네요.

개인적으로도 적잖은 중국 관련 서적을 읽어봤지만 번스타인의 이 글은 좀 더 1941년부터 1945년 시기의 사실에 근접한 중국과 미국 정치의 진면목을 보여준다는 점에 의미를 주고 싶습니다. 소련의 스탈린과 미국의 루스벨트, 중국의 장제쓰와 마오쩌둥의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진면목들을 수많은 자료들과 역사적 분석 등을 통해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데요. 범위를 한정짓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지만 중국의 국공 내전이나, 왜 국민당의 장제쓰는 몰락했는가 등의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충분한 이해가 드실겁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당시 세계는 루스벨트와 처칠의 유럽에서의 나치 독일의 축출을 위해 과거 히틀러와 불법적이고 비도덕적인 불가침 조약을 맺은 스탈린의 소련과 전략적인 고려에 힘입어 손을 잡는데요. 이는 여러 학자들이 제기한 대로 루스벨트와 처칠의 정치도덕적 입장을 크게 훼손시킨 사건으로 그만큼 유럽 전선에의 상황이 심각했기에 그와같은 매우 정치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 즈음에 중국은 일본에게 밀리고 있던 장제쓰와 국민당 정부에 세력에 밀려 잠시 도태되어 있던 마오쩌둥이 주요한 정치 행위자들이었습니다. 미국의 루스벨트 행정부는 처음에는 장제쓰에 대한 노골적인 불신이 이 시기에는 거의 없었으나, 국무부 중국 전문가들은 장제쓰의 국민당 군과 장제쓰 개인의 권력에 대한 야심 등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는데요. 소련의 스탈린도 마찬가지로 장제쓰와 마오쩌둥의 대립은 일본군과의 전황에 하등 좋은 이유가 없으며, 길게는 중국에서의 불리한 전황이 만주의 100만 일본군으로 하여금 과거 1904년과 같은 일본 제국주의에 침략 구실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제쓰와 마오쩌둥의 합작은 매우 시급한 요구였습니다.

거의 특사로 파견된 패트릭 헐리 상원의원이 양 측 사이의 중재자로 노력하면서 초기에 장제쓰와 마오쩌둥 간의 협력의 분위기가 시도되긴 하지만 미국 정부의 중국에 대한 조심스럽고 복잡한 이해관계와 헐리 대사와 미 국무부 중국 전문가들과의 대립으로 루스벨트 대통령이 최종적으로 헐리의 안을 채택하면서 마오쩌둥의 공산당과 거리를 두는데요. 이 시기의 마오쩌둥은 자신이 대외적으로 민주주의적 이념을 선호하는 이미지를 선전하면서 미국과 중국 공산당이 협력할 수 있음을 내비치지지만, 저자인 번스타인이 지적한대로 마오쩌둥 그는 후에 자신이 수많은 반대파와 정적들을 제거함으로써 이것이 하나의 정치적 술수에 지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충동적이고 기만과 술책에 능수능란했던 마오쩌둥의 면모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장제쓰의 국민당은 버마에서의 일본군을 효과적으로 제압한 것을 들어 미국 조야에 퍼져있던 ‘무능하고 대책없는 수준’은 처음에는 아니었던 것으로 재조명을 하고 있는데요. 그는 중국인들에게 ‘대원수’라 불리우며 중국 서해안 지역 일대의 일본군에 맞서 비교적 고립된 상태의 상황에서 지원된 소수의 물자로 잘 버티고 있었다는 점으로 저자는 재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100만이 넘는 효율적이며, 훈련과 장비가 잘 되어 있는 일본군으로부터’ 몇년간의 전선 유지를 맡아 온 것은 폄훼받을 일은 아니겠지요. 다만 1945년 이후 매우 실망스런 공산당과의 대결은 전반적인 부분에서 군의 무능과 부패를 바로잡지 못한 수장의 책임은 피할 수는 없을것입니다.

이처럼 눈앞에 보이는 듯한 미국과 중국의 양 거두 정치인들간의 정치 게임과 많은 자료들을 적시 적소에 배치하고 당시의 정치 상황에 대한 일목요연한 분석은 당시 상황을 주제로 한 여느 역사 서적보다 탁월하다고 여겨집니다. 읽다 보면 눈앞에 잡히는 현실감에 저역시 놀라웠습니다. ‘중국인들은 잘못된 미신의 일환으로 죽은자의 피로 적신 빵을 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는 자료처럼 꽤 놀라운 것이 많습니다.

끝으로 1949년 중국 공산당의 내전 승리와 소련의 핵실험은 미국 정부에게 있어선 매우 큰 충격으로 다가왔는데요. 당시 미 의회는 중국 대륙에서의 국민당 정부의 패퇴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정치인들간에 온갖 정치 설전과 비난전이 있었습니다. 의회를 통해 상응하는 그 책임을 묻겠다는 소리도 들렸는데요. 여기에 저자는 이러한 분석을 합니다. ‘루스벨트는 처칠과 달리 스탈린이 전후 미국과 우호 협력의 관계로 남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1945년 4월 그가 죽는 순간까지 이를 놓지 않았으며, 그가 위독한 시기에 중국 국공 내전에 대한 리더십이 실종되어 미국 정부 고위층에 있는 어느 누구도 중국 문제에 관해 책임을 다하지 못했고 뒤이어 트루먼 행정부에 들어서도 중국 인식에 대한 혼란이 지속되었다’ 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1949년의 중국 공산당의 내전 승리가 뒤이어 1950년 한국 전쟁에 영향을 미쳐 이 사건의 소회가 작다고 할 수 없겠습니다. 논외가 되겠지만 번스타인의 이 책은 여러 위키 백과에서 인용되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그만큼 일독하시면 중국 현대사와 관련해 보다 타당한 시각이 갖춰지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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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탈국가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강탈의 역사
존 로즈 지음, 이정구 옮김 / 책갈피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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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Israel : The Hijack State : America’s Watchdog in the Middle East. 인 이 책은 존 로즈의 1986년에 출간된 책을 최근에 국문 ‘강탈국가 이스라엘’로 번역한 글입니다. 최초 출간이 1986년이라 그 전에 국내에 번역이 되었는지 검색을 해봤는데요. 따로 나오지는 않더군요. 요즘의 번역 출간 추이를 봤을 때 꽤 시간차이가 있는데요. 아무래도 이런 부류의 책은 출판을 하는 것이 오히려 리스크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같은 사람에게는 매우 반갑기도 합니다. 논외로 원제보다는 국문 제목이 좀 더 순화된 표현인 것 같은데요. 이 책을 읽고 나면 원제의 의미가 이해 되기도 합니다.

소위 ‘시오니즘 운동’ 이라 불리우는 유대인들의 국가 건설 노력은 1945년 세계2차대전이 끝나고 영국과 뒤이어 미국의 외교적 묵인하에 원래 그 지역에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들이 유입되면서 시작되는데요. 여기에 존 로즈도 밝히고 있지만, 2차대전 이후 유럽의 유대인들이 거의 대다수가 히틀러에 의해 희생되었지만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 다수가 중동으로의 이주 보다는 유럽과 미국 등지로의 이주를 선호했고 이는 시오니즘 세력과 분리에서 이해하는 것이 좀 더 명확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얼마전에 읽은 존 J. 미어샤이머의 ‘이스라엘 로비’에서는 미국 내의 이스라엘과 유대인의 로비 단체 및 이익 집단이 미국 의회와 백악관에 벌이고 있는 금권 로비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나오고 있는데요. 미국 정부가 ‘유대주의 로비’에 이스라엘에 대한 무비판적인 행태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오해이며, 이스라엘 자체는 미국의 중동 정책에 있어서 중요한 교두보이고, 중동의 정세는 석유와 관련하여 미국의 정계 및 경제계에 있어서 중요한 이해관계입니다. 미국에 고분고분하지 않는 중동 정권들을 길들이는데 이스라엘 만큼 요긴한 정치적 수단이 없다는 점에서 왜 미국이 이스라엘을 안고 가는지에 대해 이러한 배경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밝히는 저자인 로즈의 입장도 이와 비슷합니다.

여기에 로즈는 더 덧붙여, 그동안 미국이 이스라엘에 비교적 최신의 무기들을 이스라엘에 제공한 것은 미 방산업체들의 요구라고 볼 수 있는데요. 사실상 이스라엘이 이 무기들을 사용함으로써 그 실효성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 대한 정보들을 미국측의 제공한 것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즉, 미국이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정권과 국가 유지에 지원을 나서는 것은 무조건적인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벌이는 일들이 아니라는 점이죠.

끝으로 세계대전 와중에 ‘홀로코스트의 지옥’에서 살아남은 민족이 거의 나치와 비슷하게 팔레스타인들과 주변 아랍민족을 다루고 있다는 것은 인류 역사의 선명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거의 대부분의 주변 요건을 배타적으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인 힘의 논리로 대하는 것은 유대인들과 이스라엘의 논리가 얼마나 빈약한지 충분히 깨닫게 해줍니다. 로즈는 1982년 팔레스타인 수뇌부를 제거하기 위해 레바논 남부와 수도인 베이루트에 행한 대규모 이스라엘 공군기에 의한 융단 폭격과 지금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는 무고한 민간인들의 희생자 수 등을 고려했을 때 이런 상황을 거의 묵인한 국제사회와 오히려 이를 부추긴 미국과 서구의 행태를 봤을 때 견고한 국가 체제와 국력의 결여가 어떠한 결과를 갖고 오는지 이 레바논의 사례로 교훈을 얻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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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계급투쟁 -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희상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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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경제학의 피케티와 함께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는 슬라보예 지젝의 ‘새로운 계급투쟁’을 읽었습니다. 지젝은 우스개로 동시대의 슬로베니아인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이라고 평가받는 것처럼 일반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감과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요. 저 역시 요즘 유럽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대중영합주의적 정치 현상과 시리아와 리비아를 비롯한 지역에서의 난민 발생과 이 난민들이 유럽에 유입되는 현상에 대해 좀 더 이해가 필요해서 이번에 지젝의 글을 처음으로 잡았습니다.

일단 번역은 참 나무랄데가 없었다고 밝히고 싶습니다. 평소에도 지젝의 글쓰기가 그렇게 난해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문과 번역이 잘 맞아서 그런지 일독이 꽤 즐거웠습니다.

여기에 소개된 글을 전체적으로 요약해 본다면, 파리를 비롯한 유럽 각지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테러, 시리아, 리비아 사대로 비롯된 유럽의 난민 유입 등에 유럽인들에 의한 (다소 기계적인) 문화종교적 상대주의, 난민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일부 사람들과 이를 악용하는 대중영합주의적 정치와 정치인들에 대한 비판을 매우 받아들이기에 더할나위 없이 효과적으로 독자들을 설득하고 있는데요. 합리적이고 이해가 쉬워 개인적으로는 지젝의 주장에 수긍이 가더군요.

요즘의 많은 문화 상대론자들이 이슬럼 성전인 쿠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슬람 근본주의적 배타성’에 비판을 가하지 않고 있고, 여기에 여성 성폭력의 대상이 되는 이슬람 제3세계 여성들에 대한 입장 또한 묵인에 가까운 상황에 진보주의와 좌파인사들의 동일한 행동에 비판을 서슴지 않고 있는데요. 이에 좌파는 ‘신앙인은 아니지만 광신에 반대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문화를 존중하는 교인은 존중하자고, 흥미로운 것은 이슬람 자체가 이 구분을 명확히 했고, 오늘날까지 이를 지켜왔다는 것이다.’ 라는 주장을 지젝은 빗대어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이해에 관해 이슬람에 있어서 공적인 영역이 사적인 부분까지 간섭하는 종교의 세속화를 감안하지 않는 판단에 비판적 입장입니다. 소위 좌파가 이런 입장을 계속 유지해 왔고 저 역시 이 부분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사실 이슬람의 이러한 측면도 기독교 근본주의와 매우 유사하며 일련의 성당 사제들의 소아들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문제를 예로 들며 바티칸이 이러한 현실에 눈감고 당시에 이를 은폐하기 급급한 진정한 이유도 병적인 현실에 비롯된 것이 아니라 로마 가톨릭 제도의 보존을 위해 소아성애가 필요했다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상당히 논란이 될만한 부분이지만 세계 가톨릭의 본산이라는 바티칸의 지위와 그로인한 기독교 근본주의적 시각에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근래에는 바티칸이 미국 시카고와 뉴욕 등지에서 벌어진 사제들의 이러한 문제에 차츰 공개적 입장을 밝히고 있는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꽤 용기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지젝은 교회가 이러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행위에 눈을 감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죠.

그리고 팔레스타인 지역에 나가 있는 현지의 이스라엘 군이 테러리스트로 의심되는 사람이 거주하고 있다고 여기는 가옥을 폐쇄하고 제거하는 상황에 여기에 투입되는 병사들의 개인적인 죄책감을 상쇄시키기 위해 가까운 가족들과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다소 동일시 하는 수단을 이용하고 있는 것에도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즉 제도가 뒷받침되는 이러한 일종의 교묘한 폭력에 일개 개인이 거부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종교와 문화의 상대적인 부분이라고 용인하는 부분이 현실을 더 극단으로 치닫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현재의 유럽이 이러한 이슬람 난민들의 유입과 더불어 이런 난민 진입에 반대하는 대중영합주의적 정치가 고개를 드는 상황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무차별 테러에 사심없이 비판하고 반대하며 최소한의 인권의 측면에서 여성과 아이들의 보호받을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 좌파들과 진보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억압받는 자들의 세계적 연대를 통해 단순히 종교라는 이유만으로 그 그늘에 도사리고 있는 폐해들에 눈을 감지 않고 비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글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꽤 얇은 분량의 글이지만 근래 논란이 되고 있는 유럽의 현상과 배경을 잘 설명하고 있는데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된 것들도 비교적 평이하고 이해가 빠른것도 글 전체적으로 긍정적인 부분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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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위기의 정치학 - 기로에 선 유럽, 경제의 위기인가 정치의 위기인가
울리히 벡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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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에서의 후기근대론 내지는 근대사회정치학으로 대표되는 울리히 벡의 짧은 3편의 에세이를 실은 ‘경제 위기의 정치학’을 읽었습니다. 울리히 벡은 앞서 설명한 후기근대론을 대표하는 3명 중의 한 사람인데요. 앤서니 기든스와 지그문트 바우만이 나머지를 차지합니다. 저는 학부시절 때 ‘성찰적 근대화’를 인상깊게 읽었는데요. 1999년경으로 기억되네요. 식민주의로 비롯된 유럽의 근대적 발전에 대한 아주 총체적인 반성과 해석으로 유명한 글로 기억납니다.

지금부터 소개해드릴 이 ‘경제 위기의 정치학’은 2013년 국내에 번역 출간되었는데요. EU통합의 역사에 대한 조홍식 숭실대학교 교수의 보론까지 들어가 있을정도로 독자들에게 보다 나은 이해를 제공하려는 출판사의 노력도 보입니다. 오늘날 사회학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울리히 벡이 2012년 그리스의 금융위기로 인한 당시 유럽사회에 비등했던 유럽 통합의 회의론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를 담고 있습니다. 주목할 점은 독일사회의 독일인들이 이 EU와 유럽 통합 과정 및 단일 화폐 유로화에 대한 입장 등을 벡의 글을 통해 접할 수 있었는데요. 메르켈 독일 총리에 대한 정치적 평가라든지 남부 유럽의 국가들을 포함한 EU를 이루는 국가들에 대한 정치 상황의 객관적 입장과 그 이해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벡이 평생을 걸쳐 연구한 사회학의 입장에서 독일의 입장과 주요 EU의 상황에 대한 설명과 해석은 남다른 부분이 있더군요.

그리스는 오랫동안 군부 독재 정치에 놓여 있었으나 EU에 가입하고 그 틀에서 경제적 번영을 누렸는데요. 많은 그리스는 자신들의 국가 경제 위기에 독일을 비롯한 주된 요구 즉, 강력한 긴축 재정에 대한 그리 정치권의 노골적인 불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국민들 자체는 EU의 탈퇴를 바라지 않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가치가 없이는, 그 문화적 유산과 품위를 잃어버린 유럽은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언급되는 것처럼 국민국가의 전통적 해석에만 몰두해서는 유럽 전체가 중요시하는 자유민주주의적 가치를 등한시하는 결과에 이를 수 있으며 그리스의 표면적 상황도 이러한 가치 위에서 양자가 노력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사실상 그동안의 유럽은 미국과 영국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의 탈을 쓴 자본주의를 복지라는 무기로 길들여왔으며, 여기에 유럽적 보편주의로 다수의 회원국들과 이해의 노력을 기울여왔다고 저자는 평가하고 있습니다. 2차대전 이후 사과와 배상을 거듭해 온 독일은 메르켈 총리 대에 이르러 독일 자신이 주체가 되어 남유럽을 비롯한 주변국들에게 저축과 긴축 재정을 잠정적으로 요구해왔지만 삶을 대하는 태도가 워낙 서로 상이하다보니 그동안 EU에서 독일이 프랑스와 더불어 노력해 온 과정이 녹록치 않았음을 알게 되더군요. 전후 주된 전범국가가 이런 지도국의 위치에 오른 것 만으로도 참으로 대단한 것인데요. 과거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독일의 노력이 오늘날 우파 포퓰리즘 정치가 창궐하고 있는 시점에서 머리를 드는 자국의 국수주의를 억제하고 전통적인 유럽의 민주주의적 가치가 위협받게 만드는 위기가 일견 그리스를 비롯한 경제 불안 요인이 부채질을 하긴 했으나, 벡의 평가대로 단순히 오늘날 유럽의 위기가 통화의 위기만이 아님은 확실합니다.

저의 짧은 예견대로라면 조만간 울리히 벡 교수가 유럽의 포퓰리즘 정치의 확산에 대한 글을 내놓지 않을까 기대해 보는데요.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대중의 이러한 정치적 변화를 분석하는 것이 학자 자신에게도 꽤 매력적인 일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렇게 오랜만에 접한 울리히 벡의 글이 꽤 현실적이어서 저는 나름대로 의미있게 느껴졌습니다. 사회학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이 일종의 객관화된 시각으로 사회를 분석하고 흐름을 연구하는데요. 지그문트 바우만 역시 참여하는 사회학이야말로 오늘날 너무나 요청되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글들이 더욱더 많이 출판되기를 개인적으로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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