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인간답게 - 글로벌 공공 윤리를 위해
프레드 달마이어 지음, 신충식.최인자 옮김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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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출신의 미국 철학자이자 정치 이론가인 프레드 달마이어 교수는 독일 뮌헨 대학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고 도미해 듀크 대학에서 다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수여 받은 정치학과 법학의 권위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특히 40여권이나 되는 논저를 쓰는 등의 연구 활동에도 매진하고 있는 학자이기도 한데요. 독일과 프랑스 등지에서도 큰 학문적 명성을 얻고 있기도 합니다. 지금 소개해 드릴 이 ‘인간을 인간답게’라는 책은 지난 2011년과 2012년의 특별 강연을 위해 경희대를 세차례 다녀가며 행한 세 번의 강연을 책으로 묶은 것으로, 여기에 마이클 센델과 관련 논문 한편을 포함하여 뒤이은 2014년에 정식 출간된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과거 경희대에서 강연한 슬라보예 지젝과 약간 오버랩 되기도 했는데요. 단연 경희대 후마니타스에서 꽤 흥미로운 기획을 하고 있다고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크게 이 책은 총 4장의 주제로 되어 있는데요. 좀 전에도 언급했듯이 1장과 2장 그리고 4장은 경희대에서의 강연을 묶은 것이고, 3장은 마이클 센델에 대한 달마이어 교수의 논문이라 볼 수 있습니다.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는 ‘오늘날 맞이하고 있는 인문학의 위기와 과거 자유방임주의를 거쳐 신자유주의 시기에 맞이하고 있는 개인의 실익추구와 영리활동에 어떤 사회 역사적 배경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러한 인식하에 부자들이 가난한자를 지배하는 오늘날의 구조적 문제에 대해 과연 민주주의가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저자인 달마이어 교수는 오늘날 전세계적인 인문학의 위기 내지는 쇠퇴에 대해 근대주의가 목표를 삼고 있는 경제적 이득과 쓸모의 문제에서 인문학 자체가 그것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핑계로 각 대학들의 학문적 목적이 급격하게 변화되어 왔고 여기에 반인본주의적 경향이 더해짐으로써 이 인문학이 설 곳을 잃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이런 근대를 떠받쳤던 “근대자유주의는 자유와 ‘자연권’을 중시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제국주의와 식민지배에 번번이 연루되었다”면서 저자는 그 이면을 이처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근대성에서의 인문학에 의한 투쟁은 있어 왔지만, 프랜시스 베이컨과 그 추종자들에 의해 전통적인 실천 방안이나 사상이 구태의연한 것으로 치부되고 그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끊임없었지만 자연과학이 점차 경제적 이익에 기여를 함으로써 인간 본연으로 회귀하자는 인문주의 자체가 거부되어 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자본주의 시대가 채 도래하지 않은 시점에 ‘도덕감정론’ 보다는 시장주의 경제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것으로 더 알려져 있는 애덤 스미스의 사례와 같이 전방위적으로 인간의 이익 추구와 그런 ‘자연상태’를 옹호하는 분위기가 날로 축적되어 왔습니다. 이런 내용의 1장 말미에 말마이어는 누스바움을 인용하면서 민주주의가 이러한 시대에 어느정도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부분을 강조하고 있는데요. 사실 3장의 센델과 관련된 논문에서 “민주주의는 완전한 평등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시민들이 공통된 삶을 함께 나눌 것을 요구한다”는 센델의 결론은 위에서 달마이어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완전히 부합된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 2장은 인간이 사회를 이루어 마땅히 추구해야 되는 ‘정치적 신체’에 대해 논의되고 있습니다. 홉스의 해석을 “끝없는 경쟁, 자신감 결여, 명예의 추구에서 보이는 욕망의 멈추지 않는 운동은 알려진 바대로 폭력적 충돌로 귀결”된다고 보면서 개인들의 의지가 모여 어떤 최고의 의지가 되었을 때, 이를 바탕으로 자연상태를 벗어나게 끔 되는 메커니즘을 홉스가 정치사회학적 고안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아주 단적으로 말하자면 ‘사회를 이루는 모든 인간들의 이익 추구 및 그와 관련된 광범위한 충돌’의 자연상태가 과연 모든 인간들에 이득이 될 수 있겠는가는 꽤 명백합니다. 권력의 사유화와 효과적인 자원을 가진 계층의 인간들조차 국가를 완전하게 해방시키기 보다는 ‘야경국가’라는 측면에서 일종의 자신들의 자원과 이득의 협소화를 감내해야하는 하위 계층의 불만을 맡으라고 한 것이 아닌가 충분히 오해할 만합니다. 그래서 법과 제도는 인간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이러한 토대를 반하게 되는 시도는 결국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이를테면 다윈의 진화론을 적극적인 사회적 도태론으로 결부시킨 스펜서주의자들과 그것의 추종자라고 봐도 무방한 전체주의의 촉발이 이와 같습니다.

사실 몽테스키외를 비롯한 실증주의적 법철학은 다소 인간들이 안락하고 편안한 생활을 누리기를 원하는 기본적인 욕구까지도 까칠하게 대응한 면이 있기도 했습니다. 인간이 이루는 모든 사회의 실증적인 증명과 그에 따른 결론 도출이 매번 합리적인 것은 아니며, 인간 이외의 좀더 초월적이고 고차원적인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 또한 어불성설이도 합니다. 따로 제러미 벤담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각 개개인들의 조화로운 공통이익을 위한 충분한 공감대가 있어야만 하고 그것이 역사의 진보일테지만 “국가 기관이나 민영기업의 무자비한 지배와 착취가 사회를 속박해 왔다”는 측면의 이해는 결코 부정할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달마이어 교수가 3장에서 요점으로 밝히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가장 명백한 결점은 균형의 완벽한 부제다”라는 인식이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모든 시민들이 충분히 받아들일만한 권력에 대한 공감대는 공공선을 바탕으로 이것을 무시하지 않는 그런 권력일텐데, 개인의 최대 자유를 경제적 이익 추구에 방점을 두고 있는 과거의 자유주의와 오늘날의 신자유주의가 과연 이러한 공동선을 갖고 있느냐에 대해선 모두들 회의적인 평가를 내릴 수 밖에 없겠죠.

결국 오늘날의 시장의 도덕적 한계는 매우 명확하고 이를 공공선과 공동의 이익이라는 측면의 가치 재조명에 우리 시민들이 충분하게 인식하고 공감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를 시장 자유주의의의 시녀로 만들어 버린 신자유주의자들의 왜곡에 당연히 반대 의견을 피력해야 하며, 센델이 주장했던 것과 같이 ‘경제적 치유’에 어떠한 현실적 방안이 있을지 좀 더 고민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서평에서 저는 몇번이나 언급한대로, 지그문트 바우만이 우리모두가 무덤으로 같이 들어가지 않기 위해 여기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있어야 된다고 여겨집니다. 프레드 달마이어 교수 역시 이 책을 통해 인간성의 회복, 민주주의의 역할론, 근대를 만든 여타 자유주의적 배타성에 대해 진지하게 사회철학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실생활과 이론적 실천방안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는 실로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서구와 비서구를 가리지 않고 오늘날 인문학은 과학 기술 발전을 우선시하는 이른바 ‘근대화’ 세력에 의해 직면해 수세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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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하거나 통제되거나 - 소셜 시대를 살아가는 10가지 생존법칙
더글러스 러시코프 지음, 김상현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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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턴과 캘리포니아 예술학교를 거쳐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미국 내에서 미디어 이론가, 작가, 칼럼니스트, 그래픽 소설가 및 다큐멘터리 제작자로 알려져 있는 더글러스 러시코프는 특히 인터넷과 미디어와 관련된 글을 여러 매체에 기고하며 특별한 관심을 표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 연장선상에 있는 책이 바로 이 ‘통제하거나 통제되거나’일 것입니다. 원제 ‘Program or Be Programmed’ 로 지난 2010년 출간된 이 책은 국내에 2011년 소개된 바가 있습니다. 현재는 절판된 상태라 시중에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점을 참고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자인 러시코프는 자신의 이 책과 관련해 이러한 글을 쓰게 된 연유로 현재 우리의 특별한 인터넷 미디어 시대에 10가지 편향성이 존재하며, 물론 이것이 전혀 개선 내지는 변화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결말에서 짧게 밝히고 있는데요. 즉, 초기 폐쇄된 특정 기능의 웹기반에서 현재 세계에 있는 모두가 자유롭고 제한없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인터넷 세계에서 앞으로 좀 더 모두에게 상생하고 이득이 될 수 있도록 어떤 방향성을 잡아야 하는지에 대한 일종의 나레이션적 성격의 글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글은 전체적으로 꽤 이해하기 쉬운 주장들로 채워져 있고, 번역 또한 나쁘지 않았습니다. 간혹 이해하기 힘든 용어에 대해서는 지면에 따로 공간을 만들어 설명을 하고 있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다만 읽는 분들에 따라 가독성에 영향이 있을 수도 있으니 그 점 참고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과거 계몽주의적 혁명에 입각해 우리가 주권 개념을 받아들인 시점 부터 인간은 늘 선택의 문제에 고민해 왔습니다. 온전히 자기 자신만의 삶을 결정하기 위한 선택의 문제 뿐만 아니라 나를 포함한 모두가 정당한 권리와 안전한 사회를 바탕으로 이를 규정하는 정치와 국가를 만드는 데 이런 무수한 선택들이 기반이 되어 왔는데요. 러시코프 역시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인터넷 미디어 시대에 지식 및 토론과 결부지어 한가지 주제를 던지고 있습니다. 즉, “디지털 시대의 자유란 어떻게 그리고 누구와 당신의 생각을 나눌지 선택하는 자유”라고 강조하며, 이것을 중점적으로 보존할 수 있는 방법론들에 대해 이 책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지금과 달리 과거에는 소위 지식 소유의 한정성이라는 기준에서 일부 대학과 전문가들이 특정 지식들을 포함한 거의 대부분의 지식을 독점해 왔으나, 현재는 “민주적인 정보의 접근성과 더불어 전문가들의 정보 독점이 약화된 특별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과거 엘리트들을 포함한 기득권을 쥐고 있던 계층들이 절대 다수의 무지한 대중들에 대한 근거없는 공포를 여러 차원에서 무력화시키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인식해야 하는 중요한 한 가지는 우리 스스로 이런 오픈된 세계와 공유하는 수단들을 가지고 이를 악용하지 않고 스스로 편향되지 않게 하는 자정 능력을 보유할 수 있겠는가가 앞으로 사활적인 모험이 되겠습니다.

또한 위의 관점 외에도 인터넷 미디어 전반이 민영화되어 벌어지는 양면성과 수많은 개인들의 정보를 갖고 이득을 취하는 기업들에 대해 과연 우리가 어떠한 일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인터넷 기업들의 휘발성을 밝히면서도 우리의 이웃들과 친구들을 통해 이익을 취하는 것에 ‘공유의 정신’과 오픈 소스라는 자산에서 벌어지는 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이 책은 꽤 진지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7장에서 세계의 친구들을 통해 이득을 얻으려 하지 말라는 소주제는 “소셜 네트워킹 사이트가 그 정책들을 계속해서 바꾸는 데에 사람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사실 프라이버시 침해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우정을 돈으로 바꾸려는 기업의 속셈 때문이다”라고 그 이면성을 꼬집고 있습니다. 아마도 오픈된 공간 내에서 세계인 모두가 구축한 이 인터넷 시스템하에 과연 민영 기업이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이유가 되는가에 우리는 좀 더 집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마이크로소프트가 정부로부터 리눅스를 배제시키기 위해 암호화 작업과 관련된 견제를 해왔던 것은 꽤 의미심장하기도 합니다.

“대충 매체와 디지털 미디어 사이의 근본적 차이는 쌍방향성이다”는 주제와 관련해서도 기존의 대중 매체의 소비자들은 일방향적인 측면이 강했던 반면에 오늘날 디지털 미디어의 소비층은 활발한 의견교환과 더불어 적극적인 소비형태를 띄게 되었습니다. 물론 9장과 관련된 논의에서 “적극적으로 공유하되 도둑질하지는 말아라”는 일침은 적극적인 디지털 시대에서 활발한 저작 활동에 대한 중요한 전제를 표명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다수의 개인정보와 활동을 통해 이익을 얻는 기업들에 대해 저자는 부정적인 입장이면서도 개인이 활발하게 디지털 문화적 생산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찬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정당한 저작권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앞선 인식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6장에서는 약간 논란이 될 만한 주제로 글을 쓰고 있는데요. 인터넷 익명성과 관련하여 저자 자신의 경험을 소개하면서 정부가 개인을 검열하고 자료를 수집하는 것보다 다수의 익명이 자신이 쓴 글을 가지고 정보를 수집해 무고한 피해자를 낳게 되었다는 일례입니다. 자신의 이름과 주소를 잘못 수집해 본인이 아닌 타인이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었는데요. 이것을 개선시키기 위해 무분별한 익명 상태를 벗어나 “우리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는 것을 표준으로 삼는 것이다”라고 저자는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책임지지 못할 말은 디지털 영역에 올리지 말라고 하는 것도 익명에서 숨어 되도않는 말을 옮기는 것보다 자신의 신분과 입장을 밝히고 사실만을 인용하고 주장하라는 것인데, 쓸모있는 여론과 쓸모없는 여론의 진위여부를 가리는 것은 여론 자체의 신빙성을 물고 늘어지는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만 무엇보다도 현실의 법이나 규범이 들어오기 전에 우리 모두가 스스로 자정능력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넷 상에서의 여론과 시민들이 갖는 의견이 어떤 측면에서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선동이나 기만이라는 것만 놓고 인터넷 여론이 기여한 민주주의에 대해 과도한 자기검열을 놓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거짓에 근거한 타인에 대한 인신공격은 제한되어야 하지만 익명이 필요한 곳이 있고, 자신의 말을 책임을 질 정도로 사실에 기반한 넷 윤리가 무엇보다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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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로서의 디자인
토니 프라이 지음, 송기철 옮김 / 안그라픽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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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영국 버밍엄 대학 출신으로 현재 호주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디자인 이론가인 토니 프라이는 특히 카를 슈미트와 조르조 아감벤에 대한 연구로도 유명한 학자입니다. 더불어 정치철학과 관련된 주제들로 활발한 저작 활동을 그동안 지속해왔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에는 이 책이 아마도 처음 소개되는 논저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 글은 지난 2010년에 ‘Design as Politics’ 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4년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우선 본격적으로 책에 대한 논의에 앞서 아쉬운 두 가지 점을 밝히고 싶습니다. 본문 75페이지의 오탈자와 함께 심각한 문제는 가편집도 제대로 하지 않은 듯한 삐뚤삐뚤한 문장 줄넘김입니다. 이렇게 의미있는 번역본을 이렇게 성의없이 편집한 것은 인력의 문제, 시간의 부족을 떠나서 정말 비판받아야 하는 점이라 생각합니다.

저자인 토니 프라이는 “현재의 시장 자본주의의 사실상 종속 상태인 (서구) 민주주의가 앞으로 인류의 지속 가능성을 제한하고 있으며, 이 점은 명백하게 반미래화로 귀결된다”는 큰 틀에서의 주제 의식을 밝히고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주장을 기본으로 이것의 합리적 당위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현시대의 현상으로서의 근거와 이론적 대응을 결합시켜 꽤 설득적인 논의 글을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우선 개인적으로도 이러한 시장 자본주의에 예속된 현재의 민주주의적 병리적 상황에 매우 공감하고, 우리의 근대가 기술 만능주의에 휩싸여 전개되어 왔다는 것에도 동의합니다. 물론 이 뿐만 아니라 2부의 카를 슈미트 현상을 비판적으로 인식한 논의 만으로도 충분히 일독해 볼만하다 여겨졌습니다. 특히 근래 번역된 슈미트의 유명한 논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의 대한 이해를 돕는데 중요한 해석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부문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독서였습니다.

과거 냉전시기 전후로 급격한 세계화에 따른 소비 자본주의화가 초래한 문제에 대해서는 익히 이해하고 계실겁니다. 많은 민주주의 이론가들이 제가 앞서 소개해드린 바와 같이 ‘민주주의가 시장 자본주의에 종속된 형태로서 정치 (민주주의)가 자본주의 (시장 자유주의)를 보조하는 구조적 결합으로 강화’ 되었다는 것이 오늘 광범위한 세계적 문제의 본질입니다. 이 책에서 토니 프라이가 논하는 대로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는 어떻게 보면 지엽적인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기술 만능에 따른 광범위한 자연파괴적 대량 생산에 따른 환경 파괴 문제와 세계화의 사실상 본질이라고 볼 수 있는 선진국의 환경 오염 배출 산업을 제3세계에 이전하는 즉, ‘미녀로 야수를 포장하는’ 교묘한 행태 등을 전방위적으로 저자는 비판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이러한 문제들의 해결책을 국제사회에서의 의결과 같은 모든 것을 포함한 더 많은 민주주의의 확대로 인식해 왔는데요. 저자인 프라이는 그러기에 앞서 먼저 현재의 민주주의를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과거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창했던 실질적 민주주의가 오늘날 우리의 민주주의에는 없으며, 사실상 일종의 대의 민주주의로 귀결되는 민주 정치에 ‘실질적 민주화’가 결여되어 있다고 해석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2부에서 본격적으로 논의하는 카를 슈미트 비판과 연계되어 있는데요. 먼저 카를 슈미트는 ‘적과 우리’라는 대결구도를 통해 정치 및 자유를 해석함으로써 그 유명한 결단주의와 함께 정치 자체를 획일화 시킨 책임이 있습니다. 또한 주권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도 “주권은 법률의 명령 안팎에서 동시에 기능하기 때문에 주권의 역설이 존재”한다고 그는 첨언하면서 사실상 슈미트는 정치적 이상주의를 불신하고 첨예한 현실주의 및 현실정치를 비판하기 힘들게 만든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는 혐의를 벗어나기 힘듭니다. 여기에는 “법의 등장 (성립) 은 (어떤 식으로 정의하든) 인간이라는 존재의 다루기 힘들고 지배할 수 없는 본성에 대한 대응”이라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날것’을 가차없이 평가함으로써 그가 우파 뿐만 아니라 좌파에게까지 영향을 끼친 이면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만, 슈미트 역시 존 듀이와 마찬가지로 (주된 대상이 하급 계층이라는) 오락거리의 범람이 앞으로의 정치 토대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분석했고, 일원화되지 않는 개인주의 총합의 ‘다원주의’ (물론 저는 이러한 분석을 모두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정치가 과연 민주주의에 있어서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과 함께 독특한 통찰을 엿볼 수 있습니다. 즉, 동일성의 정치라는 것이 우리가 스스로 소멸시킨 ‘공공성의 가치’ 내지는 ‘공익의 목적’이라는 가치로 귀결되어야 함에도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많은 이론가들에 의해 ‘자유를 건드리는’ 모든 것들을 배척하게 만들었고, 프라이는 이것을 한술 더 떠서 ‘자유 마저도 제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약간의 첨언이라면, 프라이가 인용한 라클라우와 무페가 주장한 바대로 “수행적이고 다원주의적인 ‘자유민주적’인 사회들의 객관화된 권력구조와 실상은 헤게모니적이며 따라서 전체화한다고 결론지었다.”라고 밝힙니다. 여기에 카를 슈미트가 ‘대의 정치’에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것도 그가 왜 요즘 각광을 받고 있는 이유라 생각됩니다.

결론과 더불어 프라이는 앞선 비판적 인식을 토대로 우리 세계가 ‘지속불가능한 상태’에 놓여 있고, 이 부분을 우리는 정확히 직시해야 하며, 주권과 자유의 재인식을 통해 새롭게 세계관들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저는 저자의 주장 끝에는 ‘다소나마 독재의 그것이라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로 도출되는 불길한 인상을 받았습니다만 물론 근본적인 독재 정치를 지긋이 가리킨 것은 아닐겁니다. 이미 이 책 1부에서 권위주의화 된 민주주의에 대한 일침을 한 것으로 저의 의심은 터무니없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개인적으로 마지막 소감은 하이데거와 슈미트의 비판과 더불어 받아들일만한 근거들을 보여주는 것에 이해를 하면서도 뭔가 뒤끝이 씁쓸했고, 이미 그도 이라크 전쟁 상황에서 잡힌 포로들을 고문한 등의 그 ‘예외상태’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던 점이 명백한 것으로 꽤 괌범위한 그의 논거를 의심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그래서 글 도입에서 말한 민주주의 국가들이 국익을 신봉하게 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대놓고 비판하는 것은 충분히 그 의도를 인정할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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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 국가의 본질에 대한 역사적 고찰
카야노 도시히토 지음, 김은주 옮김 / 산눈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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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의 저자 카야노 도시히토는 일본 와세다 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프랑스를 거쳐 현재 일본 고다이라시의 쓰다주쿠(다른말로 즈다쥬크) 대학의 국제관계학과 준교수로 재직하면서 국가와 권력, 정치철학과 관련된 연구를 지속하고 있는 학자입니다. 특히 폭력론과 관련하여 아렌트, 아감벤, 슈미트 등에 지속적인 학문적 관심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일본내에서 신예 철학자로 불리우며 대학 외에 활발한 강연과 기고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국내에도 그의 책이 번역되어 있는데요. 다만, 안타깝게도 지금 소개해 드릴 이 책은 현재 절판된 상태입니다. 도시히토의 이 논저는 2005년 일본에서 처음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0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다행히도 ‘국가의 본질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라는 부제로서 대충 이 글의 내용을 짐작하게 합니다. 국가론에 대한 개념이 분명 역사적으로 고찰해봐야 하는 측면이 있습니다만 저자는 단순히 역사적 수단의 해석보다는 국가를 해석할 수 있는 중요한 사상가들의 주장과 이론을 도입하고 이를 재해석하는 형태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다만, 인용된 구절이나 문단을 다른 서체로 구별하는 식으로 글이 구성되어 있는데요. 이 점은 독해의 과정에서 분명 호불호가 있을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전체적으로는 번역도 나무랄데 없고, 밝히고자 하는 주장도 꽤 명확하다고 볼 수 있고 상당히 균형잡힌 글이라 봐도 무방해보입니다.

우선 1장과 2장, 3장은 권력과 폭력과의 관계 그리고 이러한 이론의 확장으로 국가가 자신의 폭력 기반을 위한 부를 창출 및 사유화의 개념을 확장시켜 살펴보고, 4장에선 국가가 허구에 기반한다는 알튀세르 주장에 대한 잠정적 비판, 그리고 약간의 재해석과 다음 장인 5장에서 주권을 고찰해보고 6장에서는 국민국가의 형성에 이런저런 영향을 끼친 민족과 민족주의 개념과 7장에서는 현대의 국민 국가가 ‘공리적 이념’의 기로에 서 있는 자본주의 상황을 마지막으로 글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저자인 카야노 도시히토는 글의 도입에서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게 된 연유에 대해서 “그 폭력이 사회 내에서 가장 강력해야 한다”는 이해를 바탕으로 국가가 가지는 폭력의 정당성 기반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국가가 폭력을 소유하는 것이 오로지 도덕적이고 사회적 정당성에 기인한다고 보는 것보다 사회내의 ‘사적 폭력’을 지양시키고 홉스를 재해석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단순히 그의 자연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아마도 3장에서 서술하고 있는 ‘인간의 악의 측면성’을 제어하기 위해 국가는 필연적으로 요구 되었으며, 그것이 여타 홉스나 스피노자 등의 주권 개념에 비롯되었다기 보다는 원천적으로 인간의 불확실성 자체에 요인이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일찍이 한나 아렌트는 앞의 권력과 폭력의 관계에서 이 두 가지 단어는 아주 면밀하게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홉스의 인식대로 폭력이 권력적인 측면의 인식을 포함해야 한다는 말을 우리가 긍정한다면 국가가 어떤식으로 폭력을 수단화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많은 철학 특히 정치철학의 근본적인 탐구 과제일 수도 있습니다.

앞의 사적 폭력을 지양시키는 국가의 행위에 대해 “국가가 다른 주체들에 대해 폭력의 행사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결코 정의를 목표로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라고 독특하게 구분하는 점은 결국 국가 자체가 강대한 폭력을 기반으로 한 당위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국가가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폭력에 대해 도덕적인 정당성을 부여시키기 위한 작업을 기울여 왔는데요. 카야노 도시히토는 이것과는 다른 주장을 곁들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 역사적으로 보면 국가의 폭력 자체가 부정한 것이며, 그 주도권이 실추되는 사건은 늘 발생해 왔다”는 해석입니다. 오늘날의 국가가 사회 구성원들의 안전 보장과 경제 활동을 보호하기 위한 당위성의 문제는 저자가 도출하는 결정적인 역사적 결과인 “국민의 개념은 사회의 산업화 내지는 산업시대에 출현에서 찾아 볼 수 있다”고 밝힙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 3장의 부의 사유화로 인한 국가의 세금 징수는 폭력을 수단화 할 수 있는 금전적 뒷받침이 되었고, 사회의 각 개인들이 발생한 부를 사적 소유하고자 하는 원리에 크게 부합했던 것이 바로 국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이러한 폭력의 광범위한 국가 소유의 원칙은 ‘공리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야 됩니다. 아렌트와 푸코는 권력과 폭력의 구별을 첨예하게 연구한 사상이기도 한데요. 단순히 피아의 개념으로 정치와 국가를 해석한 카를 슈미트에 국한되지 않고 더군다나 배외의 개념과 배외주의를 찾아보고 있는 조르주 아감벤과는 달리 국가 폭력이 다른 불법적인 사적 폭력들과 어떻게 다른지 그 점을 권력의 유무에서 찾았던 것으로 우리는 양자를 명백히 구별해야 할 것입니다. 앞선 아감벤이 탐구했던 국가에서의 배외 개념과 관련해 이 책에서는 한가지 해답을 내놓고 있습니다. 아마도 국민 국가주의의 형성에서 민족과 인종의 개념이 어떤 영감을 주었고, 현재 유럽의 이민자 상황을 바라보는 인식과 유사한 ‘국민=민족’ 이라는 개념이 파생한 위험성은 지극히 이해 가능합니다. 이 부분에서 아쉬운 점은 우리가 베스트팔렌 체제 이후 국민국가 담론의 인식에서 얼마간 나아가지 못하고 또한 전지구적 종교적, 인종적 문제가 정말 극복되거나 우리의 관용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인 것인지는 앞으로도 많은 연구가 필요해 보입니다.

이러한 인식의 결론으로 홉스와 스피노자를 통해 해석된 주권이라는 개념이 인간을 위한 국민국가의 가능성을 낳았고, 그 이전인 봉건주의 시대에 소수의 이익을 위한 국가 폭력의 무분별성을 이른바 상위 개념으로 인식되는 국민과 민족이라는 틀로 국가의 권력을 아우르는 문제들을 겨우 해석 가능한 단계까지 끌어 올릴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짐작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주권은 본디 “지상의 초월적인 권력”으로서의 인식을 불식시키게 만드는 아렌트의 “권력의 목적을 넘어서서 폭력이 홀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 이 조직화 된 집단적 폭력 자체가 폭주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항상 귀담아 둘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더불어 국가의 자본주의화에 따른 사회 전반의 공리적 가치의 쇠퇴에 대해서도 경계심과 사회 구성원들의 보다 깊은 관심이 필요하지 않나 고민해 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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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경제적 결과 부글 클래식 boogle Classics
존 메이너드 케인스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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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존 메이너드 케인스라는 이름은 경제학의 대부라 불리우는 애덤 스미스처럼 잘 알려져 있습니다. ‘케인지언’, ‘케인스주의자’등으로 수식되는 의미조차 아주 명확합니다. 그는 켐브릿지에서 수학한 이후 경제학자로 활동하며,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파리평화조약에 관여하고, 이후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영국 재무성 관리로 재직하고 전후 유럽 부흥과 1944년 브레튼우즈 체제를 만드는데, 공헌을 한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이 책은 그가 1919년 영국 재무성의 공식 대표로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졌으며, 거의 2개월에 걸쳐 완성한 글로 원제는 ‘The Economic Consequences of The Peace”로 국내에는 2016년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정식 판권으로 소개되기 이 전에 80년대에 ‘평화의 경제적 귀결’이라는 제목으로 일본판을 번역한 판본이 헌책방에 돌아다녔던 것이 문득 생각이 납니다. 이 부분은 그냥 참고로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선 책을 다 일독하고 나서 드는 생각은 제목이 아주 의미심장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평화의 경제적 결과’가 파리 평화 회의 에서 전혀 고려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의미하는 바가 역설적이지 않나 추측해 보기도 합니다. 바로 케인스는 그런 관점에서 1차대전의 종전 이후 ‘파리 평화 회의’를 다음 두 가지 관점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파리 평화 회의 자체가 파괴적 측면을 갖고 있었으며, 두번째, 우드로 윌슨과 로이드 조지, 조르주 클레망소 등 협상국의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경제적 측면의 고려를 결여한 협상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 두번째 비판과 관련해 ‘현실성’을 결여한 채 이상주의적이고 도덕적인 문제에 집착한 우드로 윌슨, 독일을 두 번 다시 프랑스 앞에 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조르주 클레망소, 선거를 앞두고 마찬가지로 독일의 굴복을 기대했던 로이드 조지의 이런 불편한 하모니가 사실상 ‘독일의 징벌적 배상’을 강요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위의 측면의 정당성 문제와 관련해 케인스는 “독일이 사실상 무조건 항복을 한 것이 아니라 평화 조약 협상에 참여를 요청하고”, “그 이전에 미국 윌슨 대통령과 전후 처리에 대한 협의를 진행한 것으로 봤을 때, 이것이 과연 합당한 결과인가”에 대해 되묻고 있습니다. 더욱이 조르주 클레망소가 주장한 “독일을 포함한 중부 유럽을 1870년(보불전쟁) 이전으로 돌리자”는 주장에 케인스는 전혀 동의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프랑스에게는 독일 황제가 보불전쟁 이 후, 베르사유 궁전에서 대관식을 한 사건에 이르는 과정을 대단히 굴욕적으로 여기고, 카이저에 대한 전쟁 책임을 영국과 프랑스에서 요구한 것은 이에 기반한 것으로 보입니다.

독일은 1914년 이후로 유럽 전체에서 중요한 산업국으로 도약하게 됩니다. 알자스-로렌과 자르, 슈레스비히의 석탄 및 철광성의 자원으로 헤외에서 원료를 수입해 가공한 제품을 영국과 프랑스에 수출하는 등 이러한 산업 기반이 유럽 전체에 경제적으로 기여한 측면을 살펴보는 등 뒤이어 ‘4장 : 배상’ 에서 “본래 배상금이 정해지고 나면 지급하는 수단은 그 국가의 자유에 맡기던 것이, 파리 평화 조약의 경우 배상금을 받을 국가들이 금액을 정할 뿐만 아니라 배상금으로 내놓을 재산의 종류까지 명시한 것은 거의 최초라고 언급됩니다. 이러한 인식은 과거 카르타고식 평화로, 제2차 포에니 전쟁 후 로마가 카르타고에 강요한 평화조약에서 적을 잔인할 만큼 철저히 분쇄함으로써 유지하는 평화에 기인하는데, 결국 역사의 가정은 없다지만 독일 내부에서 전체주의가 자생하여 확산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다만 케인스는 이러한 가혹하고 기준없는 독일에 대한 ‘징벌적 배상’이 독일 지역에서 혁명의 기운을 낳게 할 수도 우려했으나, 우리가 아는 바대로 아돌프 히틀러라는 시대의 악을 잉태했습니다. 또한 그는 케인스의 이 책을 통해 히틀러가 면밀히 연구하고 전후 사상적 인식에 도움을 받은 것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이 출간된 6개월 이후 전세계적으로 반향을 일으킨 점이 무엇을 말하는지 예측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독일이 치뤄야 할 배상과 관련해서 케인스는 앞선 알자르-로렌과 자르, 슐레스비히에 대한 할양을 차치하더라도 대전 이 전의 연합국과 각 식민지에 존재했던 독일의 이권이 무상으로 몰수되고 이것이 배상액에 포함되지 않는 상황은 이해되기 힘든 행위라 여기고 있습니다. 독일 국내에 필요한 석탄 1억톤 가운데 프랑스와 벨기에 및 다른 주변국에 2000톤 이상 무상(배상금과 상관없이)으로 보내야 한다는 점과 보유한 선박들을(대체로 상선들) 마찬가지로 영국 등에 보내야 한다는 점, 벨기에와 같은 경우는 취약한 동부 국경지대의 피해 이상의 배상금을 따내고 바로 이것을 대전 도중 영국으로부터 받은 현물지원 및 차관으로 대체하는 등의 배상의 이차적인 측면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위의 할양할 지역의 독일 민간인 재산의 몰수와 관련해서 아무런 법적, 도덕적 근거가 없이 무상 몰수가 이뤄진다는 부분은 또한 배상금 안에 포함되지도 않는다는 측면에서 매우 가혹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해봤습니다. 저자인 케인스는 최소한 독일 경제가 배상금을 갚을 수 있을 만큼 산업 기반의 재가동이 필요한데, 이것을 원천적으로 제한하게 하는 이런 배상금 문제는 “독일 국민이 커피나 담배와 같은 기호품까지 끊어야 겨우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언급합니다. 기본적으로 독일이 1913년 이전 만큼 국내 경제가 유지되는 것이 영국과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 경제에 도움이 되는 것이며, 반대로 과도한 배상에 따른 국내 시장을 초토화시키는 결과가 과연 누구에게 도움이 될 것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잠정적으로 독일은 프랑스에 배상할 전체 330억 달러에서 210억달러에 이르는 배상금을 납부했지만, 1920년부터 세계 대공황이 터지는 1929년 이후까지 대부분의 독일 국민을 경제적 고통에 처하게 만들어 나치즘이 활개치는 근본 원인이라 여겨도 무방합니다. 즉, 5장 : 평화조약 이후의 유럽에서 무역 저조로 인한 인플레이션의 확대가 유럽 경제의 위기로 대두할 가능성으로 케인스는 예견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또한 전쟁 배상금을 받지 못할 경우 장기적인 경제 침체에 빠질 것으로 예상하고 세르비아를 비롯한 낙후된 동부 유럽도 더 안좋은 상황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와 함께 “이 책에서 나는 러시아와 헝가리, 오스트리아에는 별로 주의를 주지 않았다. 그곳은 삶의 비참함과 사회 붕괴가 너무나 심각하기 때문에 별도의 분석조차 필요하지 않다”며 전쟁 이후 외적으로 발생한 유럽의 상황이 가늠하기 힘들정도로 좋지 않았던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이 평화조약에 따라 독일에 강요된 배상과 비슷한 예는 인류 역사에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는 케인스의 결론으로 설명되는 이 문장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한 전쟁 책임이 여러 측면에서 고려되지 않고 오로지 정치적 수단에 의해서만 계산된 것은 또 한번 대전을 치루고 수많은 인명 살상을 겪게 되는 비극적 원인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예상해봅니다. 여기에 어쩌면 1910년대 불기 시작한 계몽적 낭만주의가 정치의 불확실성을 간과하게 만든 요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비판적 견해에도 불구하고 1차 세계 대전의 종전 분위기와 당시 유럽의 모습을 담고 있는 글을 쉽게 찾기 힘든 출판계에서 케인스의 이 글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한 협상의 이면과 정치적 문제 등을 비판적 인식으로 쓰고 있는 저자의 태도도 꽤 교훈으로 삼을만하다고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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