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인간답게 - 글로벌 공공 윤리를 위해
프레드 달마이어 지음, 신충식.최인자 옮김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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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출신의 미국 철학자이자 정치 이론가인 프레드 달마이어 교수는 독일 뮌헨 대학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고 도미해 듀크 대학에서 다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수여 받은 정치학과 법학의 권위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특히 40여권이나 되는 논저를 쓰는 등의 연구 활동에도 매진하고 있는 학자이기도 한데요. 독일과 프랑스 등지에서도 큰 학문적 명성을 얻고 있기도 합니다. 지금 소개해 드릴 이 ‘인간을 인간답게’라는 책은 지난 2011년과 2012년의 특별 강연을 위해 경희대를 세차례 다녀가며 행한 세 번의 강연을 책으로 묶은 것으로, 여기에 마이클 센델과 관련 논문 한편을 포함하여 뒤이은 2014년에 정식 출간된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과거 경희대에서 강연한 슬라보예 지젝과 약간 오버랩 되기도 했는데요. 단연 경희대 후마니타스에서 꽤 흥미로운 기획을 하고 있다고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크게 이 책은 총 4장의 주제로 되어 있는데요. 좀 전에도 언급했듯이 1장과 2장 그리고 4장은 경희대에서의 강연을 묶은 것이고, 3장은 마이클 센델에 대한 달마이어 교수의 논문이라 볼 수 있습니다.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는 ‘오늘날 맞이하고 있는 인문학의 위기와 과거 자유방임주의를 거쳐 신자유주의 시기에 맞이하고 있는 개인의 실익추구와 영리활동에 어떤 사회 역사적 배경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러한 인식하에 부자들이 가난한자를 지배하는 오늘날의 구조적 문제에 대해 과연 민주주의가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저자인 달마이어 교수는 오늘날 전세계적인 인문학의 위기 내지는 쇠퇴에 대해 근대주의가 목표를 삼고 있는 경제적 이득과 쓸모의 문제에서 인문학 자체가 그것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핑계로 각 대학들의 학문적 목적이 급격하게 변화되어 왔고 여기에 반인본주의적 경향이 더해짐으로써 이 인문학이 설 곳을 잃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이런 근대를 떠받쳤던 “근대자유주의는 자유와 ‘자연권’을 중시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제국주의와 식민지배에 번번이 연루되었다”면서 저자는 그 이면을 이처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근대성에서의 인문학에 의한 투쟁은 있어 왔지만, 프랜시스 베이컨과 그 추종자들에 의해 전통적인 실천 방안이나 사상이 구태의연한 것으로 치부되고 그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끊임없었지만 자연과학이 점차 경제적 이익에 기여를 함으로써 인간 본연으로 회귀하자는 인문주의 자체가 거부되어 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자본주의 시대가 채 도래하지 않은 시점에 ‘도덕감정론’ 보다는 시장주의 경제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것으로 더 알려져 있는 애덤 스미스의 사례와 같이 전방위적으로 인간의 이익 추구와 그런 ‘자연상태’를 옹호하는 분위기가 날로 축적되어 왔습니다. 이런 내용의 1장 말미에 말마이어는 누스바움을 인용하면서 민주주의가 이러한 시대에 어느정도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부분을 강조하고 있는데요. 사실 3장의 센델과 관련된 논문에서 “민주주의는 완전한 평등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시민들이 공통된 삶을 함께 나눌 것을 요구한다”는 센델의 결론은 위에서 달마이어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완전히 부합된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 2장은 인간이 사회를 이루어 마땅히 추구해야 되는 ‘정치적 신체’에 대해 논의되고 있습니다. 홉스의 해석을 “끝없는 경쟁, 자신감 결여, 명예의 추구에서 보이는 욕망의 멈추지 않는 운동은 알려진 바대로 폭력적 충돌로 귀결”된다고 보면서 개인들의 의지가 모여 어떤 최고의 의지가 되었을 때, 이를 바탕으로 자연상태를 벗어나게 끔 되는 메커니즘을 홉스가 정치사회학적 고안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아주 단적으로 말하자면 ‘사회를 이루는 모든 인간들의 이익 추구 및 그와 관련된 광범위한 충돌’의 자연상태가 과연 모든 인간들에 이득이 될 수 있겠는가는 꽤 명백합니다. 권력의 사유화와 효과적인 자원을 가진 계층의 인간들조차 국가를 완전하게 해방시키기 보다는 ‘야경국가’라는 측면에서 일종의 자신들의 자원과 이득의 협소화를 감내해야하는 하위 계층의 불만을 맡으라고 한 것이 아닌가 충분히 오해할 만합니다. 그래서 법과 제도는 인간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이러한 토대를 반하게 되는 시도는 결국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이를테면 다윈의 진화론을 적극적인 사회적 도태론으로 결부시킨 스펜서주의자들과 그것의 추종자라고 봐도 무방한 전체주의의 촉발이 이와 같습니다.

사실 몽테스키외를 비롯한 실증주의적 법철학은 다소 인간들이 안락하고 편안한 생활을 누리기를 원하는 기본적인 욕구까지도 까칠하게 대응한 면이 있기도 했습니다. 인간이 이루는 모든 사회의 실증적인 증명과 그에 따른 결론 도출이 매번 합리적인 것은 아니며, 인간 이외의 좀더 초월적이고 고차원적인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 또한 어불성설이도 합니다. 따로 제러미 벤담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각 개개인들의 조화로운 공통이익을 위한 충분한 공감대가 있어야만 하고 그것이 역사의 진보일테지만 “국가 기관이나 민영기업의 무자비한 지배와 착취가 사회를 속박해 왔다”는 측면의 이해는 결코 부정할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달마이어 교수가 3장에서 요점으로 밝히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가장 명백한 결점은 균형의 완벽한 부제다”라는 인식이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모든 시민들이 충분히 받아들일만한 권력에 대한 공감대는 공공선을 바탕으로 이것을 무시하지 않는 그런 권력일텐데, 개인의 최대 자유를 경제적 이익 추구에 방점을 두고 있는 과거의 자유주의와 오늘날의 신자유주의가 과연 이러한 공동선을 갖고 있느냐에 대해선 모두들 회의적인 평가를 내릴 수 밖에 없겠죠.

결국 오늘날의 시장의 도덕적 한계는 매우 명확하고 이를 공공선과 공동의 이익이라는 측면의 가치 재조명에 우리 시민들이 충분하게 인식하고 공감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를 시장 자유주의의의 시녀로 만들어 버린 신자유주의자들의 왜곡에 당연히 반대 의견을 피력해야 하며, 센델이 주장했던 것과 같이 ‘경제적 치유’에 어떠한 현실적 방안이 있을지 좀 더 고민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서평에서 저는 몇번이나 언급한대로, 지그문트 바우만이 우리모두가 무덤으로 같이 들어가지 않기 위해 여기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있어야 된다고 여겨집니다. 프레드 달마이어 교수 역시 이 책을 통해 인간성의 회복, 민주주의의 역할론, 근대를 만든 여타 자유주의적 배타성에 대해 진지하게 사회철학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실생활과 이론적 실천방안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는 실로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서구와 비서구를 가리지 않고 오늘날 인문학은 과학 기술 발전을 우선시하는 이른바 ‘근대화’ 세력에 의해 직면해 수세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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