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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계속 가난한가? - 실업에서 잉여로, 새로운 빈곤층의 탄생 ㅣ 지그문트 바우만 셀렉션 시리즈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9년 4월
평점 :
절판
우리에게 유동하는 근대 혹은 액체 근대, 쓰레기가 되는 삶, 인간 쓰레기라는 사회학적 개념을 창안한 지그문트 바우만은 우리가 20세기를 넘어 지금까지 우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사회사상가이자 사회철학자였습니다. 제가 서평을 남긴 그의 책은 꽤 여럿 되지만, 그의 유고작이었던 레트로토피아의 서평을 작성하면서 그의 죽음이 너무나 안타깝다는 소회를 남긴 것처럼 우리에게 바우만은 지금도 몹시 필요한 사상가이자, 또한 귀한 비판적 지식인이었지만 그래서 그의 부재가 아쉬울 따름입니다. 바우만은 유대계 폴란드인 부모 슬하에서 태어나 바르샤바 대학에서 수학한 이후, 영국 런던 정경대에서 머물고 있는 동안 사회학에 대한 연구를 지속해 전통적 가치를 잃어버린 근대와 지나간 근대가 밟아왔던 비인간성에 주목, 평생을 들여 이 문제에 천착을 하게 됩니다. 바로 그러한 관련을 갖고 있는 이 책은 지난 1998년 “Work, Consumerism and the New Poor”라는 원제로 초판이 발행이 되었고, 국내에는 2010년 ‘새로운 빈곤 - 노동, 소비주의 그리고 뉴푸어’로 번역 출판되었으나 가장 최근인 2019년 4월 추가된 5장을 포함한 2004년에 개정된 2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책의 중요한 주제는 대량 산업 시대라고 불리우는 근대 산업화 이후 변화된 기존의 노동 윤리가 어떤 식으로 자본의 이익에 부합되었고, 그 와중에 쓸모를 잃은 빈자들의 전반적인 현실적 문제에 이어 오늘날에까지 이를 연장해 자본주의와 노동, 그리고 빈자들이라는 관계에서 전통적 가치를 잃어버린 현대 사회의 적나라한 현실을 이론적으로 규명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1장은 공장 자본가들이 개입해 변질된 노동 윤리를, 2장은 소비 지상주의의 부상을, 3장은 역사상 꽤 단명했던 복지국가의 실체를, 4장은 오늘날 변질된 노동 윤리 상황에 놓인 빈곤층, 5장은 총체적인 측면에서 지구화 된 세계의 노동과 잉여를 살펴보고, 6장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서 배제된 빈곤층에 대한 전망을 사회 전체적인 모습에서 조망하는 것으로 끝맺음이 되고 있습니다.
계몽주의 시기 이전의 네덜란드와 독일의 유수 길드에서 평생을 바친 수많은 장인들의 장인정신에서 비롯된 전통적인 노동 윤리는 특히 제품 생산에 따른 노력에 있어서 이들의 책임감을 강조했고 일부 사회학자들에 의해 이러한 전통적 노동 윤리가 보통의 노동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근대의 포드주의를 비롯한 대량 생산 체제에서는 어떻게 하면 노동자들이 현실에 불만을 갖지 않고 현장 관리자에게 순응하면서 그 유명한 ‘시장적 효율성’을 발휘시킬 수 있겠느냐에 대한 관점으로 변화 혹은 변질되게 됩니다. 이러한 변질은 바우만의 평가대로 전통주의적 사회 가치라고 볼 수 있는 “도덕적 책임과 정의”를 사실상 사회에서 박탈했으며, 시장 자체가 정당한 법치 제도에 기반해야함에도 자본의 이익을 위해 이러한 비정상적 상황을 묵인했다고 그는 또한 비판하고 있습니다. 특히 당시에 진보주의적 개혁가로 알려진 제러미 벤담 조차 노동 바깥에 있는 빈자들에 대해 가혹한 구빈소에 쳐 넣거나 일원화된 규율로 이들을 계도해야 한다고 밝힌바 있습니다. 이에 관해서 지그문트 바우만은 사회의 ‘가난한 자들’에 대해 부유층과 중위층의 불안과 두려움은 1장에서 노동 윤리가 직간접적으로 기여하고 있는 사회적 통제에 벗어나 질서와 통제를 뒤흔들 것이라고 보는 벤담 시대의 지식인들이 갖고 있던 지배적 관념에 비롯된 것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의는 아마도 그것이 본질적이든 않든 간에 대부분의 일반 계층은 이를 부정할 것입니다. 아니, 최소 1972년 전까지는 가난한 자들과 역외 계급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터무니 없는 경계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었으나, 뒤에서 살펴볼 전세계 노동 계층의 불안정성과 보편적 복지에 대한 공격, 대처 정권 시절 있었던 자산 조사에 의한 빈민에 대한 사회적 급여 지급 등 최하층의 계급들이 오로지 자신들의 선택에 의해 그러한 상황에 처했으며, 이것을 개인의 선택 문제라고 보는 시각은 꽤 멀리나 팽배해져 있는 상황입니다.
뒤이어 2장에서는 우리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일반적인 생산자이자 곧 소비자라는 양 측면의 시장 행위자임을 전제하고, “선택이 소비지상주의에서 중요한 가치라는 것”과 “소비자는 파산의 두려움을 무릅쓰면서까지 외상으로 구매를 하고 싶어할 가능성”이 소비자의 지상과제이자 미덕이라는 바우만의 일침은 인간의 노동을 도구화 내지는 상품화시켰던 자본주의의 의도와 맞물려 그러한 방법으로 만들어낸 소비품에 대해 각자의 이기심을 발휘해 욕망을 실현시키라고 외치는 소비 지상주의의 논법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이기심의 극대화는 전반적으로 비대한 소비 풍조를 잉태했고 즉, 대량 생산-대량 소비라는 고삐 풀린 자본주의의 양 축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소비 대열에 자원의 부재로 배제되었다는 것은 노동자들의 불안한 신분과 더이상 기대할 수 없는 국가의 안정책 및 이들에 대한 탈정치화가 극심하게 맞물린 결과로고도 볼 수 있습니다. 단순하게 이들이 소비 자본주의에서 배제되었다고 논평하는 것을 넘어서는 이것이 주변을 강제로 제압하는 자본주의의의 실질적 모순이라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렇듯, 1972년 이후 복지 국가의 개념이 후퇴하게 되고 앞서 언급한 대로 영국의 대처 시기에 자산 조사를 통한 빈민에 대한 사회적 급여 지급과 같은 정부의 행동은 통합이 아니라 분리, 포용이 아니라 배제를 초래했고, “사회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자들은 사회에서 거부된 자들에게 이런 낙인을 찍음으로써 자신들의 진짜 가치 혹은 추정적 가치를 재확인한다”고 바우만은 더 덧붙입니다. 마찬가지로 1980년대에 있었던 흑인을 비롯한 미국내 유색인종의 대학 입학과 관련된 인센티브 제도는 흑인들 스스로의 자기 결정권을 제한한다는 미명하에 말도 안되지만,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이를 철폐해 달라고 주장한 바가 있습니다. 사회적 보장을 비롯한 복지 문제와 관련해서 미국 내부의 인식은 주로 이와 같으며, 개인 선택의 문제라든지, 개인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스스로 일어나 성공할 기회를 박탈해서는 안된다’ 의미로 되새김되고 있습니다. 바로 마틴 길렌스의 일반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복지에 대한 연구가 이를 입증해, 꼭 길렌스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미국에서 복지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로 요구하는 것은 꽤 어려운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글 도입부에서 전통주의적 사회 가치를 떨쳐낸 최근의 노동 윤리가 사회 전체에 있어서 그리고 노동자들의 삶의 대한 보장과 안정성을 얼마나 박탈해 왔는지 바우만의 논법으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대량 생산 시기의 노동자들을 한데 묶었던 이 노동 윤리가 노동자들 스스로 자기 결정에 의한 결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오로지 공장 자본가와 이들 주변의 이익을 위해 생겨난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많은 자본가들이 시장과 생산 공장에 순응하는 노동관을 노동자들에게 주입했고 상대적으로 이에 걸맞지 않은 많은 노동자들은 사회에서 도태되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바우만이 언급하는 이 역외 계급이라는 정의는 꽤 광범위한 의미이지만 공통적으로 다른 계층의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낙인 효과와 당연히 이들을 도태시키고 배제해야만 사회적 질서와 통제가 유지될 것이라는 이해를 갖고 있다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굳이 허버트 스펜서를 꼽지 않더라도 토마스 칼라일과 같은 이들이 이에 동조했으며, 이 책의 마지막 6장은 이러한 불길한 전망을 담고 있습니다. 이미 미국은 교도와 관련된 공무를 민간에 외주를 주고 있는 상황인데, 이러한 역할을 자본과 민간이 맡게 된다면, 더 나아가서는 이들 빈자들과 역외 계급들을 따로 관리하는 대형 수용소가 나타날 가능성을 완전히 배체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최근에 발생한 난민들을 수용한 비인간적 수용소들도 그렇고 ‘사회에서 철저하게 분리시킨다’는 주장 하에 이에 동의하는 ‘만족하는 다수’가 출현한다면 그것의 가능성을 영원히 배제하기 힘들 것입니다.
우리는 일찍이 스스로를 옥죄었던 정교일체와 봉건주의를 타파한 바가 있습니다. 비로소 인간은 모두가 평등하다는 가치를 확인시켰고 그러한 가치 아래에서 공화주의와 민주 정치가 탄생했습니다. 여기에 자본주의와 민주적 가치가 서로 격렬하게 상충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 널리 확대되어 왔습니다만 이에 관해 작고한 정치학자 로버트 달은 시장이 민주적 통제하에 있고, 민주 정치는 다원주의적 가치를 지지해야 시장의 왜곡과 전체주의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우리의 노동이 단순하게 일을 통해 보람을 찾으라는 소위 전문가들의 논법에 설득당하지 말고 노동 자체가 삶을 풍족하게 하는 다른 수단들 가운데 한가지가 되어야 하며, 바우만의 언급대로 직업적 소명 의식이 사실상 엘리트들의 전유물이라는 것을 봤을 때, 이를 반대로 뒤집어 엘리트 계층들 뿐만 아니라 모든 노동자들이 노동 안정성과 각자의 삶의 질을 증진시킬 수 있는 ‘만족하는 다수의 출현’을 위해 사회적 공감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물론 현재 우리에게 있어 시장과 자본주의는 중요하지만 여기에 도덕적 책임과 정의 그리고 공공의 정치가 점차 사라지는 것을 방치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모두가 이런 문제 의식을 갖고 삶을 향해 나아간다면 사회는 분명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어리석은 상태로 만드는 모든 것들을 부정해야만 비로소 인간으로 바로 설 수 있을지 않을까 글 말미에 생각해봤습니다. 바우만도 역시 이런 당위성에 긍정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