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타자들 - 우리는 어떻게 타자를 혐오하면서 변화를 거부하는가
이졸데 카림 지음, 이승희 옮김 / 민음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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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졸데 카림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태인 여성 철학자이자 언론인으로 비엔나와 베를린에서 철학을 전공했으며 이후 비엔나 자이퉁의 프리랜서 기자 및 칼럼니스트로 명성을 얻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녀는 외르크 하이더로 대표되는 오스트리아의 극우 포푤리즘에 반대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는 양심적 지식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파시스트적이고 반유대주의적인 정치 공세에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는 등, 오스트리아 국내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런 그녀의 정치적 실험과 맞닿아 있는 이 책은 원제 “Ich Und Die Anderen”으로 지난 2018년 출판 되었고, 국내에는 2019년 3월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우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개인적으로는 이졸데 카림의 이 책은 과거에 읽었던 에티엔 발리바르의 “우리, 유럽의 시민들?”이라는 책의 꽤 훌륭한 답변으로 여겨졌습니다. 전 유럽에 만연하고 있는 인종주의적 반이슬람주의에 대한 문제제기로서 시작된 우리, 유럽의 시민들? 은 그 결론과 앞으로 나아갈 길의 납득할 만한 해결책과 대안이 마련되지 않았던 것을 감안한다면 카림의 이 글이 그것을 채워넣는데 정치사회학적으로 적절한 보탬이 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생각은 또 어떠한지 몹시 궁금하기도 합니다.

카림은 글이 시작되는 도입에서 계몽의 근대 이후 개인주의적 세대의 구분으로 1세대부터 2세대, 3세대의 시기적 근거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보편적 권리를 가진 수많은 개인들의 이 개인주의가 태동했던 옛 1세대부터 1960년대에 다소 성격이 변화된 2세대, 그리고 오늘날 어떠한 권위와 권위주의를 거부하며 정치사회적인 방어적 태도를 보이는 3세대까지 곳곳에서 피터 버거의 영향을 받은 그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더불어 로버트 달과 찰스 틸리가 ‘벌거벗은 민주주의’에 대한 해결책으로 여겼던 다원주의 및 다원성에 대한 당위성을 앞의 개인주의적 여건과 시대 상황에 근거에 꽤 일목요연하게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즉, 우리의 민주주의에 왜 다원성이 중요한 가치인가에 대한 대답을 저자인 그녀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죠.

또, 한 가지 여기에 민족의 형성과 민족주의 담론에서 출발해 비교적 성공적인 안착에 이르렀던 민족과 민주주의와의 정치적 상호 관계와 최근에 전유럽에서 보여지고 있는 이슬람 이주민들의 이민 행렬이 근대적인 민족 개념의 민주주의 정치를 허물어뜨리고 있는 상황을 제법 내면화된 목소리로 밝힙니다. 민족이 과거와는 달리 그 영향력을 실종했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입에서 민족이 전언되고 그것을 새로운 대두라고 일컫는 것은 꽤 설득적입니다. 이에 좀 더 첨언을 하자면 민족이라는 개념이 각각의 민족에 속하는 이들의 정치적 각성을 불러일으켜 한울타리로 동질성과 공감대를 만들어 근대 국가의 형성 및 민주주의의 발전에 이바지 했다면 근래 ‘액체 민주주의’로 이반하고 뒤이어 국민의 개념까지 모호해지는 것으로 봤을 때, 민족의 허물어짐은 그 영향이 실로 지대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자인 그녀 역시, “민족 정체성은 다원화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자신의 정체성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경험이 다원화의 시작이다”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짚고 넘어거야 할 점은 “원천적인 다양성은 기분좋은 공존이 아니다”라는 전제입니다. 다양성에 따른 다원주의와 다원정치가 실상 모두를 만족하기는 어려우며, 개인주의화 된 각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조금씩 덜어내고 타자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한 노력과 동질성을 강요하지 않는 객관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통합은 동화가 아니다”는 명제가 이를 반증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꽤 이채롭게도 제 3세대의 개인주의는 사실상 자기 방어적인 기재로서 다원화에 반대하는 입장을 소극적이든 드러나지 않든 이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분석대로 1세대 및 2세대 개인주의가 그나마 서로 동질성을 갖고 있었다면 3세대의 개인주의는 거의 하이브리드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날 3세대 개인주의적 인간들이 갈망하는 것은 “그렇게 정치적인 것에서도 개인으로서 인정받기를 원한다는 점”일 것입니다. 이것은 일방적으로 가치판단을 할 수 없는 인식으로 정치적인 것에도 개인의 고유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는 마냥 부정당할 것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매락 또한 사실상 다원주의와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이 글의 6장에서 논의되고 있는 포퓰리즘적 정치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에서 알 수 있듯이 분노와 증오를 재료 삼아 자신들의 가치를 다른 사람들과 별개로 여기며, 더 나아가서는 자신 이외의 타인들을 같은 국민으로 여기지 않는 이런 포퓰리즘 정치의 폐쇄성을 고려하면 지나친 것은 분명히 폐단을 낳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저자는 근래 논쟁적인 담론으로 여겨지고 있는 정체성 정치와 정치적 올바름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많은 우파 정치인 및 이들을 지지하는 계층이 이러한 일종의 정치적 정화 운동을 무력화하려고 하는 것은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접근과 태도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그것이 현실에 맞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의미임을 강조하기 위함으로 이르고 있습니다. 저자는 좌파의 예를 들어 이 정체성 정치와 정치적 올바름의 과도함을 비판하고 있는데요. 사실 정치적 불신과 분열을 조장하는 정치 세력이 건전한 정치적 이성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보이는지 고찰해 보면 대략 이들이 만나는 지점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분열된 정치 전략에 따라 포퓰리즘적 국면이 나타났다”는 저자의 판단대로 “시민들의 계몽만으로는 포퓰리즘에 대적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하게 됩니다. 실상 완벽한 다원주의적 정치는 마찬가지로 완벽한 민주주의적 토양에서 꽃피울 수 있으며, 현재의 여러 왜곡되고 때로는 각 사회를 분절된 상황에까지 몰고가는 포퓰리즘적 정치 공세에 효과적인 대응을 하기란 사뭇 어렵게 보입니다. 다만, 무작정 개인적 담론과 개인주의에 대한 열망에 기대지 말고 우리가 과거 민족주의적 사회의 공감대와 같은 모두가 이해하고 공감할 만한 서로의 연계성을 다시 부활시키고 이것을 해묵은 전통주의적 복고로 몰고가지 않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정치적 올바름과 정체성 정치는 다원화 사회에서 핵심적인 불의와 차별을 균등하게 하려는 정당한 도구”라는 저자의 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이러한 과정에 제일 먼저 전제해야 할 것은 서로가 동등한 대화 상대로 파악하고 어느 정도 자신의 개인적 고유성과 권리를 타인과 공유하고자 하는 용기가 아닌가 먼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끝으로 저자는 지식인의 양심으로 오늘날 유럽에서 보이고 있는 반이슬람주의가 2차대전 전후의 파시즘의 소용돌이에서 일어난 반유대주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이슬람 관습을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프랑스와 독일의 사법 당국의 판단이나 비이슬람 시민들의 정서가 과연 어떤식으로 결론이 날지 아직은 묘연합니다. 자크 랑시에르가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첫걸음으로 인종과 성별을 초월한 사회 통합에 나서는 길로 바라 봤듯이, 얼마간 민족주의 향기가 남아있는 이 국민국가적 민주주의에 앞으로 이 반이슬람 정서가 어떤식으로 나타날지 예측하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이 부분을 따로 꼬집어 언급하는 것은 근래 극심한 경제적 차이로 인한 다수 시민의 현재적 고통으로 봤을 때, 정치와 사회가 이 혐오와 분노를 자양분 삼아 과두제를 거쳐 결국 파시즘의 망령이 다시 유럽에서 나타나게 될 것이 아닌가 우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의 브렉시트와 관련된 영국의 정치적 과정을 주의깊게 보고 있는 저자와 마찬가지로 유럽의 반이슬람 정서가 어떻게든 해결이 되어야만 하는 선결과제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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