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한국식민지화 - 담론과 권력
Alexis Dudden 지음, 홍지수 옮김 / 늘품(늘품플러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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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코네티컷 대학의 역사학과 교수이자, 특히 일본제국주의 시대와 관련된 동북아 역사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 온 알렉시스 더든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학자입니다. 지난 2015년, 일본 종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 내 역사학자 성명을 이끈 공로로 만해평화상을 받은 이력이 있는데요. 당시에 일본 아베 정권에 대한 비판과 함께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바가 있습니다. 그녀의 ‘일본의 한국식민지화’라는 이 글 또한 그러한 연장선상에 있는 연구라고 생각되는데요. 다만 이 책에 대한 서지 정보가 확실히 잡히지 않아 구글링을 하게 되었는데, 출판 연도가 2004년으로 나와 있지만 정보가 정확한지는 약간 불명확합니다. 이 점 양해 말씀 드립니다. 국내에는 출판사인 늘품플러스가 2016년 번역 출판하였습니다.

알렉시스 더든이 이 책에서 밝히고자 하는 점은 이렇습니다. 1차대전 발발 이전의 제국주의 시대에서 야만국은 마땅히 문명국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계몽적 통치’에 대한 해석과 이를 바탕으로 일본이 근대화 된 군사무기로 팽창에 나서지만, 그것보다 “권력 다툼에서 군사력만이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넘어서 일본이 이 시기의 국제법과 국제조약 및 외교용어들을 조선과 청나라에 능수능란하게 교묘한 술수로 사용하며 팽창주의의 합법성을 얻으려고 한 이면을 파헤치고자 쓴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금 장황하지만 결국 요점은 “이른바 문명 국가들은 야만적인 국가들을 합법적으로 정복하고 통치할 수 있다”는 당시 식민지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론적 잣대인 계몽적 통치와 이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조선을 병탄하고, 당시의 조선을 야만국으로 규정한 일본의 외교적 술수에 대한 분석이 주된 요점입니다.

일본은 1853년 미국 매튜 페리 제독의 흑선에 의해 소위 불평등 개항을 강제로 맞게 됩니다. 당시의 일본 식자들은 이러한 굴욕적인 불평등 조약이 후에 일본이 기준에 맞는 힘을 되찾게 될 때 극복할 수 있다고 여겼지만, 그것보다도 도쿠가와 막부가 붕괴하고 일왕이 전면에 등장하는 정치적 격변의 시기와 부분적 근대화를 통한 국력을 신장한 경험으로 자신들의 제국주의 시대를 열게 되는데요. 물론 저는 이 점을 옹호하고자 저런 수사를 붙인 것은 아닙니다. 저 역시 알렉시스 더든의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짤막한 평가인 “일본제국주의 역사 속에는 한국, 중국, 그 밖의 도처에서 강제로 이주당해 공장과 군막사에서 노동자로, 성노예로 착취당한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가슴 복잡한 이 문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지금도 일본의 대다수의 지식인들과 무지한 시민들은 2차대전 이전의 아시아에 대한 침략행위가 일본제국이 종말을 고함으로써 끝났다고 동시에 그 책임이 소멸했으며, “일본의 팽창주의 산물인 제국이 붕괴된 후 반세기가 지난 현재,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뉘어 서로 다른 방법을 이용해 마치 입을 맞춘 듯 서로 도와가며 역사적 과오를 정화하하려고 하고 있다”고 저자 역시 비판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 글의 시작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의 진화론적 사회학에 입각해 유럽 제국주의의에 의한 식민통치를 번영이라 여기고 이 왜곡된 평화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여기고 있던 당시의 시대상이 저자인 더든의 글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일찍이 E. H. 카는 1차대전 이전의 이러한 이상주의적이고 낭만주의적인 평화 분위기가 끔찍한 대전의 원인이었다고 여기는 것에 한편으로 동의가 될 만큼 이들은 자신들을 문명국이라 자처하면서 번영의 시대라고 여기고 있었죠. 가까스로 신흥국의 반열에 들어선 일본은 자신들도 역시 열강의 틈바구니 안에 들어가길 원했습니다. 여기에는 제레미 벤담이 고안한 international 인터내셔널, 국제 및 국제주의와 국제법과 관련한 당시 동아시아에는 생소했던 이들과 관련된 연구를 일본인들이 끊임없이 지속해 왔고 이것이 단순한 상업행위를 통한 교역을 야만과 비야만을 구분하는데 그치지 않고 도로 조선과 청나라를 야만으로 규정하는 데 교묘히 쓰였다는 점에서 통렬한 감정이 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이 시기의 정한론과 조선 병합의 목적을 추구한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에 말려들어간 이유도 이와 같이 인도주의적 원칙을 수호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이 얼마나 교묘한 언술에 지나지 않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기들 손으로 더러운 일을 하지 않기 위해 이완용과 송병준 같은 부역자를 이용해 추잡한 짓을 벌인 일은 일본인들이 과연 인도주의와 정의를 입에 담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저는 이 미국의 여류 역사학자의 이 연구에서 특히, 일본이 당시 조선을 의사-독립국으로 여긴 점이 관심을 끌었는데요. 조선이 법적으로 청나라 속국이었던 것은 명백했지만 독립국으로서 조선 국왕이 자주권으로 통치하고 있었으나 이 중국 대륙에 의한 전통적인 동아시아 정치적 관계를 잘 알고 자신들도 그러한 범주안에 속해 있던 일본이 그것을 모른척하면서 조선을 독립과 자주권을 주장할 수 없는 국가로 술책을 부린 것은 1870년대 초 일본에서 불던 정한론으로는 전부 설명할 수 없는 노골적인 야욕이라고 해야할까요. 저자도 분명 인정하는 부분이지만 강화도 조약으로 시작해 1910년 말장난에 불과한 대한제국 병탄을 한일합방으로 포장하기까지 면밀한 정치외교적 과정을 꼼꼼히 갖춰나가면서 당시 열강국들로부터 승인받으며 대한제국 편입을 마무리 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욕심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1943년 미드웨이 해전 패배 후 미국과의 단독 강화 시도를 통해 만주와 대만, 한반도의 지배 만이라도 유지하려고 했던 일본제국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겠죠.

바로 3장이 일본의 동아시아 침탈 과정에서 일본인들이 국제법과 국제용어 해석과 이론 습득에 나선 이유이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조선 사법권 박탈과 관련된 프랑스인 구스타브 봐소나드의 일화가 쓰여져 있는데요. 저자인 더든이 이런 사례까지 조사한 것은 한국 학자들보다 더 치밀한 연구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한국의 국사학계가 당시 메이지 유신에 대한 천편일률적 해석과 일본의 근대에 대한 지속적인 폄하를 해오고 있는데요. 저는 지금이라도 우리 학계가 이것에 대한 면밀한 연구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국내에 많은 학자들은 1905년 태프트-가쓰라 밀약과 1902년 이후 영일동맹이 갱신되면서 인도와 대한제국을 맞교환한 영일 양국의 우호조약에만 신경쓴 나머지 이것만을 알파와 오메가로 여기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정한론에 대한 연구도 이런 차원에서 다시 조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끝으로 오늘날의 일본인들과 일본 정부가 2차대전 종전 이후, 과거의 일본제국과 미군에 의해 민주정치로 개조된 자신들의 현재 정부가 법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과거 제국주의의 유산과는 다르다고 선을 긋고는 있지만 전후 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수정주의적 입장과 종래의 평화헌법 개정과 관련된 시도에서 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우려를 금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과거에 대한 사과가 국격의 손상이라고 여기는 이들의 태도에서 앞으로 역사 문제 뿐만 아니라 정치적 문제까지 일본과 관련된 요건들이 어떤 식으로 결말이 날지는 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어 보입니다. 많은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이 알맹이가 빠진 협력 운운이 차라리 아예 없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이 역사 문제가 과연 해결될 문제일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는 모두가 답을 짐작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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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 그들 - ‘그들’을 악마로 몰아 ‘우리’의 표를 쟁취하는 진짜 악마들
이안 브레머 지음, 김고명 옮김 / 더퀘스트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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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마치고 뉴욕 대학의 교수를 거쳐 유명한 ‘타임’지의 전 편집장 및 현재 글로벌 정치 리스크 연구 및 컨설팅 기업 유라시아 그룹의 설립자 겸 회장인 이안 브레머의 최신의 세계정치경제 비평서 ‘우리 대 그들’을 일독했습니다. 원제는 Us Vs. Them The Failure of Globalism 이며, 현지에서는 지난 2018년 출간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브레머는 J-Curve 에 대한 개념과 관련된 글로 유명하고, 특히 중국과 관련하여 종래의 중국굴기론을 지지하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글들은 국내에도 그동안 번역 출간이 되었는데요, 현재는 일부 책들이 절판된 상태이기도 합니다.

여기 이 글은 크게 실패했다고 보는 세계주의와 세계화에 대한 재조명 및 현재의 실패를 세계화의 문제로 몰고가는 포퓰리즘과 포퓰리스트들에 대한 분석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와 관련한 브레머의 논증 과정에서 보여지는 여러 주장들 가운데 개인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지만 원칙적으로 오늘날 세계의 포퓰리즘의 대두와 이들의 정치경제적 왜곡 시도는 분명 우리 민주주의에 위협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리고 이들 포퓰리즘의 대두에 분노와 경멸과 같은 감정적인 대응으로는 해결하기 힘들며, 우리가 현실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각각의 체계를 정확히 바라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겠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포퓰리스트들은 “엘리트들이 우리의 삶을 둘러싼 규칙을 정할 자격이 있다고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저자는 밝히며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이 포퓰리스들이 적절한 대안은 제시하지 못한 채, 기존의 엘리트 정치를 전복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측면입니다. 이것을 반증하는 입장에서 “세계 엘리트들의 대부분은 세계화가 불평등의 해결책이라고 믿는다”는 논점에는 개인적으로는 완벽히 동의하기 힘들었습니다만 브레머가 저 말을 확신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떠나서 그 역시 “선진국의 강력한 사회 안전망이 앞으로의 수많은 불평등 문제를 좌우”할 수 있을 것이라는 평가에는 대체로 동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문제는 결과의 불평등이 아니라 기회의 불평등이다”는 평가도 비슷한 맥락이고, 이 점은 3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대표적인 개도국 12개국의 사례와 결부지어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12개국은 남아프리카공화국, 나이지리아,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브라질, 멕시코, 베네수엘라, 터키, 러시아, 인도네시아, 인도, 중국으로써 앞으로 세계의 미래와 관련해서도 이들 국가들이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될지와 관련해서도 독자들이 주목해 볼만하다고 여겨집니다. 이들 국가들이 파탄 국가의 길을 걷지 않고, 경제적 평등과 국민들의 삶을 신장시킬 수 있는가에 따라 2020년 이후의 세계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자의 이러한 태도는 기본적으로 세계주의와 세계화에 대한 면밀한 확신과 현저히 자생하고 있는 이 포퓰리즘 정치를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지에 대해 정치경제적 입장과 수단으로 저자 자신이 설득력을 높이려고 하고 있으나 각각의 논증들이 다소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도 분명 있습니다. 2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자동화와 기계학습 등이 과연 우리의 노동 시장과 노동력의 변화에 어떠한 영향이 될 것인지는 미래경제학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4장에서는 보호주의의 장벽이라는 화두로 세계화에 반하는 각국의 보호주의 상황을 열거하면서 특히 근래 획기적으로 유입되었던 난민 문제와 이민 문제를 분석하며 특히 중국과 이란 등의 국가 당국에 의한 검열과 같은 자국민에 대한 폐쇄적 보호에 대해 비판하고 있습니다. 뒤에 5장에서 중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후커우 제도를 대비한 ‘사회신용체계’가 조지 오웰이 경고했던 ‘빅브라더의 출현’과 매우 유사하게 언급되고 이러한 중국의 신 평판 시스템이 결과적으로는 모든 중국의 인민이 국가의 감시를 받는 상황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은 애써 그런것이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그것의 결과는 어떠할지 우리와 같은 외부인들은 자명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에 중국 정부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이 프로젝트의 최종 목표는 “신용이 없는 자들이 한 걸음을 내딛는 것조차 어렵게 만들어 일반 국민이 하늘 아래 어느 곳이든 마음껏 누빌 수 있는 신용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는 분명한 불가능한 목표에 대해 허울좋은 목소리만 높이고 있습니다. 이 시스템이 앞으로 어떠한 식으로 작동할지에 대해서는 우려할만한 상황이죠.

이렇게 사우디아라비아와 중국, 이란에 사는 사람들과 다른 선진국에 사는 사람들의 처한 입장이 정치 체제에 따라 현저히 갈립니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가 현재 유럽에서 목도하고 있는 난민 문제에 대해 이들을 우리의 사회쳬계 안에서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지에 그동안 사회계약론에 기초한 여러 이론들을 살펴보고 새로운 시민들에 의한 계약론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습니다. 이처럼 답이 무엇이든 간에 단순히 국가 안보와 더 좋은 삶을 살 기회를 보장하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을 문제인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을 슬라보에 지젝이 말했던 전통적인 국민국가의 위협 상태로만 받아들이지 말고 오히려 장벽을 세우고 차별하고, 보호주의적 입장에 서는 것이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 인지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핵심은 미국의 티파티 운동과 같이 “미국을 다시 하얗게 만들겠다는 성난 인종주의 노인들과 평범한 애국 시민으로 위장한 돈 많은 공화당 활동가들의 야합”이 포퓰리즘과 포퓰리스트들의 생명력을 더욱 높이고 우리들의 민주주의를 더 위험한 상태로 몰고가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위기는 저자가 마지막 장에서 분석하는 만연한 ‘가짜뉴스’와 이를 바탕으로 ‘선동된 가짜 여론’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이제 민주주의하의 시민들이 자신들의 삶을 건전하고 열심히 사는 것 만으로는 이 토대를 지켜낼 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앞선 장에서 이것과 관련해 저자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요. 이 교육의 제공은 ‘기회의 균등’이라는 민주주의적 가치에 가장 부합되고 시민을 이성과 지식으로 재무장하는 꽤 효과적인 수단이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경제를 시민의 삶을 영위하는 수단으로 인식하고 더이상 목적과 수단의 경계가 왜곡되어 우리 시민들이 가치왜곡에 빠지지 않도록 ‘허위의 부르짖음’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동안 세계화와 세계주의의 뒤안길에 비롯된 여러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극명한 빈부격차와 심각한 불평등 문제, 심각한 정치 불신이 이 자본주의적 경제 세계화의 일정부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포퓰리스트들은 이 세계화가 미국 시민들을 궁핍에 이르게 만들고, 아시아의 개도국의 중산층을 키우는데 일조했다고 비난하면서 세계화 자체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은 강화하면서도 정확한 근거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들은 주로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현실을 왜곡하는 것으로 우리가 중요하게 알아야 될 부분은 이 ‘세계화’를 어떻게 하면 올바른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지 그 고민입니다. 이미 셰계는 경제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면밀하게 연관되어 있고, 일정 부분의 번영이 이런 가치와 연계되어 있습니다. 다만, 기존의 엘리트들이 자신의 기득권과 부를 위해 시스템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매번 강조하는 말이지만, 제도의 재정비와 민주주의의 확대, 평등한 기회를 더욱더 보장하는 것이 필요하고 여론을 만들어 나가는 것도 또한 중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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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전쟁 50년의 점령 - 중동 테러리즘의 불씨를 지핀
아론 브레그먼 지음, 정회성 옮김 / 니케북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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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 킹스칼리지의 전쟁연구학과 교수로 있는 아론 브레크먼은 이스라엘 출신으로 중동 전쟁에 참전한 후, 제 1차 인티파다 발생 이후, 비롯된 이스라엘 정부와 군에 의한 팔레스타인들에 의한 가혹한 처우와 정책에 반대하여 이스라엘을 떠나 영국으로 이주한 이력이 있는 역사학자입니다. 이 책의 서두에서도 이와 관련한 개인사로 그의 이런 양심의 문제에 대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장인과의 관계 등이 언급되고 있는데요. 아마도 조국인 이스라엘을 떠나 외지에서 모국에 대한 역사와 중동 전쟁사를 연구 집필하며 현재까지 학자적 양심을 지키고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바로 이 책도 그러한 결과의 산물일텐데요. 지난 2014년 Cursed Victory라는 원제로 출판되었고, 국내에는 2016년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은 주를 포함한다면 약 630여페이지의 적지 않은 분량을 갖고 있습니다. 저도 책을 주문해서 받았을 때, 전부 소화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소요될지 아득했습니다만 짬짬이 틈을 내어 3일만에 정독을 마칠 수 있었는데요. 글의 전체적이 구성이 예상외로 꽤 명료하고 번역의 질 또한 나쁘지 않았습니다. 다만, 1948년부터 1967년 사이의 당시 이스라엘 정치와 외교사 및 전쟁사를 인지하고 있어야만 이 글의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제3차 중동전쟁 이후인 1967년 6월 이후, 이스라엘은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에 대한 선제 공격을 감행해 승리한 후, 의도하지 않은 전리품으로 요르단 강 서안, 지중해에 면한 가자 지구, 시리아의 골란고원,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를 획득하게 됩니다. 이것은 지난 제네바 협약에 반하는 명확히 불법적인 이스라엘의 점령화로 저자인 아론 브레크먼은 이러한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이들 점령지역에 대한 ‘영구점령화’에 대해 규정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정치적 의도들이영구점령을 염두해 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글을 써가고 있는데요. 이들 지역의 점령 초기에 이스라엘 당국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해하긴 했지만 유대인 정착촌 문제와 특히 점령 이후 거주하고 있던 팔레스타인들을 요르단과 시리아 쪽으로 강제적으로 쫓아냈다는 점은 앞선 의심을 절로 갖게 하는 부분입니다.

사실 이 뿐만 아니라 저자가 짚어 내고 있는 이스라엘 당국이 주도한 중요한 정책들, 특히 광범위한 군정과 팔레스타인들에 대한 야간 통행 금지, 서안 지역에서 실시한 행정 및 경제적 강제 관리와 팔레스타인들 스스로를 위한 정치적 수단 행위를 사실상 금지한 것은 이들 지역에 대한 이스라엘의 식민지 통치 행위와 다를바가 없어 보였습니다. 이에 저자는 글의 말미에서 인도 등에 행해진 영국의 식민지 정책보다 훨씬 정치적으로 교묘했다고 평가하며, “이 책에 기술된 이스라엘의 40년 점령기를 두고 훗날의 역사는 이스라엘과 유대인의 역사에 크나큰 오점이었다는 평가를 내릴 것이라 믿는다”는 매우 겸허하면서 연구자적 양심에 의한 평가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이스라엘 군에 의한 군사적 보복행위와 PLO나 하마스에 의한 테러 행위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수준의 문제이며, 국제 사회와 동맹국인 미국, 여러 유럽국가들이 이스라엘이 자행하고 있는 수많은 군사적 작전에 많은 우려와 중단을 요구했고 점령지 내에서 팔레스타인들에게 최소로 필요한 물과 전력과 같은 인간 생황의 기본적인 보장 또한 이스라엘 정부에 의해 차단되어 왔다는 점은 지금도 자신들을 성공적인 개방된 민주주의 국가로 자임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심각한 괴리 현상으로 느껴졌습니다.

이런 현저히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부당한 정치적 현실에서 여러 가지 복잡한 속내로 미국에 추진된 평화 협상은 작게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과 크게는 중동국가들간의 관계 개선 및 평화 구축에 있었는데요. 여기 3부에는 이러한 노력들의 일환으로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과 그의 행정부가 이스라엘과 PLO를 상대로 중재 노력을 기울인 정치외교적 노력들이 서술되고 있습니다. 특히 노회한 아라파트 전 PLO의장과 에후드 바라크, 아리엘 샤론 전 이스라엘 총리들 간의 협상 내용들이 꽤 상세히 나와 있는데요. 특히. 동예루살렘의 중요한 이슬람 성소인 ‘하람 알샤라프’ 지위 및 주권 문제가 서로간에 해결될 수 없는 문제로 인식되며 협상의 공식적인 해결을 도외시한 조건이었습니다. 당시의 아라파트 의장은 이집트와 시리아 등의 아랍국가들의 심대한 압력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캠프데이비드와 프랑스 파리의 여러 협상에서 이 하람 알샤라프에 대한 이스라엘의 주권 문제를 클린턴 대통령이 용인해달라고 요청하지만 결국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이슬람 율법에 의해 이 성소 문제는 해결 불가능한 문제로 만약 팔레스타인 국가가 용인받는다면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삼겠다는 주장과 함께 타협이 불가능한 부분이었습니다. 좋은게 좋은것이라는 취지의 클린턴 대통령의 설득과 외부의 한 서양 정치인의 시각이 얼마나 이 문제를 가볍게 생각한 것인지 알 수가 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임기 말까지 중동 평화 해결을 위해 기울인 노력이 사적인 업적을 위해 기울인 것이라 할지라도 클린턴의 외교적 노력이 무조건 폄하되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이슬람이라는 유일무이한 종교가 수많은 개인들의 일상의 삶을 제어하고 관리하는 것은 계몽주의의 혜택을 받은 다른 시민들이 보기에는 이해하기란 어려분 문제입니다. 다만, 오늘날의 테러리즘과 관련해서 이 이슬람 율법의 폐쇄적이고 폭력적인 해석을 이슬람 종교인들이 나서서 관리하고 제거할 필요는 있지만, 이슬람 자체가 정치적 수단인 많은 중동 국가들에게 있어서 율법을 어떤식으로든 개조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 무고한 희생자들을 끊임없이 양산해 낼 수 있다는 점은 모두가 알다시피 매우 우려스러운 부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 이 책을 통해 이스라엘 정치와 정치인들의 복잡한 셈법과 시종일관 비타협적인 유대주의와 평범한 팔레스타인들의 희망을 대변하지 못하는 전자와 동일한 노회하고 정략적인 종교정치인들의 실상을 목도할 수 있습니다. 과연 평화를 위해 정치적 협상을 할 의지가 있는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과 정치적 평화가 많은 일반 사람들의 평화로운 삶에 기여해야 한다는 이 정치도덕론적 원론이 거부되는 상황을 어떻게 봐야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을 보는 태도를 단순한 현실이 결여된 이상주의적 입장이라고 단언하기는 쉬우나 누구나 평화롭고 자유롭게 살 권리에 대해 이들이 주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또한 뒤에 정치 세력들이 이것을 거의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숨은 의도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2005년에 반환된 가자지구에 대한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이스라엘 정부에 의한 교묘한 통제는 바로 이러한 점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안보와 생존권과 관련하여 어떠한 타협도 있을 수 없다는 주의를 보여주고 있고 군사적으로도 ‘방어적 공격’에 아무런 거부감이 없으며, 모사드에 의한 정치인 및 테러 지도자들의 암살과 관련해서도 정치적으로 필요하다면 무슨 짓이든 감행할 의지가 있는 국가로 여겨져 다소 복잡한 감상이 들었습니다. 미국에 대해 비재래식 군사력(자신들이 보유한 핵무기)과 관련하여 어떠한 개입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주장이나 미국 내에 수많은 유대인 단체를 움직여 여론을 환기시키고, 자신들의 정보 단체를 움직여 정보를 쥐어짜내는 모습은 마키아벨리가 희망했던 다수의 국민들을 위한 어떠한 도덕적 문제에 연연하지 않은 그야말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상적인 형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더불어 현재의 동맹외교와 관련해서 제3차 중동전쟁 이후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를 반환하면서 미국에게 자신들이 양보했으니 막대한 비밀 원조를 요구한 이스라엘의 소위 외교력에 대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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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타르드 컴북스 이론총서
유진현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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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사회학’으로 오늘날 재조명을 받고 있는 가브리엘 타르드의 얇은 소개서인 ‘가브리엘 타르드’를 읽었습니다. 이 책은 상명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인 유진현 교수가 썼습니다. 출판사인 커뮤니케이션북스에서 현대 사상가 시리즈물로 꾸준히 내고 있는데요. 과거에 한길사 로로로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시공사에서 펴낸 사상가 시리즈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런 기획들은 해당 인물의 주저를 읽기전에 훌륭하게 참고할 만한 역할을 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우선 저자인 유진현 선생은 글 서두에서 문학 전공인 자신이 어떻게 가브리엘 타르드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에 그 소감을 먼저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2001년 귀국해서 르 봉과 타르드의 저작을 번역해보고 싶었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여의치가 않게 된 것을 아쉬워 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상률씨가 초역한 ‘모방의 법칙’, ‘여론과 군중’을 소개하고, 특히 동일한 역자가 번역한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를 다수의 번역판이 있는 가운데 가장 선호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저도 역시 이상률씨의 번역이 탁월하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에게 가브리엘 타르드는 많은 현대 사상 연구자들에 의해 ‘인터넷으로 연결된 현대사회를 분석하기에 적합한 이론의 틀을 가브리엘 타르드가 마련한 것으로 우선 해석’합니다. 과거 에밀 뒤르켐과의 10여년간의 논쟁의 귀결로 그동안 그의 ‘심리사회학’이 사회학의 실증주의적 대세에 밀려 한동안 잊혀져 왔는데요. 미국에서 프랑스보다 질 들뢰즈 연구가 각광을 받으면서 ‘모방’과 관련된 가브리엘 타르드의 이론이 주목을 받게 되고 이러한 경향이 꾸준히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저는 개인적으로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이론보다 가브리엘 타르드의 군중과 공중 이론이 좀 더 면밀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오늘날 합리주의에 기반을 둔 사회학 이론이 직면한 한계로 새삼 가브리엘 타르드가 각광 받고 있는 이유로서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가 이제서야 다시 우리의 인식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앞서 언급한 과거 에밀 뒤르켐과의 논쟁에서 이론적으로 밀리게 되어 거의 그의 심리사회학이 오랫동안 퇴출된 역사 때문입니다. 타르드의 표현대로 일견 궤변론자이기까지 했던 당시 떠오르는 신예 에밀 뒤르켐의 사회학의 실증주의적 증명과 인간 행동 법칙의 합리적 개연성이라는 당시 프랑스 사회학의 주류에 심리적 관계, 관습적 요인, 심리 이동, 모방 등과 같은 다소 실증적 또는 합리적으로 증명하기 어려운 그의 이론이 그 특유의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쫓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한동안 타르드를 연구하는 하는 것을 꽤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인식되기까지 했죠.

오늘날 광범위한 인터넷 시대와 개인과 개인을 서로 물리적인 거리가 있음에도 순수한 온라인 상에서는 무한히 가깝게 만드는 이러한 초연결사회에 타르드는 여느 사회학자가 이론적으로 뒷받침하지 못하는 인간이 서로를 모방하고, 한편으론 이러한 방식이 일종의 문명화 과정으로 해석되는 시대상에 그의 사상이 관습적인 보편성을 갖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분명 우리가 목도하는 세계에서 반대의 합리주의적 수단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한계가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회 분석 수단이 한계에 봉착하면 또 다른 것으로 분석을 시도해 보는 것은 학문의 또다른 열린 강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18세기에 우리가 계몽의 문을 열었던 것처럼 이 점을 인지하고 좀 더 인간적인 사회학 및 현대철학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학문을 하는 자의 소명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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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사회학적 연구 국가란 무엇인가 4
프란츠 오펜하이머 지음, 이상률 옮김 / 이책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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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출신의 유대인으로 일찍이 의학을 공부하고 뒤이어 경제학 및 사회학의 학자로 세계 양차대전의 시기를 보내면서 ‘자유적 사회주의자’로 알려진 프란츠 오펜하이머의 플라톤의 국가론에 이어 널리 읽혀지고 연구되고 있는 ‘국가’를 일독했습니다. 이 글의 오펜하이머는 특히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있게한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요. 책의 소개글에서는 그가 2차대전시기에 독일에서 설 곳이 없어졌다고 완곡히 설명하고 있지만 아마도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독일을 피할 수 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또한 이 글의 특이한 부분은 제3판의 머리말이자 1929년의 서문에서 저자인 오펜하이머가 밝히고 있듯이 그의 유명한 두 편의 주저, 국가 The State와 사회학 체계 system der soziologie 와 관련해서 번역된 이 글이 발췌본 내지는 편집본이라는 사실입니다. 원저에 비해 분량을 줄인 것은 860쪽 분량의 큰 판은 독서 대중에게 너무 무겁고, 독자들에게는 유감스럽게도 비싸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첨부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근사할지도 모르는 이 이유의 변에 개인적으로는 찬사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크더군요. ^^ 참고로, 거의 동시대의 핵물리학자인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물론 착각하는 분들은 없으시겠지만요. 덧붙여 이 글은 번역출간한 출판사의 국가란 무엇인가 시리즈의 연작물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국가란 무엇인가’ 연작의 세번째 서평이기도 합니다.

일찍이 플라톤은 그의 국가론에서 전통적인 민주주의 형태의 정치체를 혐오하고 주민들에 대한 강제와 개입을 지지한 바가 있습니다. 물론 오펜하이머는 플라톤과는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는 보론으로 삽입된 국가의 우상숭배라는 짧은 글에서 “국민들이 해야 할 과제는 남은 원초적인 폭력의 산물을 뿌리째 뽑아버리고, 중간계급 혁명이라는 과업을 완수해 진정한 자유가 생겨나게 하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실로 자유적 사회주의자라는 말이 실감나는 주장입니다. 다시 본래 글로 돌아와서 우선 저자는 그 이전의 여러 사상가들의 국가론들을 돌아보면서 고대 수렵시기의 인간들의 생활상을 살펴보면서 이 시기에도 경제계급과 경제적 측면의 이익이 존재했다는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잉여 자원과 관련된 익히 알려진 기본적인 자본주의적 경제 개념을 따로 논하지는 않고, 한정된 자원을 소위 약탈하기 위한 부족주의적 초기 국가 형태의 양상을 꽤 자세히 1장과 2장을 통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들 권력구조와 관련해 군장 내지는 부족장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이 어쩌면 자원 배분과 관련된 인센티브와 유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이들 초기 부족적 사회에 노예를 자본적 재산으로 포함할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약탈시도와 혹은 반대의 자위권의 시도로 발생된 단순한 자연발생적 부산물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오펜하이머는 전자에 가깝게 해석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러한 “원시 정복국가의 권력이 미치는 지역이 넓을수록, 이 국가에 지배받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그리고 이들이 밀집해 살수록, 경제 분업이 더 많이 전개되고 또 항상 새로운 욕구와 충족 수단이 더 많이 생겨난다”고 정의하며 농경지의 농민 국가에 비해 수렵을 목적으로 삼는 광범위한 목축민들의 목축 국가가 그 초기 사회 발달 과정에서 경제적 요인을 더 추동하는 것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이 원시 국가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목축민들의 기질과 성향, 확장성 등을 기반으로 이들의 인류 역사적 영향에 대한 부분과 유사하게 전개시키고 있는데요. 꽤 설득력이 있기도 합니다. 또한 이들 초기 사회에 대한 발달 단계적 해석도 충분히 납득이 됩니다.

이어 3장의 해양국가에서는 전통적인 육지국가들과 비교하여 “육지국가는 물물교환 경제 상태에 매우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지만, 반면에 해양 국가는 매우 빨리 화폐 경제로 넘어갔다”고 그는 분석합니다. 이것은 초기 유럽의 대항해시대의 포르투갈과 스페인, 후에 지중해 상권을 부흥시킨 이탈리아와 이슬람 상인들 및 영국의 발전을 예로 삼을 수 있으며, 이 화폐 상업의 발전은 국가의 형태마저 바뀌게 만든 중요한 인류사적 사건이기도 합니다. 이 점은 초기 자본주의적 형태이거나,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상품과 관련하여 “인간은 노동력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논리에 가장 부합되는 과정의 실례라고 판단됩니다. 특히 초기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노예 시장 및 노예 거래의 초기에 비인간적 가치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부와 관련된 혁신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바다를 통한 무역과 상업 거래들이 유럽의 봉건 시기에 토지를 둘러싼 다툼에도 이는 별개의 과정으로 발전했고, 다만 육지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해양국가에서도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동일하게 통치했다”는 유사성 또한 보이고 있습니다. 결국 육지국가에서 해양국가로의 이행 과정은 전통주의적 고정된 복종 관계를 더욱 더 느슨하게 만들었고 어쩌면 이를 기반으로 뒤이어 입헌 국가의 가능성을 열게 된 것이 아닌가 판단해봅니다.

5장과 6장의 입헌 국가에서는 앞선 화폐 경제의 발달로 농민층이 해방되고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숙명적인 이원화가 외형적으로 고착화 됩니다. 봉건주의 시대에 자유민과 평민들간의 갈등, 이 시기의 자유민들이 결국 자유민이 아니게 되는 봉건 영주들의 교묘한 개입 및 납세의 의무를 설명하고 있는데요. 이 입헌국가의 시기에는 피지배층들이 더욱 ‘자연법주의 및 자연법 사상’에 기대게 됨으로써 단순히 정치적 지배-피지배 관계를 후에 벗어나게 되는 원동력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영국의 청교도 혁명과 프랑스 혁명은 바로 이러한 사상에 기반하고 있고, 근대를 다른 이전 시기들과 다르게 명백하게 설명해주는 사건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시대의 지배계급은 획득한 통치권이 자신들의 손에 쥐어준 모든 수단을 이용해 투쟁했으며, 종래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특히 사회계급적 및 정치적인 실질적 행위로써 피지배계급의 계몽주의적 각성에도 아랑곳 하지 않았습니다. 혁명의 실패 이후 구체제에 대한 회귀와 귀족 계급의 특권, 단순한 경제자산적 차이 뿐만 아니라 교육과 사회진출이라는 측면에서도 동일했습니다. 사실 저는 엘리트 정치와 기득권 정치는 엄밀하게 구분해야된다는 입장인데요. 마찬가지로 오펜하이머의 말대로 절대주의와 전제정치는 엄격한 구분법이 필요하고, 앞서 언급한 부분과 관련해서도 여기에 소개된 계급 이해적 산물인 계급사법 즉, 상위 계층에게 휘둘려지는 법의 칼날은 하위 계층에게 향하는 것이 상이하게 적용된 것은 과연 어떠했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습니다. 또한 이 ‘계급사법’이 유감스럽지만 현재에도 법치주의적 기반으로 탄생된 수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에게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국가와 역사적 연대기적 서술을 마무리하면서 오펜하이머는 근대 이후 비로소 과거의 자본주의적 노예 상태가 종식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제 국가의 의미와 본질과 관련해서 단순한 야경 국가로 한정시키고자 하는 이들과 더불어 단순하게 개인의 안전 국가로 축소되고 있는 경향의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 즉 시민의 환경이 전후를 거쳐나가기 바로 이전 시기를 살았던 사회학자인 저자에게 다소 생경한 모습이 되지 않았을까 고민해봅니다. 그는 국가를 통해 인간 자유의 점진적 보장을 원했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 자유의 보장이 자본주의적 이해관계와 결합하여 다소 복잡한 국가의 모습에 의해 시민들의 삶 전반이 변화게 된 것을 그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몹시 궁금하기도 합니다. 맨처음 이 글에서 제가 언급한 그의 ‘중간계급’의 혁명으로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기를 바란 것이 우리에게 실현되었는지는 곰곰히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끝으로 역자인 이상률씨의 번역은 이 자리에서 따로 언급하고 싶을 정도로 매우 뛰어나다고 생각하는데요. 심지어 역자의 팬이 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겨날 정도네요. 열일하시는 번역가에게 자리를 빌어 감사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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