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파이언스 - Defianc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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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스포일러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유대인이라고 하면 자동적으로 홀로코스트가 떠오른다. 미국 등으로 도망치지 못해 남은 유대인들이 갈 수밖에 없었던 곳. 영화에서 보든, 기록화면에서 보든 홀로코스트에 끌려가는 유대인들은 마치 자신들이 어디 가는지 알고 있었던 듯 초췌하고 공포에 질려 있었다. 단 몇년만에 600만이 학살당한 역사의 주인공들은 너무나 약해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유대인 유격대'라는 것이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더 신선하고 놀라웠다. 넓디 넓은 동유럽의 숲속에서 몇 년간을 독일군을 피해 생존하며 무력을 기반으로 살아 남았던 사람들. 강대국의 일방적인 학살 속에서 적극적으로 삶을 모색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 반가워서 이 영화를 보기로 했었는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실화라고 하는데, 주인공은 세 형제이다. 2차 세계대전 즈음 그루지야의 작은 마을에도 독일군들과 그들의 앞잡이는 쳐들어오고, 우연히 그들과 마주침을 피한 두 형제는 몰래 집으로 가지만 이미 부모님은 독일군들에게 살해당한 후였다. 작은 마을이고 누가 어디 사는지 빤히 아는 만큼 살아남은 형제들의 목숨도 위태롭기는 마찬가지. 이때 결혼 후 멀리 가 있었던 큰 형이 돌아오고, 이들은 근처 숲으로 도망가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숲에서 며칠간 지낸 형제는 곳곳에 숨어있던 유대인들을 만나게 되고, 점차 도망자의 집단은 커지게 된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살아남으려면 형제들끼리만 움직이는 것이 유리하다. 숨어있던 유대인들중 상당수는 노인과 여자, 어린아이들이었다. 이들이 합세하자 식량과 무기도 부족하고 눈에 잘 띄게 되었다. 둘째 주스는 이들과 떨어져 자기들끼리만 지내자고 하지만 큰 형 투비아는 특이한 선택을 한다. 이들과 모두 함께 지내기로 하고, 도망쳐온 유대인을 계속 받으며, 나아가서는 도시에서 쫒기고 있는 이들까지 구출하기로 한 것이다. 둘째 주스는 당연히 반발하고, 집단이 커지면 커질수록 형제간의 갈등도 극에 달한다. 결국 주스와 그에 동조하던 일부 청년들은 독일과 전쟁을 하고 있던 러시아군에 합세해 버리고 투비아는 남은 대다수의 유대인들과 일종의 공동체를 꾸려 나간다. 

누가 옳았던 것일까? 영화 '미션'에서도 그랬지만 신념이나 목숨이 달린 상황에서의 양자택일은 옳고그름을 가릴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둘째 주스는 러시아군과 함께 독일군을 몰아내는 것이 우선이라고 여겼고, 첫째 투비아는 동족들과 함께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라고 여겼다. 둘 중 누가 옳았는지는 가릴 수 없지만 투비아의 선택으로 인해 그들의 생존기는 역사가 되었다. 비전투원이라 쓸모없다고 여겨졌던 노인과 여자들 가운데에는 시계공으로써 무기를 고칠 수 있는 사람도 있었고, 간호사도 있었으며, 독일어를 할 수 있어서 결정적인 도움이 됐던 사람도 있었다. 사람이 생존하는데 필요한 것이 꼭 무력은 아니며, 개인들의 합은 전체 이상의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그들 공동체는 보여줬다. 

물론 생존은 너무나 힘들었다. 동유럽의 겨울은 너무나 길고 추웠으며, 먹을 것을 구경못하는 날이 많아짐에 따라 투비아를 비난하거나 그의 노선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이 생겼다. 자기의 안전보다는 동족과의 생존을 택한 그의 선택을 일관되게 지지해준 사람은 별로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적은 그들이 보내야 했던 몇 번의 겨울, 그리고 독일군의 총공세였다. 기껏해야 소총 정도의 무기가 전부였던 그들에게 독일군의 공습과 탱크, 기관총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독일군들이 숲 속에 있는 그들을 일망타진하기로 결정한 날은 공교롭게도 유월절이었고, 최대의 시련을 예고하는 날이었다.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은 도망치고,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은 빈약한 무기로 도망친 이들이 최대한 멀리 갈 수 있도록 엄호해야 하는 무모한 전투. 이런 전투의 형태는 약자의 항쟁에서 많이 보던 장면이다.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에서도 몇 번이나 봐왔던 장면. 하지만 보고 또 봐도 눈물이 날 수밖에 없는...   

그들의 희생은 무척이나 컸고, 그들의 시련이 그 총공세가 마지막이었던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그들 일부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기까지의 두 세번의 겨울을 지내면서 집단의 무리는 계속 커져 종전 무렵에는 1200명에 육박했다고 하며, 살아남은 사람들 중 대다수는 많은 후손을 남기고 천수를 누렸다고 한다.  

놀라운 이야기이다. 전쟁 영화나 소설을 보기 싫은 가장 큰 이유는 너무나 쉽게 죽어가는 인간을 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인간의 목숨이 너무나 하찮게 없어지는 것을 볼 때마다 나 또한 얼마나 하찮을 수 있는 존재인지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죽을 수도 있지만, 생존하는 인간만큼 강한 존재는 없다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 준다. 절대 포기하지 말 것. 미사일이나 총알이 널 죽일 수는 있지만 포기하지 않는 인간은 때때로 기적을 만든다는 것. 언뜻 어리석어 보였던 투비아의 선택은 결국 많은 사람들을 구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투비아를 잊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에서 전투 중에 죽은 유대인을 묻으며 랍비가 하는 얘기가 있다. "이제 다른 민족을 선택하소서. 저희는 이제 더이상 흘릴 피도 없나이다. 선택받은 선민의 운명이 너무나 가혹합니다" 대강 이런 거였던 것 같은데, "유대인이 잘하는 게 뭔지 알아? 죽는거야"라는 말도 있었던 것 같다. 죄송스런 얘기지만, 고통 혹은 고통의 기억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들기보다는 이기적으로 만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유대인의 수난의 역사가 그들을 이기적으로 만든 것 같아 안타깝다. 더 이상 내가 고통스럽지 않기 위해 타인(팔레스타인)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인가. 마이너리티로서의 경험도, 그것이 나 외의 다른 마이너리티에 대한 공감과 연대로 승화되지 않는다면 기득권자의 라이프스타일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유대인의 역사는 보여준다. 극단적인 형태로. 그래서 투비아의 선택이 더욱 빛나는지도 모른다. 살아남기도 어렵지만, 옳은 방법으로 살아남기는 더욱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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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마리아 유디나의 유산 7집 - 베토벤 : 피아노 협주곡 4 & 5번'황제'
Vista Vera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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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리아 유디나는 20세기 초에 러시아에서 태어나 공산주의 소련에서 젊은 시절부터 평생을 산 피아니스트이다. 호로비츠를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이 망명을 해 자신의 예술을 세계에 알린 것에 비해 폐쇄적인 사회의 예술가로 평생을 살았다. 하지만 그녀의 음악은 서방의 어느 예술가에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 스탈린이 사랑한 피아니스트라는 닉네임도 그녀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던 듯 스탈린의 총애를 '신을 믿고 회개하라'는 답장으로 화답한 강철의 여인이기도 하다. 공산주의 하에서 끝까지 신앙을 지켰고 가난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동료들을 돕는데 주저하지 않았다고 한다. 마리아 유디나는 망명을 한 예술가들 못지 않게 굳건히 자기 세계를 지켰던 사람이고, 공산주의 하에서는 진정한 예술가가 있을 수 없다는 편견을 명쾌하게 깨버리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마리아 유디나의 피아노 연주는 선명하고 힘차다. 여성 피아니스트에게 선명한 음색을 가졌다고 하면 힘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 같지만 선명한 음색을 내는데 힘이 없으면 불가능할 것이다. 음 하나가 또렷또렷하게 들리기로 유명한 굴다의 연주도 마리아 유디나에 비하면 탁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굴다에게는 실례지만. 개인적으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5번만 비교하자면 굴다보다 마리아 유디나의 연주가 훨씬 좋다. 5번 '황제' 2악장의 아다지오 부분의 연주는 너무 아름다워서 가슴이 저릿저릿할 정도이다. 임팩트가 강한 베토벤 음악중에서 너무나 조용한 부분이라 연주자에 따라서는 밋밋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마리아 유디나의 연주로 인해 가장 아름다운 선율이 됐다. 베토벤 음악의 백미는 꽈꽝꽝꽝 하는 터프한 부분보다 서정적인 부분의 아름다움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써 유디나의 연주는 그 자체로 최고의 선물이다.  

오케스트라와의 호흡도 더 바랄 수 없을 정도이다. 협주란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환상의 호흡을 들려준다. 1948년 실황 녹음이라 요즘 음질에 비할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 고졸한 느낌이 드는 것을 즐길 수도 있겠다. 좀 더 선명한 녹음 버젼으로 들으면 감동도 배가 되겠지 하고 굴다의 연주를 샀는데 한번 듣고는 다시 마리아 유디나의 베토벤으로 돌아왔다. 역시 녹음기술보다는 연주자의 기량, 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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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포레스트 1 세미콜론 코믹스
이가라시 다이스케 지음, 김희정 옮김 / 세미콜론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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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표지를 다시 살피니 어엿히 치마도 입고 있는데 왜 주인공을 소년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소년인줄 알았는데 소녀였던 주인공 외에도 예상외였던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투박한 그림체였다. 펜의 질감이 그대로 살아있는 듯한 그림체. 고로 이것은 짧은 머리의 소녀와 투박한 펜그림이 그려내는 전원 식생활의 모든 것을 다룬 만화다. 

요즘은 아무리 시골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야생과 전원의 결정체인 곳은 없을 것 같은데, 이런 나의 의심을 불식시키듯 이 만화의 배경은 커다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마을인 '토호쿠'라는 곳이라고 한다. 그래, 커다란 산으로 둘러싸인 산간마을이라면 주위에 나무와 숲밖에 없을 수도 있지, 라고 재빨리 수긍해버렸다. 가까운 곳에 슈퍼도 없고, 이웃도 그리 많지 않은 곳. 

시골집에서 혼자 살고 있는 소녀는 그러나 앳된 얼굴과는 달리 몇 년 전에는 큰 마을로 나가 남자와 함께 산 경험도 있는 나름대로 산전수전을 겪은 처자다. 지금은 다시 낙향해서 혼자 농사짓고 부업하며 살고 있는 상태. 이 처자의 생활은 엥겔 계수가 거의 100%인 듯, 생활의 모든 것은 먹는 것에 맞춰져 있다. 그렇다고 음식에 어마어마한 의미를 부여하는 다른 만화처럼 어떤 음식을 먹고 잃었던 기억이 돌아온다거나 챔피언 벨트를 딴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달인의 솜씨로 무 하나로 천상의 음식을 요리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먹는다. 주위에 있는 것들을 살뜰히 이용해서 이 음식도 해보고 저 음식도 해보고, 전통요리도 해보고 서양요리도 해보고 나름의 퓨전요리도 해본다. 하나하나 깨끗하고 맛깔스럽고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음식생활. 

좀 고적해 보이기는 하지만 하루하루가 꿀벌처럼 바빠서 외로워할 틈도 없을 듯. 젊디 젊은 처자가 혼자 사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데 그것까지 밝히면 이 만화의 묘미가 떨어질 듯 하다. 먹는 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사람의 전원생활을 다루고는 있지만 본인도 모르는 인생의 미스테리가 왠지 모를 긴장감을 주기도 한다. 조만간 새식구가 생길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일본인이라면 여기 나오는 음식이 무슨 맛인지 더 잘 알테니 그대로 만들어보고 싶은 욕구가 솟구칠 테지만, 그렇지 않아도 만화를 보면 떠오르는 나만의 요리들이 있다. 비록 전원생활의 호사와 고생은 못누리지만 겨울 밤에 해먹는 따듯한 음식의 맛은 누구에게나 같은 터. 우선은 몇 달 전에 담가둔 고들빼기 김치와 어울리는 요리로 시작해볼까. 침만 흘리고 같이 즐길 엄두가 나지 않은 다른 요리만화와는 달리 나도 한 번 해볼까 하는 의욕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이 만화의 미덕이다. 소박하나 풍요롭고 부지런한 식생활. 이렇게 사는 것도 정말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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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 1 밀리언셀러 클럽 64
기리노 나쓰오 지음 / 황금가지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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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쓰이는 책들이 있다. 그 존재를 알고 있지만 오랫동안 읽지 않는 책. 읽기를 망설이지만 무시하지는 못하는, 그래서 결국은 읽고 마는 책들 말이다. 개인적으로 영화예고에 이상한 음악이나 어두침침한 화면만 나와도 외면하는 호러 기피증이 있는 나는, 아무리 잘 된 작품이라 하더라도 선혈이 낭자한 폭력물이나 호러물은 보지 못한다. 이 책의 존재를 몇 년 동안 알고 있었지만 읽지 못했던 것은 '어둡고 잔인하며 삭막하기까지 하다'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하지만 끝내 호기심이 이겼던 것은 그나마 제일 무서운 귀신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랄까. 결국 추울 때 보다는 더울 때 읽는 것이 덜 무서울 것 같아 겨울이 오기 전에 읽어야지, 라는 다소 바보스런 이유로 이 책을 읽고 말았다.

초반부에 나오는 도시락 공장은 반가웠다. 방학 동안 화장품 공장에서 일했던 경험때문에 공장의 풍경이나 일하는 모습이 너무나 친숙했기 때문이다. 공장에 도착했을 때의 살풍경한 추위, 들어가기가 망설여지는 마음,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휴게실에서 잠시 숨을 돌리는 시간, 팽팽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 화장실조차 가지 못하는 작업량 등등.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얼마 되지 않는 내 알바 이력 중에 가장 힘든 기억을 떠올려주었기 때문일까. 나는 네 여자의 이야기에 쭈욱 빨려들 수 있었다.

네 여자는 각기 성격도 외모도 다르지만 많이 배우지 못했고 속썩이는 집안 식구가 있다는 공통점 때문에 지겹고 피로한 공장 일을 계속해 나간다. 하지만 그 중 젊은 주부였던 야요이가 남편을 우발적으로 살해하면서 지겹고 피로한 그들의 삶에 범죄까지 끼어들게 된다. 야요이가 남편을 죽인 이유는 남편이 도박과 여자에 빠져 거액의 적금까지 털어먹은 데다가 끊임없이 그녀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누구나 그녀의 살의에 공감할 수 있지만, 살인을 저지른 야요이의 범죄를 감춰주기로 한 마사코의 행동은 언뜻 이해불가이다. 무뚝뚝하고 강한 마사코가 야요이 남편의 시체를 '해체'하여 범죄를 은닉하기로 결심한 순간, 이 책은 제대로 하드보일드의 경지를 보여준다.

여기에 풍을 맞아 누워 있는 시어머니를 혼자 모시면서 딸을 키우느라 허리가 휘는 요시에가 야요이가 줄 보상금에 혹해 시체 해체에 가담하고, 사채에 쫒겨 돈이 필요한 구니코가 우연히 찾아왔다가 그 일에 가담하면서 시체처리라는 하드보일드에 각기 이해관계가 다른 네 여자의 성격 하드보일드까지 더해지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들이 처리하는 시체가 이것으로 그치지 않으며, 자기 안에 괴물을 봉인한 남자까지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피와 살점이 튀기는 공포스러운 소설에 불과한 것인가 하면 그것만은 아니다. 사회파 추리소설로 분류될 만큼 이 책에는 일본 사회의 모습이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것도 일본사회가 꾸준히 무시해왔던 계급문제가 정면에 드러나 있다. 네 여자는 모두 계급적 낙인이 찍힌 인물이며 그 계급은 실패자라고 불리는, 옛스러운 표현으로 하자면 '하류층'이란 것이다. 절실하게 돈이 필요해서 적금을 털어먹은 남편을 용서할 수 없었고, 절실하게 돈이 필요해서 시체 처리를 도왔으며, 배신했다. 너무나 리얼하지 않은가. 평화와 안정이라고는 바닥에 떨어진 돈만큼이나 찾기 어려워진 우리 사회에 너무나도 어울리는 책이 아닌가 싶었다.

나는 잔인한 하드보일드를 싫어한다. 하지만 인간과 사회가 싫어질 때면, 혹은 인간과 사회가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나 빠져나오지 못할 함정으로 느껴질 때면 '끝'을 보고 싶은 욕구가 문득 생기기도 한다. 잔인한 행동을 해서라도 벽과 함정을 부숴버리는 인간을 보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것이다. '아웃'은 자신을 옥죄는 모든 한계와 환경에 무도덕의 행동으로 맞서서 끝내 살아남는 인간의 이야기이다. 이거야말로 제대로 하드보일드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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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구름
하야시 후미코 지음, 이상복.최은경 옮김 / 어문학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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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너와 나, 두 명의 사사로운 인간이 하는 것이지만 둘의 사랑이 시대의 분위기랄까 풍조를 반영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면 춘향이와 이도령의 사랑, 사르트르와 보부와르의 사랑처럼.

고다 유키코와 도미오카의 사랑은 철저히 시대와, 그리고 그들이 머물렀던 땅과 함께 한다.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되는대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고 보면, 상당히 이상한 일이기도 하다.

유키코는 자신을 오랫동안 겁탈해 온 친척을 피해 타이피스트로 취직하여 인도차이나에 파견된다. (때는 일본이 한창 전쟁을 치르던 1940년대였다) 일신을 걱정해 줄 변변한 가족도 없고, 유키코 자신이 쓰라리게 애석해 했듯이 미모도 아니어서 누구 하나 거들떠 보지 않을 것 같은 여자다. 하지만 인도차이나는 그녀에게 마법을 걸었다. 야생적인 땅에서 그녀는 젋은 매력을 뽐내기 시작했고, 깊은 숲 속에서 근무하고 있던 농림성 관리인 두 남자는 유키코에게 빠지게 된다. 두 남자 중 하나가 유키코와 마지막까지 질긴 사랑을 하게 되는 도미오카다.

이과를 전공한 이 특유의 샤프한 지성과 남자다운 날렵함을 지닌 도미오카는 한편으로는 너무나 평범한 남자였다. 말하자면, 바람 피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미 일본에 아내가 있었으며 유키코와 연애를 할 때에도 베트남인 하녀와 관계를 가지기를 사양하지 않았다. 유키코로 말하자면 그녀 또한 두 남자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아슬아슬한 관계를 이어나갔다. 재미있는 것은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의 외도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도차이나의 꿈결같은 연애기간도 끝나고, 패전한 일본의 운명대로 그들 또한 빈털털이로 빈궁한 조국에 돌아가게 된다. 관리를 그만둔 도미오카와 타이피스트를 그만둔 유키코는 그 후 한참을 물질의 빈곤과 영혼의 빈곤에 허덕거리며 가난한 연애를 이어나간다. (여전히 둘 다 바람은 피우고 있다)

유키코가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대로, 인도차이나의 풍요로운 자연과 안락함은 두 사람의 사랑도 풍요롭고 안락하게 만들었었다. 하지만 패전 후 일본에서의 사랑은 춥고, 배고프고, 원망하는 것의 연속이었다. 그들 자신은 조국에 관심도 없건만 너무나 정직하게 조국의 풍경을 대변한다. 가족이 없거나 혹은 가족을 버리고 떠돌아 다니는 부표들의 사랑도 이렇게 시대에 얽매이는 것인가 생각하면 개인의 힘없음이 처량해진다. 모든 상황이 냄비 바닥처럼 졸아붙고 사람들의 마음은 개미처럼 작아지는 상황에서 두 사람 모두 인도차이나의 광활한 자연과 넘치던 과실나무들을 그리워하지만 조국이 사람들을 다른 나라로 파견하던 시기는 이미 지나버렸다. 이들 연애담의 엔딩이 빽빽한 나무로 가득 찬 일본 열도 끝의 작은 섬이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마치 인도차이나의 이미테이션같은, 섬나라인 조국에서도 가장 외지고 작은 섬에서의 마지막.

작가 하야시 후미코는 그녀의 대담하기 짝이 없는 데뷔작 '방랑기'를 통해 알게 되었다. 자전적 일기문학인 '방랑기'에서 하도 소설에는 자신이 없다고 해서 진짜인줄 알았는데 그 후로 갈고 닦았는지 소설도 무지막지하게 잘 쓴다. 나약하고 좀스럽기까지 한 두 주인공의 연애담을 끝까지 읽고 감명받은 것은 전적으로 그녀의 묘사 때문일 것이다. 거의 모든 작품이 일본 영화계의 거장인 나루세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되었다고 하는데, 과연 읽고 있으면 유키코와 도미오카가 떠돌아 다녔던 곳의 풍경과 여관, 셋방들이 눈앞에 떠오르는 듯하다. 하야시 후미코의 다른 작품들도 번역되기를! (이왕이면 순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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