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웃 1 ㅣ 밀리언셀러 클럽 64
기리노 나쓰오 지음 / 황금가지 / 2007년 5월
평점 :
신경쓰이는 책들이 있다. 그 존재를 알고 있지만 오랫동안 읽지 않는 책. 읽기를 망설이지만 무시하지는 못하는, 그래서 결국은 읽고 마는 책들 말이다. 개인적으로 영화예고에 이상한 음악이나 어두침침한 화면만 나와도 외면하는 호러 기피증이 있는 나는, 아무리 잘 된 작품이라 하더라도 선혈이 낭자한 폭력물이나 호러물은 보지 못한다. 이 책의 존재를 몇 년 동안 알고 있었지만 읽지 못했던 것은 '어둡고 잔인하며 삭막하기까지 하다'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하지만 끝내 호기심이 이겼던 것은 그나마 제일 무서운 귀신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랄까. 결국 추울 때 보다는 더울 때 읽는 것이 덜 무서울 것 같아 겨울이 오기 전에 읽어야지, 라는 다소 바보스런 이유로 이 책을 읽고 말았다.
초반부에 나오는 도시락 공장은 반가웠다. 방학 동안 화장품 공장에서 일했던 경험때문에 공장의 풍경이나 일하는 모습이 너무나 친숙했기 때문이다. 공장에 도착했을 때의 살풍경한 추위, 들어가기가 망설여지는 마음,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휴게실에서 잠시 숨을 돌리는 시간, 팽팽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 화장실조차 가지 못하는 작업량 등등.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얼마 되지 않는 내 알바 이력 중에 가장 힘든 기억을 떠올려주었기 때문일까. 나는 네 여자의 이야기에 쭈욱 빨려들 수 있었다.
네 여자는 각기 성격도 외모도 다르지만 많이 배우지 못했고 속썩이는 집안 식구가 있다는 공통점 때문에 지겹고 피로한 공장 일을 계속해 나간다. 하지만 그 중 젊은 주부였던 야요이가 남편을 우발적으로 살해하면서 지겹고 피로한 그들의 삶에 범죄까지 끼어들게 된다. 야요이가 남편을 죽인 이유는 남편이 도박과 여자에 빠져 거액의 적금까지 털어먹은 데다가 끊임없이 그녀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누구나 그녀의 살의에 공감할 수 있지만, 살인을 저지른 야요이의 범죄를 감춰주기로 한 마사코의 행동은 언뜻 이해불가이다. 무뚝뚝하고 강한 마사코가 야요이 남편의 시체를 '해체'하여 범죄를 은닉하기로 결심한 순간, 이 책은 제대로 하드보일드의 경지를 보여준다.
여기에 풍을 맞아 누워 있는 시어머니를 혼자 모시면서 딸을 키우느라 허리가 휘는 요시에가 야요이가 줄 보상금에 혹해 시체 해체에 가담하고, 사채에 쫒겨 돈이 필요한 구니코가 우연히 찾아왔다가 그 일에 가담하면서 시체처리라는 하드보일드에 각기 이해관계가 다른 네 여자의 성격 하드보일드까지 더해지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들이 처리하는 시체가 이것으로 그치지 않으며, 자기 안에 괴물을 봉인한 남자까지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피와 살점이 튀기는 공포스러운 소설에 불과한 것인가 하면 그것만은 아니다. 사회파 추리소설로 분류될 만큼 이 책에는 일본 사회의 모습이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것도 일본사회가 꾸준히 무시해왔던 계급문제가 정면에 드러나 있다. 네 여자는 모두 계급적 낙인이 찍힌 인물이며 그 계급은 실패자라고 불리는, 옛스러운 표현으로 하자면 '하류층'이란 것이다. 절실하게 돈이 필요해서 적금을 털어먹은 남편을 용서할 수 없었고, 절실하게 돈이 필요해서 시체 처리를 도왔으며, 배신했다. 너무나 리얼하지 않은가. 평화와 안정이라고는 바닥에 떨어진 돈만큼이나 찾기 어려워진 우리 사회에 너무나도 어울리는 책이 아닌가 싶었다.
나는 잔인한 하드보일드를 싫어한다. 하지만 인간과 사회가 싫어질 때면, 혹은 인간과 사회가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나 빠져나오지 못할 함정으로 느껴질 때면 '끝'을 보고 싶은 욕구가 문득 생기기도 한다. 잔인한 행동을 해서라도 벽과 함정을 부숴버리는 인간을 보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것이다. '아웃'은 자신을 옥죄는 모든 한계와 환경에 무도덕의 행동으로 맞서서 끝내 살아남는 인간의 이야기이다. 이거야말로 제대로 하드보일드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