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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 시장 상품 인간을 거부하고 쓸모 있는 실업을 할 권리
이반 일리치 지음, 허택 옮김 / 느린걸음 / 2014년 9월
평점 :
사는 동안 때때로 숨이 막힌다. 아이들도 청년들도 장년, 노년들도 똑같이 숨막히는데, 우리는 그 이유를 대부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태어났을 때부터 요구받는 것은 점점 많아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이 되었을 때 어엿하게 한몫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데다가, 안정적인 노년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인간은 쓸모 없어지고 일자리는 없어지며 돈을 벌어도 만족하기가 어려워졌는가.
이러한 물음에 가장 깊이, 그래서 가장 급진적으로 파고든 사상가 중 한명이 이반 일리치가 아닌가 한다. 그는 말한다. 현대에 가난한 자와 부자가 불행한 이유는 같다. "남아메리카 인디언의 배고픔이나 서유럽 노동자의 우울증, 동유럽 관료의 냉소적인 부패의 이면에 놓여있는 현대의 쓰라린 타락은 모두 같은 것"이다. 그것은 임계점을 넘어버린 산업자본주의, 상품에 대한 의존, 전문가에게 모든 권리를 양도해버린 삶 때문이다.
생산의 한계량을 정하지 못한 자본주의는 끝임없이 상품을 생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필요한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데 성공했다. 우리는 단 하루도 상품에 의존하지 않고는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고, 돈은 벌어도 벌어도 부족하고 불안하다. 상품의 부족은 생활의 불편함과 욕망의 좌절 등 모든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자본주의의 필요가 낳은 유형적인 영역이 상품이라면, 무형적인 영역은 전문가란 부류가 차지했다. 우리는 태어날때 의사의 도움 혹은 허락하에 태어나야 하며, 자랄때는 교사의 도움을, 죽을 때는 장의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 도움은, 전문성을 가장한 침탈이다. 우리가 역사이래로 스스로, 혹은 주변의 도움만으로 해왔던 모든 일을 자격증을 가진 소수의 사람에게 양도함으로써 삶에 대한 권리 자체를 넘겨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력하고, 불행하게 되었다.
보통 사람은 자기의 시대를, 자기의 환경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그래서 과거를 보면 왜 저렇게 어리석었나 싶은데 현대도 사실은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세에는 교회밖에서 구원이란 있을 수 없었다. 그와 비슷하게 현대사회에서는 직장밖에서 사장의 명령없이 이루어지는 노력은 생산적인 수 없다." 자본과 국가의 필요에 들어오지 않는 실업(전업주부도 여기에 포함)이 왜 무가치하고 무력한 것으로 낙인찍혔나를 분석하면서 한 말이다.
내가 때때로 무가치하고 무력하게 느껴졌다면, 매일 매주 마트에 가서 무언가를 사야만 하는 행위가 두려웠던 적이 있다면, 병원이나 학교가 미심쩍은 존재로 보인 적이 있다면 이반 일리치의 생각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따듯한 조언도.
"우리는 고통을 겪습니다. 우리는 아픕니다. 우리는 죽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희망과 웃음, 축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보살피는 기쁨을 알고 있습니다. 건강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선과 생각을 들어올려 삶의 기술과 고통의 기술, 죽음의 기술을 키워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