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 ㅣ 창비신서 143
노마 필드 지음, 박이엽 옮김 / 창비 / 199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1988년. 대아시아전쟁을 치룰 때는 군사적 지도자이자 국민이 목숨을 바칠 숭배의 대상으로, 패전 후에는 전쟁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던 고귀한 희생양이자 평화를 사랑하는 국민의 상징적 존재로 존재했던 천황 히로히토가 죽어가고 있었다. 20세기도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고, 일본의 번영은 정점에 다다라 있던 때였다. 그리고 히로히토의 병세 악화와 경제적 번영은 서로 시너지 효과를 이뤄 애국의 열기 또한 정점으로 치솟게 했다.
하지만 모두가 이 열기에 동참했던 것은 아니다. 국상을 이유로 모두가 자숙하는 분위기에서도 개인적, 사회적 이유로 일본의 국수주의에 반기를 든 인물들이 있었고, 여기서는 그 중 세 명을 다루고 있다. 슈퍼집 주인과 가정주부, 그리고 나가사끼의 시장. 역사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에 가까운 이들이 왜 개인의 자유와 신념을 위해 일본사회와 대항해 싸웠는지, 그리고 왜 그 과정이 보여줄 가치가 있는지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것이다.
간단한 소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일본사회에서 아웃사이더였다. 맨 처음 소개되는 슈퍼마켓 주인 쇼오이찌는 오끼나와 사람이다. 오끼나와가 일본에 병합된 것은 최근의 일로, 역사적으로 오끼나와와 일본은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이국이었다. 병합된 후에도 한결같이 일본의 서자 취급을 받았던 오끼나와는 전쟁 막바지에는 히로히토의 욕심으로 전투지가 되어야 했고, 전쟁 후에는 미군기지로 그 땅을 내줘야 했다. 일관되게 차별받는 동시에 오끼나와의 일본화라는 정책도 계속 추진되어서 학교에 일장기를 게양하고 키미가요를 부르게 하는 명령이 하달되곤 했다. 그리고 이에 항의하는 의사표시로 쇼오이찌는 게양대에 걸린 일장기를 끌어내려 불을 붙이게 된다.
두 번째로 소개되는 나까야 부인은 자위대원을 남편으로 둔 미망인이다. 남편은 근무 중 사망해 구국영령으로 야스꾸니 신사에 봉헌되었다. 대부분의 일본인이 명예라고 여기는 일이었지만 나까야 부인은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의 원칙을 들어 이에 반대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하게 된다. 일본사회에서 1%에 지나지 않는 크리스쳔으로써 종교의 자유를 요구했고, 사회란 이래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국가에 정교분리를 요구했다. 그러나 거의 15년을 끌었던 이 소송은 나까야 부인의 패소로 끝나고, 그녀의 남편은 영원히 야스꾸니에 잠들게 되었다.
마지막 인물인 모또시마는 나가사끼의 시장이며, 그 역시 크리스쳔이었다. 유명한 사실대로 나가사끼는 근대에는 일본의 대표적인 기독교도 순교지였고, 2차 세계대전 때는 두 번째로 원폭이 투하된 곳이며, 두 번째였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히로시마의 유명세에 가려져 있는 곳이다. 모또시마는 전쟁 때 교관으로써 젊은 군인들을 사지에 나가도록 독려했고, 이 경험은 그에게 전쟁에 대해 평생의 반성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히로히토의 병세가 나날이 악화되는 와중 한 기자회견에서 천황에게도 전쟁책임이 있다는 발언을 한다. 한국인인 내가 보기에는 상당히 온건한 축에 속하는 내용이었지만 그의 말은 곧 일본 전역으로 퍼져 우익들의 집단 공격을 받게 된다. '공격'이란 말이 실감나는 것이, 후에 그는 우익들의 저격을 받아 폐에 총알이 관통하는 부상까지 입기 때문이다.
이들의 투쟁은 외롭고 위험했다. 생명의 위협이란 말이 진담으로 여겨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용기에 대한 대가였는지 일본 곳곳에 숨겨져 있던 동조자들이 수면 위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도 세 사람처럼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쇼오이찌와 나까야 부인의 재판에 항상 따라다니며 동참했고, 모또시마 시장에게 수많은 편지를 보내고, 그 편지들을 편집해 책으로 냈다. 생각은 있었으나 용기는 없었던 사람들이 그들이 못한 행동을 한 세 사람을 중심으로 뭉치게 된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이 책의 저자인 노마 필드 또한 그런 움직임이 한시적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되기를 바란다. 일본계 미국인인 그녀는 두 개의 조국에 속한 사람이 자주 그렇듯 두 나라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각의 소유자였다. 노마 필드는 프롤로그에도 소개되는 외할머니, 어머니, 이모들의 나라인 일본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 애정은 일본의 과오까지 정확히 알고 비판할 때에만 정당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것이 적어도 '애국심'을 입에 담기 전에 가져야 할 상식이며, 세 사람과 그의 친구들이 말하고 싶었던 것이었을 것이다. 이 상식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에 이들이 용기를 잃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