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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12월
평점 :
절판
대하소설을 보면 마을 사람들 중에 꼭 이야기꾼 한 명씩은 끼어있다. 그 이야기꾼은 초가지붕 아래의 어두컴컴한 불빛 아래 둘러앉은 사람들에게 '썰'을 풀곤 하는데 주제는 위인전, 전설, 음담패설, 연애이야기까지 무궁구진했다. 내용이 어쨌든간에 그 이야기꾼이 사람들을 사로잡는 힘은 구성진 '말빨'이었다. 나중에 그의 말이 '구라'라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예끼!"하며 너털웃음 섞인 핀잔을 할지언정 화는 나지 않는 것. 그런 이야기꾼에 전통이 있고 핏줄이 있다면 성석제는 촉망받는 적자에 해당될 것이다.
그런 이야기들은 재미있는 대신 다소 현실성이 없다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지다 보니까 리얼리티 정도는 희생하게 되는 것. '순정' 또한 그런 운명을 타고났다. 주인공인 이치도는 천하제일의 솜씨를 갖고 있는 도둑이다. 솜씨 외에도 이치도가 최고의 도둑으로 꼽히는 이유는 도둑질을 하되 폭력은 절대 수반하지 않는 매너, 어쩔 수 없이 하는 범죄가 아니라 스스로가 너무 즐거워하며 도둑질을 인생의 보람으로 삼고 있는 것을 천명하는 당당한 소신, 훔치는 즐거움과 생계의 해결이라는 명백한 목적을 내걸고 있는 솔직함등을 들 수 있다. 그는 도둑질에 순정을 바치고 있다.
이치도가 순정을 바치고 있는 또 하나의 대상은 같은 마을에 살던 소녀인 왕두련이다. 그녀는 일명 째보라 불리던 언청이였으나 수술에 성공해 공부 잘하고 아름다운 여학생으로 거듭난 움막집 소녀이다. 여간해서 오만함을 버리지 않는 왕두련이지만 각고의 노력과 '지저분한' 수단을 동원해 공부를 잘 하게 된 이치도를 친구로 인정하며 오랫동안 하교길의 낭만을 함께하는 듯했으나 갑자기 잠적, 마을 사람들의 촌스러움을 견디지 못해 큰 도시로 유학갔다는 소식만 남겨 이치도의 순정과 집념에 불을 지른다.
허나 이 이야기에서 이치도와 왕두련만 중심인물인 것은 아니다. 이치도의 부모인 춘매와 봉달, 이치도의 대부이자 이치도에게 도둑의 도를 가르친 왕두련의 아버지인 왕확, 이치도의 친구인 억제, 농부출신인 은척 제일의 깡패 피눈물 등등 너무나 다양하고 생생한 인간들이 가득하다. 이 많은 인물들이 한 권의 소설 속에서 자기만의 든든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가벼움에도 불구하고 성석제의 소설을 무시할 수 없게 만드는 힘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가볍다는 것은 역시 무시하지 못할 약점이다. 독자란 까다롭기 때문인지 무책임하기 때문인지 재미나 이렇다할 매력 한톨 없이 무겁기만 한 소설도 싫어하지만 너무 재미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운이 없는 소설도 우습게 본다. 성석제 소설의 경우 현실과 완전히 유리된 픽션의 세계가 아니라 한국의 50년대에서 80년대의 어지러운 시대라는 명백한 무대가 있고, 그 시대 안에서 질척하게 부대끼며 '생활'하는 인물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비판이 괜한 트집은 아니라고 본다. 나중에 대통령의 사촌 눈에까지 들어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도둑질을 하는 이치도, 도시로 상경해 천주교 신부의 총애를 받으며 유학을 꿈꾸었으나 타락해 버리는 왕두련, 일본에 반출됐던 유물들을 훔쳐 돌아와 영웅이 되는 왕확 등등 소설이 풀어내는 이야기와 그 시대에 대한 풍자는 떼어낼 수 없는 한 몸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그 풍자가 결정적인 힘을 분출하지 못하는 건 유감일 수밖에 없다. 낄낄 웃게는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랄까.
전통적인 이야기들은 뚜렷한 선악구도나 선한 주인공의 위기와 그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청자나 독자의 카타르시스를 자극했다. 만약 이 소설도 그런 구도를 따랐다면 손쉽게, 성석제 정도의 솜씨라면 아주 손쉽게 그 목적을 이루었을 것이다. 하지만 '순정'에는 뚜렷한 선인도 악인도 없다. 도둑놈에다 사기꾼이지만 능글맞게 다른 사람을 밟아버리는 현대인의 악과는 거리가 먼 이치도부터 해서 하나같이 악인이라고도 선인이라고도 할 수 없는 사람들 투성이다. 그리고 그것이 황당한 줄거리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설득력을 놓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만약 성석제가 여기에 코미디를 넘어선 풍자가 주는 강력한 여운을 남길 수 있다면 정말 대.단.한. 작가가 될텐데. 아쉽게도 아직까지 성석제의 소설은 입맛을 다시게 하는 만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