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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히토 - 신화의 뒤편
에드워드 베르 지음, 유경찬 옮김 / 을유문화사 / 2002년 1월
평점 :
절판
왕이란 어떤 존재일까? 왕족을 스캔들감으로 다루는 영국에서조차 과반수 국민이 왕족의 존속에 찬성하고 있고, 두터운 재산을 소유한 귀족들이 그 '상징'을 뒷받치고 있으며, 작가에서 영화배우에 이르는 유명인들이 여왕 앞에 무릎을 꿇고 귀족의 호칭을 받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긴다. 왕이란 존재는 대통령제를 가지고 있는 어떤 나라의 국민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은근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명분은 '전통'이지만 실은 존재가치가 없는 그 비합리적인 상징에게 국민의 비합리적인 동질감을 의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20세기의 왕이란 의례 비싼 골동품 내지는 사치품으로써 행사 때에나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기지지만 실은 국가 운영과 정치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가면 속의 권력인 셈인데, 이런 역할을 가장 능수능란하게 이용한 사람이 히토히토였다. 은둔해있는 것 같으면서도 실질적인 결정권을 가지고 있고, 온화해보이지만 아무도 속을 가늠할 수 없으며, 검소한 정장을 입고 있지만 천문학적인 재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역사에 밝고 해양생물학에 능한 천황은 20대 때부터 양복입기를 고집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현대라는 시대에 잘 적응한 것 같지만 천황이 키워진 환경은 300년 전과 다름없이 전근대적이었다.
'신이 될 아이'로써 히로히토는 차남이나 삼남과도 확연히 구별되는 특별대우를 받으며 교육되었다. 엄격한 환경이었지만 아무도 그를 평범한 아이로 보지 않았고 의무만이 강조되었으며 인간애하고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요즘 아동학자가 본다면 대경실색할 일이다.
어릴 때 시력이 나쁘다고 판명되자 몇 시간이고 의자에 앉아 허공을 바라봐야 했던 반면(효과는 없었다고 한다), 프랑스어 선생은 감히 그의 발음을 교정하지 못해 동생인 지치부 왕자와는 달리 히로히토는 평생 어눌한 프랑스어 발음을 고치지 못했다고 한다. 히로히토는 현대어가 아닌 고어를 썼고(그래서 종전 항복 선언이 라디오로 방송되었지만 국민 누구도 천황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만나는 사람은 극소수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는 신문기사나 영화로 국민의 생활을 파악했다고 한다.
그는 개인이 아닌 '국가' 내지는 '신'이었고 이런 근시안적인 착각은 별 죄책감 없이 아시아 침략과 2차 세계대전을 수행하게 해주었을 것이다. 일본 내에서도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일본이 아시아를 리드하고 세계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할 꿈에 부풀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나라가 히토히토를 키웠던 히로히토가 이런 나라를 이용했건 결과적으로는 군국주의의 목표로 돌진하는 데 아무런 장애물이 없는 셈이었다. 아시아의 진정한 비극은 일본이란 아무개 나라의 침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렇게 전근대적이고 자기 나라 국민의 실상조차 몰랐던, 냉정한 국제정세를 분석하기에는 더욱 어려웠던 천황의 권위에 움직인 근대 일본의 침략을 받은 것이 아닐까.
결국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은 패했고 천황은 항복 선언을 했다. 하지만 일급 전범들과 히로히토에게 미국은 면죄부를 줬고 히로히토의 지휘하에 벌어진 역사적 죄는 모두 묻히고 말았다. 여전히 신사로 행세하면서 평화를 사랑한다고 했던 말년의 히로히토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