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하로부터의 수기 외 -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ㅣ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덕형.계동준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3월
평점 :
절판
지하생활자는 어느 허름한 아파트에 세들어 살고 있다. 건방지고 뻔뻔한 하인이 그의 수발을 들어줄 뿐이며 정을 줄만한 친구나 가족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나이 사십에 박봉의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지만 실은 유식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비슷한 이력을 가지고 있을 그 누구와도 다른데, 이 수기가 탄생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지하생활자는 세상으로부터 거리를 둔 점잖은 은둔자가 아니며, 세상에 대한 분노를 삭이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표출하지도 못하는 삶에 대한 욕구불만에 시달리는 사람이다.
그는 히스테릭하고 불만에 가득차 있다. 타인과 자신에 대한 솔직함은 곧바로 모든 것에 대한 조롱으로 이어지고 잘생기고 위풍당당한 친구에 대한 '지성인'으로서의 경멸은 위로받을길 없는 열등감을 내포하고 있다. 젊고 착한 창녀가 앞에 있어도 모욕해야 할지 사랑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는게 지하생활자의 본모습이다.
그는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그가 젊었을 때부터 책을, 그것도 낭만주의 계열의 책을 너무 읽어서 현실감각을 상실했다는 의견도 있지만 그는 이미 어렸을 때부터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그들이 너무 어리석고 너무 유쾌했기 때문이다. 지하생활자는 선천적으로 속물성에 대한 혐오를 타고난 사람으로 보이는데, 문제는 이런 문제의식이 '책으로의 도피'로 표출됨으로써 삶의 속물성으로부터 지식의 속물성으로 넘어갔다는 데에 있다.
그는 솔직하고자 하며 순수에 대한 갈급이 있지만 이미 감정의 절음발이가 되고 말았다. 그의 솔직함은 비루한 자신의 처지와 세상의 위선을 폭로할 수는 있지만 순수한 존재에게 우정과 사랑의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는 없다. (그는 자신에게 호의를 품고 다가온 창녀 리자에게 순수를 느끼지만 돈을 주어 보냄으로써 그녀를 모욕한다.)
사실 자하생활자는 호감이 가지 않는 사람이다. 사회의 속물성을 한평생 경멸하며 살아왔지만 고질적인 이율배반과 열등감, 변덕의 구렁텅이에 빠져버렸다. 차라리 그가 경멸했던 유쾌한 속물로 살아가는 편이 낳았으리라! 너 낫게는 선량한 보통 사람으로.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은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삶의 진실을 갈구하는 그의 영원한 굶주림 때문이다.
비록 심술 가득한 사람이 되어버렸지만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는 대단한 사람이다. 자신의 이율배반과 열등감, 변덕을 우리에게 폭로한 것도 그 자신이며 그것은 솔직하고자하는 힘겨운 시도였다. 그는 순수와 진실한 삶에 누구보다도 굶주린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은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지하생활자가 자신을 극복하고 원하는 것에 다다를 수 있을까? 불행하게도 아직까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