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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 침략자 혹은 제왕 - BBC 고대 문명 다큐멘터리 시리즈 2
마이클 우드 지음, 남경태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2년 4월
평점 :
품절
상상을 초월하는 인물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위대한, 혹은 무자비한 인물이란 일반인의 상식을 뛰어넘기 때문에 그만한 족적을 남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인물일수록 상상하기 힘든 마성 속에는 의외의 단순함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단숨함이야말로 사실은 역사의 정복자들을 설명해주는 핵심이 아닐까. 나폴레옹 전기에서 전기작가가 나폴레옹의 행동을 설명할 때 즐겨 쓴 말이 있다.'나는 욕망한다.'
그 '욕망'이야말로 알렉산드로스가 아시아를 피흘리는 시체로 덮으면서 당시 '동방의 끝'으로 알려졌던 인도까지 원정을 가게 한 이유일 것이다. 잔인한 호기심이랄까. 알렉산드로스의 파괴는 가보지 못한 세계, 손에 넣지 못한 문명,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욕망'때문이었다. 같은 독재자이자 침략자임에도 알렉산드로스와 히틀러의 차이도 그것이다. 알렉산드로스가 살육한 사람의 숫자, 파괴한 문화의 가치는 히틀러가 행한 만행에 못지 않을 테지만 히틀러의 파괴가 게르만의 순결성을 위한 닫힌 사회를 지향한 것이었다면 알렉산드로스는 정반대의 이유에서였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소유욕의 만족. 그렇기때문에 그의 동방침략이 '헬레니즘'이라는 의외의 동서융합과 창조를 낳았을 것이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의 가치는 여기까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이 넘볼 수 없는 세상의 모든 섭리도 아이의 눈물을 제물로 삼은 것이라면 거부하겠다고 말했다. 이것이 현대인의 정상적인 태도가 아닐까. 현대인들이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침략을 '동서문명을 소통시켰으며.....' 어쩌구저쩌구하는 이유로 정당화시킨다면 그 침략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의 배부른 소리일 뿐이다. 불교 전래에서도 볼 수 있듯이 문명교류가 전쟁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파괴된 고대문명들이 헬레니즘보다 그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이클 우드가 직접 알렉산드로스 원정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취재한 이 책의 성격은 매우 애매하다. 21세기에도 그 흔적이 선명히 남아있는 원정길을 소개해준다는 점에서 연구서와는 구별되는 현장감을 느낄 수 있지만 탐험가로서의 자부심때문인지 자기를 전혀 숨기지 못했다. 그래서 이것이 알렉산드로스를 따라가는 건지 탐험가 마이클 우드를 따라가는 건지 가끔 헷갈린다. ('현장감'은 있지만 '역사적 현장감'은 아니라는 얘기.)
그리고 역사에 대한 소신이 확실하지 않아 중간에는 침략자로서의 알렉산드로스를 부각시켰지만 마지막에는 '동서문명을 소통시켰으며......'어쩌구저쩌구로 흐지부지 끝을 맺는다. 창조를 위한 파괴였다는 데에 심정적 동의를 하는 것 같은데 그러면서도 알렉산드로스의 유럽 침략 계획과 (특히) 이란의 지배층들을 유럽 지도자로 이주시켜려던 것을 '섬뜩한 정책'이라고 내비친다. 행동이 앞서가는 탐험가라 그런지 정말 솔직 단순하다. 하지만 동방에서 알렉산드로스가 '악마'로 불렸다는 걸 전하면서도 동방인이 느꼈을 공포와 '섬뜩함'에 대해서는 실감하지 못했나보다.
역사는 과거를 복원하는 것이라 한다. 하지만 과거를 복원하는 것은 어렵다. 과거를 조작해서라도 현재의 과오를 정당화하려는 시도와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과거를 내것으로 만듬으로써 권위를 획득하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 문명은 당시의 유럽과는 별 상관이 없었지만 어느새 서양인들은 알렉산드로스를 자신들의 조상으로 여기며 그의 원정과 침략을 미화하고 찬양했다. 옳은 일인가?
모든 것을 뜯어고치지는 못할지라도 한 권의 역사책을 정직하게 읽는 것이 과거를 소유하고 자기식대로 재구성하려는 시도에 반대하는 행동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후에야 침략자를 비판하고, 침략자 속에 감춰져 드러나지 않았던 인간을 이해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