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7, 모든 일이 예고되었던 해

1587 아무일도 없었던 해
황런위 지음, 박상이 옮김 / 가지않은길 / 1997년 11월

1587년은 명나라가 멸망한 해는 아니다. 만력제는 건재해 보였고 명나라는 여전히 몽고와 여진을 오랑캐라 무시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 황제가 내관 한 명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목을 매 자살하고, 중국이 '오랑캐'에 의해 새 왕조를 맞게 되는 것은 57년이 더 흘러야 했다.

그렇다면 왜 1587년일까? 역사가 대사건만으로 설명될 수는 없으며 사건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주목받지 않는 1587년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지만, 그것이 명나라라는 왕조의 성격을 더 극명하게 드러내주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건국기의 활력은 온데간데 없고 비대한 관료제와 유교윤리만이 쓰러져가던 거인을 받치고 있던 시대. 하지만 거인을 받치고 있던 관료제와 유교윤리는 동시에 명나라를 더욱 무감각하고 무능력하게 만든 주요원인이라는 점에서 살을 파먹으며 숙주를 지탱시키는 해충과도 같았다. 그런 명나라에서는 점진적인 쇠퇴야말로 결정적인 멸망의 이유였고, 외부의 침략은 다리와 허리의 힘을 상실한 거인을 넘어뜨린 것에 불과했다. 그런 의미에서 1587년은 돌이킬 수 없는 쇠퇴의 원인이 모두 나타난 해였다.

흔히 만력제는 명나라 멸망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 사람이다. 원래 어리석지는 않았으나 어느 때부터인가 정사에 완전히 등을 돌렸고 신하들을 전혀 만나지 않았다. 대통령 없는 정부가 수십년간 지속된 것이다. 하지만 레이 황은 만력제를 그렇게 만든 것이 바로 명나라 말기의 숨막히는 경직성과 보수성이었다고 말한다. 어렸을때는 총명하고 의무를 소홀히하지 않아 모두의 기대를 받던 소년마저 무생물같은 어른으로 만들어버린 명 말기. 이렇게 되면 반란이라든지 북방민족의 침입은 오히려 부차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모든 인간의 창조성과 의욕을 상실하게 만드는 쇠퇴기의 보수성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침입이었던 것이다.

1587년은 궁에 틀어박힌 젊은 만력제가 자신의 무덤(황릉)을 완성한 직후였고, 도덕적 결벽증으로 청렴한 관리의 박력을 보여줬던 해서와 불세출의 무관이었던 척계광이 죽은 해였다. 젊은 황제의 무덤 완공과 신하로서 마지막 가치를 보여줬던 두 사람의 자연사는 명나라의 죽음을 예고하기에 충분한 상징이었다. 또한 1587년은 대학사 신시행이 왕에게 충고하는 의무도 다하지 못한 채 지리멸렬하게 보내고 있었던 재직기간의 중간에 달하던 해였고, 능력있는 독재 재상 장거정이 죽은 후 탄핵을 받은 시점이었다.

장거정. 명 말기의 숨막힐 듯한 정체를 타파하기 위해선 장거정같은 대담함을 가진 독재자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확실히 많은 일을 했지만 그가 죽자마자 모든 것은 무로 되돌아갔다. 더구나 자신은 축재를 서슴치 않았으면서 만력제에게는 세세한 도덕 원칙을 설교했던 위선이 드러나 만력제가 정치에 등을 돌리는 결정적인 이유를 제공하기도 했다.

예민한 신경을 가진 문인이라면 이런 시대를 참을 수 있었을까. 1587년은 감옥에서 자살한 이단철학자 이지가 탁발을 하고 중을 자처해 지역사회 유가들의 분노를 산 해였다. 자신과 동료들을 남을 따라 짖는 개에 비유하면서 동심과 진심의 철학을 주장했지만 결국 그 자신안에 내재한 보수와 개혁의 모순마저도 해결하지 못하고 자살했던 이지는 1587년의 모순을 보여주는 마지막 인물이다.

1587년은 대사건들이 일어나 '역사의 분수령'으로 불리는 시점은 아니었지만 미래를 예고한달까, 소설로 치면 클라이맥스를 위한 모든 복선이 드러나는 때였다. 레이 황이 동시대인은 물론 역사가마저 판단하기 어려운 이런 순간을 복원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역사란 큰 붓으로 휙휙 칠하는 그림이 아니라 한땀 한땀 짜나가는 직물과 같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일까. 그렇다면 역사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섬세하고 신중하게 대처해나가야 할 대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