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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칼 - 일본 문화의 유형
루스 베네딕트 지음, 김승호 옮김 / 책만드는집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일본을 다루고 있는 많은 에세이들보다는 읽기 어려운 책이다. 일본에 대해 쓴 국내의 많은 책들은 밑바닥에 감정적인 유감을 깔고 있고, 본인의 짧은 경험이나 풍문에 의지해 쓴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일견 술술 읽힌다. 그래서 결론은 일본에 대한 유감의 감정을 공유하고 확인하거나 약간 색다른 편견을 더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런 책들은 질리지 않는가? 누군가에 대한 악감정을 확인하고 위무받기 위해 독서를 한다는 것은 좀 한심한 짓이다.
이 책은 1940년대에 쓰여진 책이어서 오늘날의 일본과는 거리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일본인의 '원형'을 파악하기에는 더없이 훌륭하다. 나에게 일본이란 나라는 한국과 비슷한 점은 너무 비슷하고 다른 점은 너무 상이해서 파악하기 곤란한 나라이다. 비슷한 점을 알게 되어서 그 틀로 파악하려 하면 완전히 다른 이면이 드러나 놀라게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일본과 완전히 상이한 문명권의 상이한 나라 사람이 쓴 이 책이 일본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에는 더 좋았다.
'국화와 칼'에서 인상깊었던 부분은 일본인인의 특징을 '기리(의무)', '기무(의무)', 고(효)','온(은혜)'등으로 나누어 파악한 것이었다. '기리'와 '기무'는 둘 다 의무라고 번역되지만 '기리'가 갚을 수 있는 의무라면 '기무'는 갚을 수 없는 한없는 의무이다. 하지만 일본인이라면 이 둘을 죽을 때까지 갚아나가야 한다. 부모와 조상에게 받은 은혜는 수량으로 따질 수 없으므로 부모와 집안에 '고(효)'로 복종하는 것으로 그 일부라도 갚아야 하며, 타인에게 받은 '온(은혜)'은 받은 만큼 꼭 돌려줘야 한다. 이것은 부적 '기리'와 '기무'도 마찬가지여서 수치나 모욕을 받으면 그 복수를 갚는 것도 '기리'에 속한다. 내가 받은 수치나 모욕에 대해 복수를 하지 못한 사람은 은혜를 갚지 못하는 사람만큼이나 모자란 놈이 된다. 은혜와 복수는 둘 다 내가 받은 정확한 분량만큼 상대방에게 돌려줘야 '균형이 맞는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이 뒤집힌 것'이다.
'무한의 주인'이란 만화에서 주인공 소녀가 부모를 죽인 원수에 대한 복수허가를 막부에 받으려고 하였으나 거절당하여 이상하게 여기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는 사적인 복수를 공적 기관에서 허가한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이런 배경을 알고 나면 쉽게 이해가 가는 장면이다.
타인의 호의에 대한 답례나 세상에 대한 의무는 매우 정확한 것이어서 미국인의 채무자와 채권자와의 관계에 가깝다고 한다. 미국인들이 계약서에 지불된 빚(과 이자)을 정확한 액수대로 갚아야 하는 것만큼 일본인은 타인의 호의와 은혜를 정확한 값으로 갚아야 한다. 나에게는 참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는데, 이런 특성을 알고 일본인을 대하는 것과 모르고 대하는 것은 분명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천황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 미국에 패전한 후 하루만에 호전적인 군인에서 평화로운 피지배자로 바뀐 정체성, 색과 유희에 관대한 태도, 일본인을 형성하는 어린이 교육 등에 대해 샤프한 분석이 줄을 잇는다. 일본에 대해 궁금한데 여전히 속이 풀리지 않는 분이라면 많은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분명 미국이 일본을 잘 관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의뢰되어 쓴 책이지만, 적국에 대해 이렇게 편견없는 분석을 한 책도 흔치 않을 것이다. 이 책이 100% 맞다고 할 순 없겠지만 누군가 나의 문화권에 대해 이 정도 분석을 해줬다면 분명 그 사람에게 호의를 가졌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