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어리새 - 어느 의용군 군의관의 늦은 이야기
류춘도 지음, 노순택 사진 / 당대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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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태백산맥'을 읽은 후 허전하고 마음이 아파서 읽기 시작한 책이었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는, 나름대로 앙콜 공연같은 독서랄까. 6.25가 왜 일어났으며, 누구 잘못이 더 큰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오늘날의 잣대로 그 시대를 재지 말아야겠다는 조심스러움만 생길 뿐 가장 먼저 파고드는 것은 그 시대를 살다가 산화된 사람들이다. 사람의 생명이 너무나 하찮은 것을 목도했을 때의 충격은 그 시대와 전혀 상관없었던 나에게도 시꺼먼 멍자국으로 남는다. 조국을 생각한 선의가 사회주의나 민족주의로 표현이 됐을 뿐인데 그게 왜 무조건 서로를 죽여야 하는 잔혹한 죽음의 이유가 됐는지..

아마 80세가 다 되어서야 입을 열고 그 시대에 대해 말할 수 있었던 류춘도 여사도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의과 대학에 다니고 있었을 때 의용군으로 지원했지만 뚜렷하게 사회주의 노선을 걷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막상 접해본 인민군이 인간적이고 공정했고, 친한 동생이며 친구들이 지원하여 나간 길을 따라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모든 것을 잃었다. 일요일 아침의 빨래, 야참으로 먹던 찹살떡. 기숙사 좁은 방의 추억 등등. 그 후 전쟁이 끝나기까지 그녀의 여정은 총알이 빗발치는 외다리를 걷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굶주림, 부상,익사의 위험, 쏟아지는 미사일과 네이팜탄, 포로수용소를 피해 살아남았다.

주위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천행을 거듭해 살아남았을 때의 기분은 어떤 것일까. 그렇게 살아남아 가족이 있는 부산으로 돌아갔지만 전쟁 못지 않은 끔찍한 과정을 또 겪어야 했다. 살벌했던 반공의 눈길에 의용군으로 복무했던 전력은 백번이라도 죽을 수 있는 죄였다. 더군다나 학창시절 친구가 인민군이 되어 돌아왔다는 이유만으로 '부산여자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상상 이상의 고문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 위기들에서도 살아남았다. 가족과 약혼자의 희생과 사랑, 그리고 많은 행운으로 인해. (이 책은 전쟁의 기록만은 아니다. 서로에게 너무나 헌신적이었던 생활력 강한 가족의 역사와 한 소녀의 성장과 사랑이 소복하게 담겨 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사람들의 뜻일 수 있지만, 사람이 사는 것은 하늘의 뜻인 것 같다. 류춘도 여사는 살아남았고, 반세기 이상이나 혼자 앓으며 그 기억들을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나마 이렇게 기록을 남길 수 있는 것 또한 하늘의 뜻인가. 그녀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조국을 위해 자신을 내걸고 고통받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아니,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그들이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묻혔던 반도땅 어딘가에서 나 또한 살고 있으니..나 역시 57년 전에 흰 적삼을 입고 작은 보따리를 들고 떠나간 당신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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