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지구 - 판구조론, 지질학자들이 밝혀낸 지구의 움직임
최덕근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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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 구조론, 지질학자들이 밝혀낸 지구의 움직임’이란 부제가 달린 [내가 사랑한 지구]는 최덕근 교수의 책이다. 저자는 삼엽충 전문가이다. 저자가 판구조론이란 말을 처음 들은 것은 1971년으로 일본의 이와나미(巖波) 신서(新書) 중 한 권인 우에다 세이야(1929-2023)의 [새로운 지구관; 新しい 地球觀]이란 책을 통해서였다. 4년의 지질학 수업 시간에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개념이었다고 한다. 판구조론이 과학계에 공식적으로 등장한 시기가 1970년 무렵이니 대단히 빨랐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지구과학은 400km 정도까지의 얕은 부분을 다루는 판구조론과 2900km까지의 깊은 부분을 다루는 플룸 구조론이 함께 통용되는 무대다.

 

우에다 세이야는 지진 예측이 가능하다고 본 학자이기도 하다. 본문에 지각평형설이 나온다. 저자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대륙지각이 가라앉을 수 없음을 말하는 이론이라 설명한다. 추가로 설명하면 이는 무게 변화에 따라 지각이 끊임없이 위아래로 움직이며 균형을 맞추는 것을 의미하는 이론이다. 본문에 찰스 라이엘의 동일과정설이 시간이 흐르면서 신랄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현대 과학이 라이엘의 동일과정설을 비판하는 것은 그가 이룩한 지질학의 기초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적을 반박하기 위해 설정한 극단적 점진설에 갇혀 지구 역사의 역동적인 격변과 진화적 증거들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라이엘이 자연법칙의 균일성으로부터 그와 무관한 속도의 균일성과 상태의 균일성을 도출해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찰스 라이엘은 추운 극지방에서 석탄층이 발견된 것을 보고 육지와 바다의 분포가 달라지면 기후가 달라졌을 것이고 그러면 그린란드에도 석탄이 쌓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라이엘은 그린란드가 언제나 극지방에 고정되어 있었다고 생각했다.

 

대륙은 절대 옆으로 이동하지 않으며 단지 주변의 육지와 바다 모양이 바뀌면서 극지방인 그린란드의 기후가 열대로 변해 석탄이 쌓였다고 본 것이다. 사실은 따뜻한 곳에서 석탄이 생긴 뒤 대륙 자체가 극지방으로 이동해간 것이다. 찰스 라이엘은 대륙이동설이 나오기 100년 전 학자였다. 이 이야기를 통해 내가 사는 연천이 예전에 얕은 바닷가였던 곳이 아니라 적도 지방의 얕은 바닷가였다가 대륙이동으로 지금의 자리로 온 것을 연상하게 된다.

 

단층에 의해 중첩된 암석을 식탁보를 접어놓은 것 같다 하여 프랑스어로 냅(nappe)이라 한다. 대륙이 이동한다는 아이디어를 현대적인 과학 가설 형태로 처음 공식 발표한 사람은 프랭크 버슬리 테일러(Frank Bursley Taylor)다. 그러나 테일러는 대륙이 이동해 부딪히면서 산맥이 생겼다는 놀라운 직관을 가졌지만 이를 뒷받침할 증거를 수집하지 않았고 자기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크게 노력하지 않았다.

 

이에 비해 베게너는 단순히 대륙이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화석 일치, 멀리 떨어진 대륙 간의 지질 구조 연속성, 고생대 빙하 흔적 등 전방위적인 증거를 모아 [대륙과 해양의 기원](1915)이라는 거대한 과학적 체계를 완성했다. 저자는 테일러는 대륙이동을 단순히 빙하의 움직임처럼 다루었고 지구 내부와 연결시키지 않았다고 말한다.(85 페이지)

 

베게너는 대륙을 이동하게 하는 힘과 산을 형성시킨 힘은 같기에 대륙이동은 단층, 지진, 화산 등 자연현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알렉산더 뒤 토아(Alexander du Toit; 1878-1948)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천재적 지질학자로 베게너가 사망한 이후 전 세계적인 비판 속에서도 대륙이동설을 끝까지 지키고 한 단계 발전시킨 가장 강력한 옹호자였다. 알프레트 베게너가 과거에 모든 대륙이 하나로 뭉쳐 있던 하나의 초대륙 판게아(Pangea)만을 주장한 반면 뒤 토아는 남반구 지층을 정밀 연구한 끝에 이를 수정·발전시켰다. 북반구의 로라시아, 남반구의 곤드와나, 그리고 그 사이에 테티스해(Tethys Ocean)라는 거대한 바다가 있었다고 명확히 구분지은 것이다.

 

뒤 토아가 베게너의 하나의 초대륙(판게아) 개념을 깨고 북반구의 로라시아와 남반구의 곤드와나라는 두 개의 거대 대륙으로 양분한 이유는 북반구와 남반구 지층에서 나타나는 암석과 화석의 성격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뒤 토아는 남반구 대륙들은 남극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고 있었고 북반구 대륙들은 적도나 중위도 부근에 별도의 덩어리(로라시아)로 존재했음을 밝혀냈다. 베게너는 대서양 양쪽을 보며 원래 하나였다고 외친 대담한 이론가였고, 뒤 토아는 남북반구의 지층 차이를 보며 남쪽과 북쪽은 원래 따로 놀던 두 개의 세계라고 정교하게 수정했다.

 

현대 판 구조론은 두 사람의 시각을 수용하여 대륙들이 수억 년 주기로 뭉쳤다(판게아) 흩어지기를 반복한다는 초대륙 주기(Supercontinent Cycle)를 정립했다. 리처드 필드는 “현재 지질학의 최대 약점은 땅만 연구하는 것이며 지구 표면의 1/3만을 차지하는 대륙만 연구하여 지구에 관한 내용을 알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역설했다.

 

영국의 해양지질학자이자 지구물리학자인 프레드 바인(Fred Vine; 1939~2024)은 해저 암석의 자기(磁氣)가 현재의 지구자기장과 같은 방향으로 배열된 경우에는 그 세기가 강하게, 반대 방향으로 배열된 경우에는 그 세기가 약하게 나타난다고 말했다. 이런 내용을 골자로 하는 바인과 매슈스의 논문은 발표 당시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당시 과학자들은 지구 자기장이 뒤바뀐다거나 해저가 확장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주저했기 때문이다.

 

변환 단층이란 판이 만들어지지도 소멸하지도 않으면서 판이 서로 스쳐가며 운동 형태가 유지변환된다는 의미에서 붙은 이름이다. 바인은 바다 밑 얼룩말 줄무늬를 발견한 사람이다. 고지자기 대칭을 의미하는 얼룩말 같은 줄무늬는 판 구조론의 결정적 단서다. 판이 해령 축에서 멀어질수록 암석의 나이가 많아지며 줄무늬가 대칭을 이룬다는 것은 해령에서 새로운 지각이 끊임없이 태어나 양쪽으로 밀려 나가고 있음을 설명하는 결정적 증거였다.

 

와다치대, 베니오프대, 자바리츠키대 등의 명칭이 있다. 이는 연구자인 와다치(일본), 베니오프(미국), 자바리츠키(러시아)의 이름을 딴 명칭이었다. 판구조론에서 판이 소멸하는 구체적인 현장을 지칭하는 용어들이었는데 지금은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섭입대라 부른다. 자바리츠키는 지진 데이터를 통해 경사 지진대를 물리적으로 처음 발견한 인물이라기보다 와다치, 베니오프가 발견한 지진대 데이터를 바탕으로 화산과 섭입 메커니즘의 유기적 관계를 세계 최초로 완벽하게 정립해 낸 인물이다.

 

과학사의 관점에서 와다치, 베니오프의 섭입대 발견은 미적분학(뉴턴과 라이프니츠), 산소(프리스틀리와 라부아지에), 해왕성(아담스와 르베리에)의 사례와 궤를 같이하는 완벽한 '공동 발견(Multiple discovery)'으로 보아야 한다. 공동 발견이란 이전의 연구나 서로의 연구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완벽하게 독자적인 상태에서 동일한 진리를 찾아내는 것을 말한다.

 

판(Plate)이라는 용어 자체를 전 세계에서 아예 처음 쓴 사람은 1965년 변환단층을 제안한 존 투조 윌슨이었다. 윌슨은 지구 표면의 거대한 껍데기를 Plate라고 묘사했다. 하지만 윌슨의 '판'이 단순한 지질학적 기술(묘사)에 가까웠다면 댄 맥켄지의 '판'은 수학적 법칙과 강체(Rigid body)의 물리학을 덧입힌, 진정한 의미의 '이동하는 단위'로 격상된 개념이었다. 이 때문에 과학계는 맥켄지의 1967년 논문을 기점으로 현대 판구조론(Plate Tectonics)이 비로소 완성되었다고 평가한다.

 

판은 지각과 다르다. 판은 지각보다 규모면에서 더 크다. 맨틀 바닥에 도착한 차가운 덩어리가 핵 주변의 뜨거운 물질을 옆으로 밀어내면 밀려난 뜨거운 하부 맨틀의 물질은 상승한다. 이처럼 물질이 상승하는 통로를 플룸이라 하며 플룸은 지표면에서 열점으로 표현된다. 하부 맨틀에서 올라오는 물질의 상승류는 규모가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이를 특히 거대한 상승류라 한다.(229 페이지) 판구조론(Plate Tectonics)은 한 명의 천재가 하루아침에 완성한 것이 아니라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많은 학자들의 독립적인 발견과 연구가 쌓여 완성된 현대 지질학 최고의 ‘공동 합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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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게 되는 한국사 - 머리에 새기고 마음에 남기는
김재원 지음 / 빅피시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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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저잣거리 지식 중개상으로 소개하는 김재원은 대중서 한 권이 나오려면 수십, 수백 명 연구자의 연구 성과에 기대어야 한다고 말한다. 책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근대사와 현대사이다. 저자에 의하면 근대라는 개념은 대단히 논쟁적인 말이다.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근대를 개항 전후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본다. 저자는 글의 초반부가 조금 복잡하고 어려워 보여도 인내심을 가지고 읽기를 바라는 마음을 내보인다. 책의 제목은 [울게 되는 한국사]이다. 부제는 '머리에 새기고 마음에 남기는'이다.

 

저자는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결말보다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우리는 결말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나온 말이고 교훈을 위해 과정을 되살펴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가슴 아픈 사건은 동학도(東學徒)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 조정이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한 것이다. 갑신정변으로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맺어진 톈진 조약에 의하면 일본은 조선에 대해 청과 동일한 파병권을 갖는다는 조항이 있다. 청나라 군대가 인천에 상륙한다는 소식이 일본에 전해졌다. 조선에서 청과 일 양국 군대는 동시에 철수하고 동시에 파병한다는 톈진 조약을 핑계로 일본군 1만 명이 조선에 파병되었다. 저자는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뒤늦게 상황 파악을 한 조선 조정이 농민군과 교섭을 벌이려 했지만 이미 상황은 걷잡을 수 없었다고.(47 페이지)

 

청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파병한 것은 농민군 진압이라는 명분에 의한 것이지만 내심은 일본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일본 역시 다르지 않았다. 두 나라가 전쟁을 벌이자 농민군의 전투 대상이 조선 관군에서 일본군으로 바뀌었다. 협상 대상인 조선 조정이 일본과 뜻을 함께하는 모양새가 된 까닭이었다.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자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선이 자주권을 가진 중립국이기를 바랐던 것일 뿐 그 이상의 군사적 충돌은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의 입장은 달랐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삼국(프랑스, 독일, 러시아) 간섭으로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고 요동 반도를 포기하는 대가로 기존 배상금 2억량의 추가로 3천만 냥을 얻어내고는 치욕적으로 물러나야 했다.

 

일본은 러시아와 연결된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사건을 벌이고 만다. 조선이 가장 치욕스러웠던 부분은 사건을 추적할 만한 단서가 많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대원군이 일본인 낭인들을 시켜 민비를 살해했다는 루머가 떠돌았다. 살기 위해, 다른 누군가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숨 가쁘게 내달리던 조선은 다시 한반도에서의 열강 간의 균형추를 맞추려고 시도했다. 기울어진 일본으로의 추를 러시아 쪽으로 돌려놓기 위한 노력이었다. 고종은 변화하는 세계정세에 적응하기 위해 홀로서기를 강행했다. 대한제국이라는 얇디얇은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말이다.(60 페이지)

 

저자는 동학도와 농민들이 세상을 바꾸자며 죽창을 들었고, 이들을 진압한다는 핑계로 일본과 청나라가 조선 땅에서 전쟁을 벌였다고 말하며 승전 과정에서 일본이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높였고 러시아와 대립각을 세우다 조선의 왕후가 암살당하는 초유의 사건까지 벌어졌다고 말한다.(61 페이지) 여기서 문장을 볼 필요가 있다. 러시아와 대립각을 세운 것은 일본이고, 암살당한 것은 왕후다. 주체가 다른 것이다. 그러니 일본이 러시아와 대립각을 세운 끝에 조선의 왕후를 암살했다고 말해야 자연스럽다.

 

일본이 왕후를 암살한 을미사변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아관파천으로 개화파 인사들 내부의 세력 균형이 재배치되었다. 개화파 내부의 친일 인사들이 일선에서 물러나고 독립 협회라는 새로운 거대 정치세력이 탄생했다. 1895년 을미사변, 1896년 아관파천, 1897년 대한제국 수립이라는 큰 분수령이 만들어졌다. 1898년 독립 협회가 서울 종로 광장에서 한국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대중집회인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 만민 공동회는 아관파천 이후 심해진 외세의 이권 침탈을 막아내고 백성들의 권리를 지키며 나라의 정치를 개혁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집회였다.

 

황국 협회는 독립 협회가 왕을 쫓아내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황국협회는 고종 황제의 황권 강화와 보수파 정부를 지지하기 위해 결성된 친 정부 성향의 어용 단체다. 고종은 군대를 동원해 독립 협회를 강제 해산시켰다. 독립 협회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조직이 아니었다. 하지만 투쟁 과정이 너무도 독선적이고 급진적이었다. 1904년 1월 23일 러일전쟁 직전 고종은 느닷없이 중립을 선포했다. 하지만 곧 전쟁터로 변해버린 한반도 땅에서 중립화 선언은 의미가 없었다.

 

일본은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었다. 그나마 일본을 견제하던 미국도 일본이 필리핀에서의 자국의 확고한 이권을 보장해주자 대한제국의 침략을 허용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고종은 나라를 위해 순직할 의지가 털끝만큼도 없었던 황제였다. 1907년 헤이그 특사단이 파견되었다. 평화회의 의장국이던 러시아가 대한제국의 참가를 일본에 알렸다. 일본은 현실적인 방법으로 대한제국의 평화회의 참가를 무력화하려 했다. 통감부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 대한제국 법부는 이상설에게 사형을, 이준과 이위종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1910년 8월 22일 창덕궁 흥복헌에서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었다. 1905년 덕수궁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된 지 5 년만의 일이었다. 3.1 만세운동 직후인 1920년까지 신흥 무관 학교는 1천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고, 3천여 명의 독립군을 양성했다. 이들은 간도 더 넓게는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행해진 독립전쟁의 지도자로 성장했고 바로 1920년대에 피 터지는 독립전쟁의 주인공이 되었다. 울게 되는 한국사라고만은 할 수 없는 내용이 청산리, 봉오동 전투다. 한 때 대첩(大捷)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그 표현이 무색하게 이후 독립군의 무장투쟁에 침체를 가져왔다.

 

농토를 잃고 일자리를 잃은 조선인들은 일본으로 건너가야 했다. 재일 조선인 대부분은 잡부나 일용직 노동자와 같은 하층 노동자로 살아가거나 탄광 노동자와 같은 위험한 일을 일본인 대신 도맡았다. 1911년 2500명에 지나지 않았던 재일 조선인은 1920년 3만 명을 넘어섰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 병합한 후 조선인을 향한 멸시적 시선에 조선인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덧붙여졌다. 이 상황에서 1923년 간토(관동) 대지진이 일어났다. 지진 발생 직후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탔다는 유언비어가 빠르게 일본 사회에 퍼졌다.

 

우물에 독을 탔다는 작은 거짓은 자연재해를 틈타 조선인들이 일본인을 집단으로 폭행하고 약탈하거나 심지어 폭탄을 던지거나 부녀자를 겁탈하고 있다는 소문으로까지 번졌다. 일본인 자경 단원들에 의해 조선인을 향한 집단학살이 자행되었다. 1929년 미국발 세계 대공황으로 경제가 무너지면서 조선인들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이 차마 살 수 없는 곳에 움집이나 판잣집을 짓고 살아야 했던 조선인들은 1930년대 30만 명을 넘어섰다. 1930년 후반 중국 침략이 본격화하면서 중일전쟁이 시작되었고 1938년 국가 총동원법, 1939년 국민 징용령이 공포되면서 조선인에 대한 강제징용이 시작되었다. 강제징용에 의해 일본의 탄광이나 광산, 군수공장 등에서 노동해야 했던 재일 조선인은 100만 명 이상이었다. 식민지 조선인들은 일본에서 학살 대신 학살에 준하는 고강도 강제 노동을 만났다.

 

급격한 세계사적 변화 속에서 새롭게 바라본 중국인을 향한 조선인의 감정은 혐오였다. 근대라는 새로운 세상 속에서 중국인은 조선인에게 야만이었다. 어쩌면 일본과 상대적 우월 의식을 공유했다고도 볼 수 있다. 문제는 노동시장에서 조선인들이 중국인들과 경쟁했다는 점이다. 중국인들이 값싼 임금으로 노동시장을 잠식해 가자 조선인은 박탈감을 느꼈다. 박탈감과 혐오는 비인도적인 테러와 학살로 이어졌다. 그리고 중국인에 대한 혐오감정이 노골화된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배화(背華; 화교를 배척한다는 뜻) 폭동으로 불리는 반 중국인 폭력사태다.

 

식민당국은 1910년대까지 조선인들의 생업 유지를 핑계로 중국인 노동자 입국을 제한해 왔다. 하지만 1920년대가 되자 기존의 중국인 이주 정책을 수정했다. 싼 가격의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제국과 식민지 사이에 왜곡된 경제 체제가 본질적 문제였지만 당시 언론은 오히려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 간의 대립을 부추겼다. 1920년대 말 세계 경제 대공황이 일어났다. 후발 제국주의 국가가 공항을 이겨낼 손쉬운 선택지는 전쟁이었다. 일본은 곧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그들의 1차 목표는 만주였다.

 

대공황으로 인해 영국, 미국, 일본의 제국 협조 체제에 균열이 발생했고 경제 불황으로 돌아선 일본 민심은 군부의 대륙 침략에 힘을 실어주는 모양새였다. 1931년 9월 일본군은 조선 국경을 넘어 만주를 침략했고 이로써 만주국이 탄생했다. 일본 군국주의의 확장은 그 자체로 조선의 독립운동의 엄청난 후폭풍으로 다가왔고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독립운동은 거대한 암흑기에 접어드는 듯했다. 임시정부가 있던 상해는 일본의 점령 위기에 놓였고 신간회(1927년 창립된 좌우합작단체)는 해산되었다. 국내 사회주의 계열의 노동운동은 탄압받기 시작했고 조선인들의 독립 의지도 꺾여가고 있었다.

 

이봉창은 김구에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봤습니다. 이제 영원한 쾌락을 꿈꾸며 독립 사업에 헌신할 겁니다."라는 말을 했다. 일왕 저격에 실패한 이봉창은 32세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윤봉길은 계몽 운동만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하고 무장 투쟁의 길을 걷기로 했다. 윤봉길은 무장투쟁을 이끄는 독립군이 될 수 없다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의거라고 생각했다. 거사 직후 윤봉길은 일본 헌병에게 연행되었고 상하이 파견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아 우편선에 실려 오사카 육군 형무소에 수감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나자와 육군 구금소를 거쳐 1932년 12월 19일 군작업장에서 향년 24세로 총살형을 당했다.

 

일본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장준하도 1944년 일본군 학병에 강제 징집되어 중국 쑤저우 지구에 배속되어 있었다. 여느 학병처럼 강제로 일본군에 끌려간 장준하는 부대에서 조선인 학병을 규합해 친일파 총살을 요구하던 중에 부대에서 탈출해 중국군 유격대에 합류했다. 일본 게이오대학 문학부 재학중 학병으로 끌려온 김준엽도 마찬가지였다. 부대에서 탈출한 김준엽은 1944년 7월 9일 중국군 유격대 휘하에 있던 장준하와 역사적인 만남을 갖는다. 그런 저항이 쌓이고 쌓여 일본 제국주의는 패전하고 우리는 해방이라는 역사적인 결과를 맞이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일본제국의 식민이 아닙니다라고 힘겹게 외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해방은 힘겹게 우리 손으로 찾은 결과물이었다.

 

1945년 2월 얄타(러시아) 회담과 7월 포츠담(독일) 선언을 거치며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해방시킨다는 내용이 국제무대에서 합의되었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이 서명한 항목 문서에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확약한다는 내용이 삽입되면서 한국의 독립이 공식화되었다. 한국인들은 식민지배에서 벗어났음을 깨닫고 환호했지만 이 환호는 다시 더 큰 아픔과 슬픔으로 다가왔다. 한반도의 정중앙을 가로지르는 선 즉 38선이 생겼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에서 논의된 한국의 해방에는 적절한 시기라는 조건이 있었고 이 조건을 핑계로 연합국의 두 축이었던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양분한 것이다.

 

분단은 시작됐고 1945년 8월 11일 소련이 북한 땅에 들어왔고 9월 8일 남한 땅에는 미군이 들어왔다. 1945년 12월 소련, 미국, 영국 대표가 모스크바 3상 회의를 통해 한국의 독립에 관한 문제를 논의했고 여기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정되었다. 여수와 순천 지역 주민들이 반란군이 아닌 좌익 중심의 인민위원회에 동의했던 것은 폭력적이고 친일적이었던 경찰 세력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더불어 경찰과 같이 친일행위를 일삼던 이들이 행정을 이끄는 상황, 게다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무능에 대한 반감이었지 반란군의 주장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지역민들에게 반란군의 사상이나 이념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문제는 그저 생존이었다.

 

제주 4.3 사건과 여순 사건을 통해 대한민국에는 새로운 존재가 탄생했다. 바로 빨갱이다. 물론 빨갱이는 여순 사건 이전에도 존재하던 표현이었지만 이승만 정권은 여순 사건을 계기로 공산주의자는 빨갱이라는 공식을 넘어 빨갱이는 악마라는 등식을 완성했다. 빨갱이란 언제 죽여도 상관없는 존재라는 의미였다. 그 누구도 사상과 이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제 한국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사상은 반공이었다. 1948년 5월 31일 남한은 선거를 통해 제헌국회를 구성했다. 안타까운 것은 반민특위가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었다. 정부 수립 이후 대다수 국민의 관심 대상이자 염원이었던 친일 청산은 그야말로 허무한 실패로 끝이 났다.(165 페이지)

 

전쟁은 학살이 일어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이다. 한국 전쟁 때 벌어진 학살의 문제점은 학살의 주체였다. 학살을 일으킨 장본인이 남북의 국가 권력이었기 때문이다. 남한은 빨갱이 사냥에 혈안이 되었고 북한은 흰 패 사냥(공산주의에 동조하지 않는 자들을 사냥하는 것)에 열을 올리며 이념에 따른 정치적 학살을 자행했다. 남북한은 데칼코마니처럼 각자의 이념과 지향을 폭력으로 관철하며 상대방을 피로 굴복시켰다. 북한은 1948년 2월 조선인민군을 창군하고, 1948년 9월 정부를 수립했다. 창군(創軍)이 정부 수립보다 먼저였다. 군 조직은 남한보다 먼저, 정부 수립은 남한보다 늦게 단행한 것이다. 이는 분단의 책임을 남한에 미루고자 한 북한 정권의 노림수였다. 남한이 먼저 정부를 수립했으니 자신들은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정부를 만들었다는 논리였다.

 

남과 북이 서로 다른 정부를 수립한 시점부터 둘은 적이었다. 서로 한반도 유일 합법 정부임을 주장해야 했기 때문이다. 3.8선은 사실상의 국경선이었지만 남과 북 모두 이를 국경선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양측에게 3.8선 너머의 땅은 그저 언젠가 되찾아야 하는 땅이었고 그래서인지 그 주변에서 끊임없이 싸웠다. 인민군이 급박하게 후퇴하는 과정에서 우익 인사들은 지역에 남은 좌익 인사를 보복할지 모를 위협 세력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인민군은 빨갱이 사냥에 최전선에 있던 경찰이나 우익 청년단원들을 학살했다. 이 보복 학살이 더욱 가슴 아픈 이유는 인민군이 우익 인사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보도 연맹 사건의 피해자 유가족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가족과 친지를 학살로 내몬 이들을 또 다른 학살의 피해자로 만든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우리와 타자를 나누며 살아가고 있다.

 

일본이 패망한 이후 한국에 남은 일본 재산은 어떻게 처리되었는가. 한국은 이를 적산 즉 적의 재산이라 명명했다. 이때 일본과의 전쟁에서 이긴 미국이 등장했는데 일본 행정이 미군에 넘어갔으니 일본의 재산은 곧 미국의 재산이었다. 이후 1945년 12월 6일 한국에 있는 일본 재산은 국유와 사유를 막론하고 미군정청에 귀속되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9월 대한민국 정부 및 미국 정부간의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 협정에 의해 한국 정부가 미국으로부터 일본 재산에 대한 권리를 이양받았다. 처음부터 미국은 한국과 일본이 화해하기를 바랐다. 이유는 간단했다. 냉전이라는 새로운 국제 관계 때문이었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소련과 중국의 확장을 막을 든든한 동맹국을 원했다. 그런데 한국은 너무나도 약했고 일본만으로는 부족했다.

 

어쩌면 우리는 여전히 한일 회담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만족스러웠을지 모를 이 회담 결과 누군가는 또 다른 상처를 입었고 진짜 피해자들은 아직도 아무런 사과와 보장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217 페이지) 1960년 후반부터 시작된 한강변과 강남의 성장은 서민 더 정확하게는 도시 빈민의 희생을 강요했다. 사실상 서울시 개발의 로드맵에서 도시 빈민이 설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눈여겨 볼 대목이 있다. 경제가 무너지면 정권은 흔들린다는 말이다.

 

저자는 유신 정권은 어처구니없게도 내부의 권력다툼으로 종말을 맞이했다고 말한다. 어쩌면 유신 정권의 이 황당한 마무리야말로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비극일지 모른다고 말한다. 시민들의 손이 아닌 유신의 1, 2인자 사이의 술자리 다툼으로 종결되었기 대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 술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대국적인 정치를 하라는 말을 했음을 감안하면 단순한 권력 다툼이라 하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저자는 유신 정권이 우발적 총탄으로 무너진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로 인해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고 말한다. 황당한 마무리라는 말과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로 인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울게 되는 정도가 아니라 가슴 아프고 비참한 사건들이 우리 역사에 너무 많았다. 마지막 챕터는 ‘한강의 기적이 무너진 1997년의 겨울’이다. 구제 금융을 받아야 했던 사건을 말한다. 현대사는 거의 동시대이기에 생소함이 덜하다. 책이 다룬 근대사에 집중한 이유다. 우리에게 비극이 아닌 때는 없었다. 책이 다룬 부분은 정치, 군사, 경제와 관계된 역사다. 저자는 식민 청산과 통일이라는 화두로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없다고 말한다. 저자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2026년 5월 [세대X 한국사 - 혐오를 멈추고 시대를 읽는 현대사 수업]이란 책을 냈다. 혐오를 멈추는 것도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만하다. 이 책은 오랜만에 읽은 역사 책이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책이다. 다음에는 어떤 역사책을 읽어야 좋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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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 브레인이란 용어가 있다. 프라이팬에서 톡톡 터지는 옥수수처럼 빠르고 강렬한 디지털 자극에만 뇌가 반응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컴퓨터 학자 데이비드 레비(David M. Levy) 교수가 스마트폰과 디지털 멀티태스킹에 중독된 현대인의 뇌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만든, 비공식 용어다. 


책을 오래 읽어왔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는 팝콘 브레인 상태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물론 팝콘 브레인 상태를 면하는 것이 관건은 아니리라. 긴 호흡의 글, 양질의 글을 계속 꾸준히 읽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글에 공감하고 익숙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어쩌면 전이(轉移)의 한 종류가 아닐까? 생각한다.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전이란 과거 부모나 주(主) 양육자와의 관계에서 느꼈던 감정, 기대, 관계 패턴을 현재의 다른 대상에게 투사하는 것을 말한다. 내 입장에서 전이란 쉽게 변하지 않는 글, 깊은 서사를 가진 긴 호흡의 양질의 글을 읽는 행위를 통해 안정감을 다시 경험하(려)는 것일 수 있다. 글은 나를 조급하게 재촉하지 않고, 언제나 그 자리에서 깊은 존재감으로 나를 맞아주는 안전한 대상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이학사에서 나온 내러티브 총서(叢書) 2번 [일꾼과 이야기꾼; 서사적 주체]에 나오는 장태순 교수의 진단을 접하고나서다.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해 박사가 된 장태순은 좁은 의미의 전이는 정신분석이라는 상황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전이는 우리가 이야기를 교환하는 모든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말한다. 


지질(地質) 공부에서도 전이가 있을 수 있을까? 지질학은 겉으로 보이지 않는 땅속 깊은 곳의 역사와 비밀을 과학적으로 추적하는 학문이다. 이는 정신분석가가 환자의 겉모습 아래 숨겨진 무의식의 억압된 상처를 파헤치는 과정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가 자신의 자전적 회고록 [슬픈 열대(Tristes Tropiques)]에서 자신의 사상적 뿌리이자 평생의 세 가지 뮤즈(Three Mistresses)로 지질학,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를 꼽은 것이 기억난다. 이 학문들은 표면 아래의 거대 심층 구조와 역사를 파헤쳐 본질을 규명하는 학문들이다. 


레비스트로스는 20대 초반에 지질학을 독학하며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지평선을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왜 이 바위는 여기에 있고, 저 골짜기는 왜 깎여 나갔는가?“ 같은 질문들을 던지며 눈에 보이지 않는 세월의 흔적과 법칙을 읽어냈다. 이는 정신분석으로 이어진다. 정신분석 역시 환자가 겉으로 횡설수설하는 말(표면)을 넘어, 그 아래 도사린 무의식의 지층(본질)을 분석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 역시 사회의 화려한 이데올로기 뒤에 숨은 경제적 하부구조를 분석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지질학 공부가 전이의 한 형태가 아닐까?란 생각을 한 것은 스콧 솔로몬의 [비커밍 마션]을 만나고서다. 본문에 지진해일이 남긴 퇴적층이란 말이 나온다. 영어로는 Tsunami deposit라고 한다.(모쿠다이 구니야스는 [그림으로 배우는 지층의 과학]에서 쓰나마이트란 말을 썼다.) 


쓰나마이트라는 용어를 둘러싼 논쟁은 활발하다. 눈앞의 뒤틀린 지층(표면)을 보고 쓰나미의 흔적이라고 단정 짓고 싶은 열망과, 단순한 폭풍우의 흔적일지 모르니 철저하게 의심해야 한다는 과학적 회의주의가 격렬하게 부딪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구별의 요령은 있다. 쓰나미로 인해 만들어진 지층은 파도의 파장(길이)이 수십~수백km에 달해 에너지가 줄지 않고 해안선에서 수km 내륙 깊숙한 곳까지 모래를 밀고 들어간다. 지형의 굴곡을 그대로 따라 부드럽게 덮듯이 쌓이는 경향이 있다. 폭풍으로 인해 만들어진 지층은 파장의 한계 때문에 아무리 강한 태풍이라도 해안가에서 보통 300m 이내까지만 퇴적물을 남긴다. 언덕 같은 거대 지형을 넘지 못하고 그 앞에 막혀 쌓인다. 


쓰나미는 워낙 유속이 빠르고 강력해서 내륙이나 갯벌을 통째로 뜯어내며 전진한다. 이때 부서진 진흙 덩어리(진흙 포획암)가 모래층 사이에 그대로 박힌 채 굳어버린다. 폭풍의 경우 오랜 시간 서서히 물이 차오르고 빠지기 때문에 진흙처럼 약한 덩어리들은 파도에 반복해서 씻기며 다 녹아버리므로 진흙 덩어리가 거의 없다. 이런 단서들을 세밀하게 분별하는 것은 심층을 파헤치는 것이고 전이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모쿠다이 구니야스는 [그림으로 배우는 지층의 과학]은 내가 지질 해설사가 된 첫 해인 2020년에 나온 책이고 바로 사서 읽은 책이다. 6년이 지난 지금 보니 다시 읽어야 할 필요가 느껴진다. 단 [비커밍 마션]을 읽은 후에 읽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탈(脫) 지구 및 화성(火星) 안착을 논한 책이다. 아무리 지질학이 전이의 대상이어도 위기에 처했다면 떠나야 한다는 말에 저자는 어떤 말을 할까? 성공한다면 화성이 새로운 전이의 대상이 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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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시대
스티븐 J. 파인 지음, 김시내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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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유명한 화재 역사학자인 스티븐 파인의 [불의 시대]란 책이다. 저자가 만든 용어인 Pyrocene은 화염세(火炎世)를 의미한다. 번역본 제목은 [불의 시대]다. 저자는 세 가지 불을 이야기한다. 자연적인 불, 인위적인 불, 암석 경관을 태우는 불 등이다. 화석 기록에 따르면 불은 약 4억 2천만년전 관다발 식물이 번성하던 실루리아기 초반에 최초로 등장했다.(42 페이지) 실루리아기에 처음으로 자연발화한 것이라면 200만년전 처음 인공으로 불을 붙이기까지 상당히 긴 공백이 있었다. 세 번째 불인 암석 경관을 태우는 불은 화석 연료를 태우는 불로 첫 번째, 두 번째 불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저자는 지금은 불이 더 많은 불을 만드는 시대로 인간이 자신도 모르게 연 불의 시대를 제대로 살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어떤 곳인가? 유일하게 불이 있는 행성이다. 지구에서는 해양생물에서 산소 대기가, 육상 생물에서 불이 잘 붙는 탄화수소(테르펜, 송진)가 등장했다. 저자는 불이란 물질이 아니라 반응이라고 말한다. 즉 환경이 받쳐줘야 불이 난다는 것이다. 허리케인, 홍수와 비교하면 금방 알 수 있다. 불은 허리케인, 홍수와 달리 생물과 별개로 일어날 수 없다.

 

지질 시대가 이어지면서 대기 중 산소 농도는 오르내리며 14~16%를 유지했는데 이것보다 적으면 생물군을 태우기 어렵고 30~35%가 되면 불길을 잡기 어렵다. 불이 빠른 연소라면 호흡은 느린 연소다. 인류는 200만 년 이상 불을 이용했고 불 없이 존재할 수 없었다. 불이 나는 곳에서 번성했고 건/우기가 없어 불이 나지 않는 암석 사막, 습한 우림, 그늘진 숲에서는 생존하려 고군분투했다. 지구가 결빙과 해빙 사이에서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이나 요동치며 온갖 변화를 일으킨 탓에 육상 생물이 살기 어려워졌다. 서식지가 바뀌고 늘었다가 줄어들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숲이 초원으로, 초원이 사막으로 변했다.

 

해안가는 경사를 드러내며 확장하다 얼음 아래로 가라앉았다. 계곡물은 호수를 채웠다가 잠깐 생겼다 사라지는 플라야로 흘러 들어갔다. 아한대 지역이 얼음 속으로 사라졌다. 언제나 그랬듯 적응하는 종이 있는 반면 아닌 종도 있었다. 전반적으로 멸종에 가속이 붙었다. 홍적세는 260만년간 이어지면서 지구의 5대 멸종 중 최후의 막을 열었다. 홍적세는 거대 동물의 시대였다. 대륙 만한 빙상, 차디 차게 얼어붙은 환류를 일으킨 해양, 거대한 호수, 광활한 사막 그리고 온 세상을 점령한 거대 동물을 자랑했다. 홍적세 내내 결빙과 해빙, 멸종과 출현이 계속되다가 흐름이 멈췄다.

 

인간이 돌본 경우를 제외하면 거대 동물을 비롯한 여러 생물은 되살아나는 일 없이 계속 스러져 갔다. 얼음 없이 돌아오지 않고 녹아 없어지기만 했다. 호모 사피엔스는 다른 모든 호미닌처럼 빙하기에 등장했다. 그러나 불을 다룬 덕에 지구상에서 유일한 호미닌으로 등극했다. 그들은 불쏘시개를 지렛대 삼아 아르키메데스처럼 지구를 움직였고 때마침 유리한 환경이 그 받침점으로 작용했다. 불은 지형, 기후, 초목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인다. 마지막 빙하기가 찾아오자 화재 친화적 환경이 펼쳐졌다. 홍적세가 화염세로 넘어간 것이다.

 

스스로 불을 붙일 수 있었던 호미닌은 훨씬 더 유리했다. 호모 사피엔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질학적 시대를 열어젖혔다. 지구가 유일한 불의 행성인 것은 지구가 유일하게 생명체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호미닌은 불을 발명하지 않았고 주변에서 발견해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불은 도구인 동시에 동반자였지만 무엇보다 힘이었다고 말한다. 불을 다루는 생명체가 화재 친화적 시대와 만난 시점은 매우 의미 있는 변곡점이다. 그래서 식물이 대륙을 장악한 이후로 지구상에서 불이 보여준 가장 큰 변화로 생각해야 한다.

 

요리는 중요한 기술이자 화염 기술의 근본이었다.(102 페이지) 이는 모든 화염 기술의 표본으로 자리 잡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모래, 광석, 점토, 진흙, 석회암, 나무, 석유를 요리하듯 가공해 유리, 금속, 도자기, 벽돌, 시멘트, 타르, 테레빈유를 생산하는 방식을 터득했다. 저자는 인간이 길들인 최초의 존재를 불이라 정의한다. 불은 생태계의 야생적 존재를 인류의 통제하에 두고 공생을 시작한 길들이기의 대상이었다. 돌은 통제의 대상, 불은 길들이기의 대상이었다. 돌은 일방적인 변형의 대상이다. 사용후 방치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불은 지속적인 양육과 관리가 필요한 길들이기의 대상이다. 잘못 관리하면 인간 거주지를 태워 없앨 수 있다.

 

불만 있으면 생태계에서 무엇이든 모으고 뒤쫓고 포획할 수 있는 꿈같은 일이 펼쳐졌다. 사람들은 삼림과 이탄 지대를 베는 동시에 바싹 말리고 습지에서 물기를 없애며 가축을 풀어 덤불이 우거진 땅을 다지고 관목을 다듬으면서 불이 붙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후 화재 이후 환경에 적응한 식물을 도입해 식량을 재배할 수 있었다. 거의 어디서나 농경지를 넓혀주는 불 덕분에 범람원 바깥에서도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불이 불답게 타오르려면 연료가 충분해야 했다.(116 페이지) 동물은 느린 연소를 하는 존재이고 불은 빠른 연소를 하는 존재이다. 동물은 느린 연소를 위해, 불은 빠른 연소를 위해 똑같이 풀, 잔가지 등 미세 연료를 두고 경쟁했다.(120 페이지)

 

화염 기술이라고 해서 모두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방화는 불로 공들여 이뤄낸 것을 파괴할 수 있었다. 불과 검(劍)은 전쟁의 줄임말이었다. 화력은 군사력을 나타냈다. 사람들은 불을 통제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었지만 만족할 줄 몰랐다. 과학적 화염 기술은 연료 유무에 따라 제약을 받았다. 당시 연료원이던 자연경관의 제약을 받은 것이다. 생물학적 화염 기술은 자연경관의 특성에 따라 벽에 부딪혔다. 때마침 물리학적 화염 기술이 실용적인 목적에 무한히 쓸 수 있는 화석연료라는 신세계를 발견했다.

 

인간은 여러 활동을 하며 이미 정해져 있는 밀란코비치 주기를 느리게도 빠르게도 바꿀 수 있다. 저자는 불이 기후에 딸린 부수 현상에 그치지 않고 인류의 손끝에서 기후변화를 진두지휘하는 선동가였다고 말한다.(134 페이지) 새롭게 등장한 세 번째 불은 자신의 연료처럼 무한(無限)했다. 게다가 자연적인 기후 양상을 조금씩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뒤엎을 정도로 거대했다. 연기는 하늘을 가득 메웠다가 비에 녹아 해양에 녹아들었고 화염은 보이든 안 보이든 지구를 채우고 있다. 연소(燃燒) 변이(變異)라고 하는 변화는 석탄, 석유, 가스로 대표되는 화석 생물량이 화로, 단조(鍛造), 용광로 등 불을 이용하는 다양한 기구에서 나무, 이탄(泥炭)과 같이 살아 있는 생물량을 선택적으로 대체하면서 시작되었다.(143 페이지)

 

저자는 에너지원이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이 시대를 인류세 대신 화염세라 명명하는 편이 올바를 것이라 말한다.(149 페이지) 멀고 먼 지질 시대 속 연료를 캐다가 당대에 태우고 앞으로 맞이할 먼 미래를 향해 폐기물을 뿜어내는 것, 이것은 불이 그리는 새로운 서사이자 지구 역사상 중요한 표식 중 하나다. 인류가 일궈낸 주거지에 몰고 온 변화를 생각하면 연소 변이에도 좋은 점이 많다. 부엌과 마을에 연기가 자욱하지 않고 가연성 재료로 집을 짓고 도시를 조성한 탓에 자나 깨나 화재 걱정을 하던 시절이 지났으며 계속 장작을 구하러 다닐 필요도 없다. 세 번째 불은 사회 구성원의 끊임없는 관심과 손길이 필요한 어린이나 두 번째 둘과 다르다.

 

그러나 이 변화에는 대가가 따른다. 어느 지역에서나 어떤 종류든 불이 존재하고 불의 성질은 지역 내에서 바뀐다. 마찬가지로 농업에서는 다루기 까다로운 화염을 피하려 화학물질을 사용하다 보니 오염이라는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지역의 변화가 전 세계적 변화로 확대되기도 한다. 그래서 대체로 이목을 끄는 것은 불꽃이다. 불꽃은 인간이 딛고 선 대지를 똑같이 딛고 타오른다. 인간이 헤아릴 수 있는 크기만 하다. 그러나 불에서 훨씬 더 거대한 것은 가장 높은 산보다 더 높이 솟구칠 수 있는 연기 기둥이다.

 

화재적운(pyrocumulus cloud)이란 것이 있다. 산불, 화산 폭발 또는 대형폭발로 인해 발생한 강한 열기와 연기가 대기 중에서 급격히 상승하며 형성되는 구름이다. 이는 세 번째 불이 대기와 상호작용하면서 어떻게 자연경관에 더 많은 불을 일으키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불이 불을 먹고 살며 더 많은 불을 일으키는 환경을 형성하는 것은 언제나 진실이다. 그러나 자연경관에는 불이 모든 것을 다 삼켜버리지 못하도록 막는 화재 방지벽이 있다. 암석 경관에는 없다. 그 대신 불이 연료를 재배치하고 기후를 바꾸며 또 다른 불을 일으켜 하늘 위로 연기를 피어 올린다.

 

처방화입(處方火入; Prescribed burning)은 무엇인가? 산불 예방과 생태계 관리를 목적으로 날씨, 시간, 장소, 기상조건 등을 미리 정해 계획적으로 불을 놓는 임업 기술을 말한다. 대형 산불로 번지지 않게 연료가 될 만한 물질을 미리 태워버리는 역발상적인 조치다. 홍적세에 전 세계가 빙상에 파묻히진 않았지만 얼음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곳은 거의 없었다. 화염세의 불도 마찬가지다. 지구는 오랫동안 불의 행성이었고 이제 더 깊은 불의 시대로 향하고 있다.(233 페이지)

 

저자가 내리는 처방을 보자. “우리는 땅속에 화석 바이오매스를 저장해야 한다. 오늘날 열기를 무섭게 뿜어대는 인류라는 존재를 식히는 것은 물론이고 미래에 귀환할 얼음을 물리치기 위해 비축해야 한다. 전략적으로 석유를 매장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다가올 추위를 대비한 방책이기도 하다.”(238 페이지) 저자는 불이 없으면 안 되는 우리와 달리 불은 우리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역시 잊지 말기를 주문한다. 우리 인간만이 갖는 화력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도 명심하라고 말한다.

 

그간 우리는 화력을 이용해 세상을 다시 열고 여섯 번째 태양을 띄웠다. 그러나 이제는 지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방향으로 화염을 재분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지구의 미래가 곧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태양은 지구와 자연의 불(Fire and Earth), 두 번째 태양은 인간과 농경의 불(Fire and Water), 세 번째 태양은 식민지 개척과 유라시아 문명의 결합으로 불의 용도가 확장된 시대인 두 번째 자연, 네 번째 태양은 산업과 철의 불(Fire and Iron), 다섯 번째 태양은 현대와 공기의 불(Fire and Air), 여섯 번째 태양은 화석연료와 화염세(Pyrocene)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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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독 - 유목적 사유의 탄생
이정우 지음 / 아고라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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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독(耽讀)이란, 책을 즐겨 읽는 것을 말한다. 유목적 사유의 탄생이란 부제를 가진 [탐독]은 철학자 이정우 교수의 책이다. 정확히 20년전인 2006년 아고라 출판사에서 나왔다. [탐독]은 내가 구입한 저자의 첫 번째 책이 아니다. 첫 번째 책은 1997년에 나온 [가로지르기]이고 두 번째 책은 1994년에 나온 [담론의 공간]이다. 순서대로 읽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저자는 자신이 책의 세계, 지성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중학교에나 가서였다고 말한다. 목차는 문학, 철학, 과학의 3부로 이루어졌다. 이 순서는 아마도 일반적인 사람들이 읽는 순서가 아닌가 싶다. 물론 저자는 철학자이기에 세 분야의 책을 두루 읽을 것이고 특히 과학과 철학을 함께 읽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문학 애호 시기를 지난 지 오래다. 그럼에도 평론에 대해서는 마음이 열려 있다. 저자는 에밀 졸라의 [목로 주점]을 철학과의 관계 하에서 이야기한다. 저자는 먼 훗날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 매료되었을 때 [목로주점]을 역사적으로, 철학적으로 재발견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궁금한 것은 저자는 문학을 여전히 사랑하는가?다. 저자가 중요하게 거론하는 책이 [삼국지연의]다. 유비, 조조 등이 등장하는 책이다. [주름, 갈래, 울림]에서 저자가 라이프니츠 철학을 이야기할 때 유비, 제갈량 등을 이야기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익히 알고 있는 소설과는 다른 갈래의 인물들을 상상해보자는 것이다. 

 

저자는 [연의]를 읽는 시간을 늘 행복했다고 말한다. 특히 제갈량은 자신에게 하나의 꿈이요 이상이요 낭만이었다고 말한다. 마지막까지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갸륵한 마음과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면서 삶이 다할 때까지 온몸을 살라 쟁투하는 모습이 삶의 한 모델이 되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이제 그 시간으로 아득한 저편으로 사라져 갔으니 시간이야말로 누구도 대적하지 못할 절대적 힘이 아니던가라고 말한다. 

 

저자는 베르그송의 말처럼 시는 우리에게 새로운 형태의 지각을 준다고 말한다. 저자는 시는 우리에게 이미 드러나 있으나 우리의 둔한 지각이나 때묻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저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이야기한다. 이틀 또는 사흘이란 빠른 시간에 침식을 잊고서 몰두한 소설은 그 전에도 또 그 후에도 없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지적인 성향으로 말한다면 자신은 과학적 성향보다는 인문학적 성향이 더 강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저자의 부모님은 저자가 의사가 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그러나 병원에 몇 달씩 입원했을 때 의사라는 직업이 얼마나 고단한 것인가를 알게 된 어머니 덕분에 의사에의 길을 일찍 접을 수 있었다고 한다. 

 

찰스 다윈의 사례와 비슷한 듯 다르다. 다윈은 1827년 에든버러 대학교 의대에 진학했으나 마취 없이 진행되던 당시 수술 장면과 끔찍한 시체 해부에 큰 충격을 받고 2년 만에 중퇴하고 의사의 길을 포기했다. 그 후 다윈이 간 곳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였고 전공은 신학이었다. 나는 어떤 유형일까? 2020년 지질해설사의 길에 들어선 이래 과학에 집중하고 있지만 문득 문득 인문에의 향수 같은 것을 느낀다. 이는 아직 내가 과학과 함께 인문을 공부하는 단계에 들어서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저자는 과학의 세계에 접근하면서 세계의 또 다른 차원을 볼 수 있었고, 그런 경험이 자신의 사유를 아니 어쩌면 자신의 감성과 가치관까지도 상당히 바꾸어 놓았던 것 같다고 말한다. 과학을 공부하면서 그리고 훗날 철학을 공부하면서 저자는 예전과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 되었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고 말한다. 한 인간은 직업, 전공, 계층을 비롯해 자신이 속해 있는 장(場)의 영향을 결코 벗어날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래서 장과 장 사이에는 거의 소통이 불가능할 정도의 간극(間隙)이 패여 있고, 한 인간의 삶도 옮겨 다니는 장들에 따라 뚝뚝 끊어지기도 한다고 말한다. 훗날 저자는 가로지르기의 개념과 실천을 통해서 간극들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가로지르기]는 교보문고에서 우연히 보고 매료되어 산 책이다. 출간 연도인 1997년의 일이니 3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간 구입해 소장하고 있는 그의 책은 [가로지르기]에서 [세계철학사 1, 2, 3, 4]까지 모두 27권이다. 그간 서평을 한 권도 쓰지 못했다. 저자의 '가로지르기'는 기존 학문의 격자와 고정된 담론의 경계를 넘나들며 독자적인 사유를 펼치는 것을 말한다. 물론 저자는 가로지르기는 인간의 문제로 귀결되는 바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은 아니고 그것을 통해 기존 담론 체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새유를 창조했을 때 의미 있는 작업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230 페이지) 

 

저자는 가로지르기를 하는 데 이공계 학문을 공부한 것이 큰 행운이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서울대학교에서 공학, 미학을 공부했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물리학, 생물학, 독일 문학, 역사학 등 담론 세계를 가로지르는 긴 유목(遊牧)을 시작한 저자는 30대 중반까지도 그것이 힘들었고 어딘가에 정착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유목이 자신의 사유라는 것을, 그때까지 힘겹게 했던 가로지르기가 자신의 사유의 본질이고 스타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정처 없이 유목하던 저자는 결국 유목 자체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되었고 역설적으로 표현해서 유목에, 가르지르기에 안착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저자의 유목 분야 중 물리학이 눈에 띈다. 나는 내가 관계하는 지구과학보다 더 물리학 책을 많이 읽는 때도 있다. 저자는 [주역(周易)]에서 늘 관심 있게 생각했던 지도리(기; 機)란 개념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의 책 가운데 [시간의 지도리에 서서]가 있다. 저자는 전파과학사에서 나온 작은 문고본 책들을 통해 비로소 넓은 안목에서 과학을 보게 되었다고 말한다. 오로지 교과서들만을 가지고서 과학 공부를 하는 것은 결코 좋은 방식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양자(量子)가 진동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에너지의 불연속을 함축하며 이것은 에너지를 연속적인 무엇으로 파악했던 이전의 생각을 무너뜨렸다. 이것은 물질에 대한 사유의 역사에서 중요한 하나의 지도리를 형성한다.(212 페이지) 주역(周易)에 나오는 지도리는 세상을 움직이고 인간의 삶을 바꾸는 가장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핵심 기틀을 의미한다. 

 

저자는 파(波)는 물질이 아니라 에너지를 이동시킨다고 말하며 입자들이 파를 전달시킨다고 말하는 것과 입자들이 파(波)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고 덧붙인다. 루이 드 브로이의 물질파 개념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저자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삶 죽음 운명]에도 그 이야기가 나온다. 내게 특별히 재미 있게 느껴진 부분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나오는 데미우르고스, 파라데이그마, 코라, 아낭케를 논한 부분 등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를 다시 읽을 필요를 느낀다. 

 

저자는 한국에는 유독 하이젠베르크의 책들만이 많이 소개되어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최근 여러 물리학자들의 책이 번역되어 나왔다. 눈에 띄는 것은 이탈리아 물리학자들의 책이다. 특히 카를로 로벨리의 책이 그렇다. 이라크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짐 알칼릴리도 내가 즐겨 읽는 물리학 책 저자다. 저자는 양자역학과 더불어 열역학에 깊은 흥미를 가졌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열역학은 열이라는 존재를 한 계의 부피, 압력, 온도의 개념을 통해 다룬다.(233 페이지) 이는 열역학이 열 현상을 철저하게 외부적 시선으로, 객관적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 뜨겁다는 감각적 사실은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몸의 차원에서는 현상학적으로는 열이란 무엇보다 뜨거움을 통해 지각된다. 저자에 의하면 기하학은 색도, 맛, 냄새, 촉감도, 또 인간도, 의미와 가치, 역사도 없는, 오로지 형태만이 존재하는 추상성을 다룬다.(189 페이지) 그러나 이 추상성의 세계에 입문해야만 비로소 과학의 세계에 들어설 수 있다. 이를 지구과학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지질학은 지구를 위도와 경도, 판의 경계, 변환 단층이라는 기하학적 선과 도표로 파악한다. 지진을 릭터 규모나 진도(震度) 같은 추상적인 숫자와 에너지 단위로 다룬다. 그러나 인간에게 지진은 대지가 흔들리고, 서 있는 발밑이 무너지며, 삶의 터전이 파괴되는 절대적인 공포와 감각의 경험이다. 

 

과학은 지구를 선과 도형으로 단순화(추상화)하여 규칙을 찾아내지만, 그것이 현상학적 몸과 만날 때 재난의 역사가 된다. 저자가 말했듯 나이가 든다는 것은 관심이 점차 좁아진다는 것을 뜻한다.(249 페이지) 나의 경우 문학에 관심이 거의 사라진 것은 관심이 좁아진 것을 반영한다. 저자는 생물학은 꾸준히 공부해온 담론이고 앞으로도 평생토록 많은 시간을 바칠 영역이라 말한다.(250 페이지) 나의 경우는 어떤가? 생물학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그리 쉽지는 않다. 

 

저자는 물질, 에너지, 정보가 생명체 이해의 근간을 이룬다고 말한다. 2001년 무렵 기(氣) 수련을 하며 기(氣)를 물질, 에너지, 정보로 놓고 보려했던 것이 생각난다. 생명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진화다. 저자는 진화의 과정이란 결국 생명체들이 시간에 처해서, 차이의 운동에 처해서 스스로의 동일성을 계속 바꾸어 나간 역사 이외의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263 페이지) 상당히 인상적인 말이다. 

 

2부 ‘과학의 세계’편에 특이하게도 계급 투쟁의 역사와 정치경제학 이야기가 나온다. 다음 말을 보라. “갈릴레오는 진공상태 및 마찰이 없는 바닥을 가정하고 역학적 법칙을 세운 후 거기에 실제 현실에서 고려해야 할 변수들을 부가해서 물체의 운동을 위한 함수를 세웠다. 이런 인식 방법은 근대 과학의 인식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고 주류 경제학 역시 이런 방법을 구사한다. 주류 경제학이 우선 전제하는 완전 경쟁 시장의 모델이 그것이다. 이 시장에서 이기성과 합리성을 본질로 하는 개인들이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물건을 사고 판다.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개인은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개인이기도 하고 그래서 우리는 자유주의 정치철학과 주류 경제학이 맞물려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273 페이지) 

 

과학과 경제학 또는 사회과학이 맞물려 있음을 알게 하는 글이다. 주류 경제학(신고전파 경제학)은 갈릴레오의 진공 상태를 사회과학에 그대로 가져왔다. 복잡한 인간의 감정과 윤리를 모두 지워버리고 오직 ‘철저하게 이기적이고 완벽하게 합리적인 존재(Homo Economicus)’만을 가정한 것이다. 마찰이 없는 바닥처럼 독과점이나 정보의 비대칭이 전혀 없는 완전 경쟁 시장이라는 가상의 실험실을 만들었다. 이 진공 상태에서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라는 수학적 균형 함수를 세우고, 현실의 왜곡(정부 규제, 독점 등)은 나중에 고려해야 할 사소한 변수로 취급한다. 

 

저자의 맥락으로 돌아가면 갈릴레오의 이 선택은 생생한 현실(마찰이 있는 세상)을 배반하고 오직 형태와 수식만 존재하는 추상성의 세계로 진입한 사건이다. 역설적이게도 현실을 그대로 관찰하기를 포기하고 ‘가상의 진공’을 상상했기 때문에 인류는 근대 과학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얻을 수 있었다. 저자는 지적 유목을 시작한 후로 자연과학, 사회과학, 역사, 문학 등 여러 담론의 세계를 유랑했지만 결국 철학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후에도 과학 철학, 그리스 철학, 프랑스 철학, 동양 철학 등 철학 세계 내에서의 유랑은 계속되었고 지금은 결국 철학의 테두리에서도 벗어나 버렸다고 말한다. 

 

물론 오랜 기간 동안 철학에 몰두했기 때문에 철학이 자신의 사유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긴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철학자라고도 또는 다른 무엇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저 사유하는 사람, 저작 활동과 교육활동을 하는 사람 정도라고 생각할 뿐이라고 말한다. 오랜 시간 동안 유목을 해왔기 때문에 이제는 유목이 특별히 유목으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신의 사유가 흘러가는 대로 사유하고 글을 쓸뿐이며 그런 가로지르기의 사유, 유목의 사유가 자신에게는 오히려 더 편안하고 친숙하다고 말한다.(285 페이지) 

 

저자는 과학도 예술도 다른 모든 것들도 현실과 상관적으로 이루어질 때 우리 삶으로부터 괴리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메를로 퐁티의 존재론적 환원주의는 거부해야겠지만 우리로 하여금 지각된 세계의 의미를 계속 생각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현상학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무엇인가에 매료되었던 적이 없는 사람이 그것에 대한 의미 있는 비판을 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299 페이지) 

 

저자는 항상 철학, 과학, 문학 세 가지가 혼효(混淆)되어 있는 사유를 원했던 지금도 그렇다고 말한다. 혼효(混淆)란 서로 다른 성질의 것들이 뒤섞여 하나로 합쳐짐을 뜻하는 말이다. 저자가 철학적 개안(開眼)을 하게 된 것은 박홍규 선생의 베르그송 강의를 들으면서부터다. 저자는 자연과학을 공부하면서 가지게 된 물질, 생명, 정신에 대한 형이상학적 관심사에 대해 말한다. 베르그송은 결정론과 자유의지 논쟁이 한참 절정에 올랐을 때 사유를 시작했다.(313 페이지) 저자는 호모 사피엔스는 성인을 모델로 한 편협한 개념일 뿐이라 말한다. 

 

3부 ‘철학 마을 가로지르기‘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나 자신의 사유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래 한동안 몰두했던 작업은 베르그송과 바슐라르의 비교였다.”(321 페이지) [담론의 공간]에 관련 이야기가 나온다. “현대 철학은 베르그송의 철학이 대전제로 삼고 있는 연속의 원리를 포기함으로써 성립했다. 바슐라르, 캉길렘, 알튀세, 푸코, 세르 등의 인식론, 다양한 구조주의적 인간과학들, 카타스트로피 이론, 분자생물학, 아날학파, 게르의 철학사 등등 우리는 오늘날 도처에서 불연속의 개념을 만난다. 불연속은 현대사회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275 페이지)  

 

저자는 맹목적 탈주도 시대착오적인 회귀도 아닌, 탈주와 회귀 사이에서 근대성을 제고한다는 것, 그로써 전통 – 근대 - 탈근대가 모두 균형 있게 성찰되는 사유를 시도한다는 것, 그것이 자신의 목적이었다고 말한다. 이런 과정에서 자신이 발견한 인물이 바로 다산 정약용이었다고 말한다.(338 페이지) 저자는 자신이 다산에게서 발견한 것은 자본주의적 주체와 대비되는 도덕적 주체였다고 말한다. 저자는 우리가 실학이라고 통칭하는 담론들이 대체적으로 실사구시의 성격을 띤 담론이었던 데 비해 다산만은 동북아 전통의 핵을 형성하는 경학(經學)의 세계를 정면 돌파하려 했다고 말한다. 바로 여기에 철학자로서의 다산의 위대함이 있다고 말한다. 물론 이때의 경학은 좁은 의미의 경학만이 아니라 사서(四書)까지 포함한다. 사서를 편찬한 것이 주자이고 보면 다산에게 사서의 새로운 독해는 무엇보다 중요한 의미를 띤다고 하겠다. 

 

2025년 11월 나온 한형조 교수의 [두 개의 논어]를 감명 깊게 읽은 기억이 새롭다. 두 개의 논어란 주자가 본 논어, 다산이 본 논어를 말한다. 이정우 교수에 의하면 다산은 주자를 넘어서기 위한 노력을 한평생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나는 [두 개의 논어]의 많은 부분에서 다산의 해석에 공감했다. 이런 대립 구도는 주자와 다산의 맹자 이해로 이어진다. 다산은 [맹자요의]를 통해서 도덕적 주체를 다루고 있거니와 그가 맹자의 해독을 통해서 말하려 했던 것은 주자와 상반된다. 주자와 다산의 맹자 이해 - 사실 맹자는 두 가지의 해석을 다 허용한다고 생각한다 - 는 칸트와 스피노자의 대립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칸트가 현실적인 좋음과 나쁨으로부터 아예 단절을 이루는 도덕을 세우려 했다면 스피노자는 기독교적인 선악을 넘어서 현실 내재적인 윤리를 세우려 했다. 이와 유사하게 다산은 주자의 본질주의 및 초월적 도덕주의를 비판하고 노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윤리를 세우려 했던 것이다.(341 페이지) 나는 이런 대립 구도를 좋아한다. 저자에게는 레비스트로스의 투명한 초합리주의보다 클라스트르의 이야기가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클라스트로의 [폭력의 고고학]도 꼭 읽어보길 바란다고 저자는 말한다. 클라스트로의 인류학은 과거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미래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한다. 

 

나는 고고학보다 인류학에 마음이 간다. 저자는 라이프니츠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관심이 있었다고 말한다. 들뢰즈는 서구 존재론의 용광로다. [차이와 반복]이 세계의 심층을 다룬다면 [의미의 논리]는 표층을 다룬다. 전자가 잠재성의 세계를 다룬다면 후자는 현실성의 세계를 다룬다. 저자에게 [차이와 반복]은 기(氣)의 사유로, [의미의 논리]는 역(易)의 사유로 다가왔다. 세계의 잠재성은 기(氣)이고 기화(氣化)의 결과로서의 생성이 역(易)이기 때문이다.(358 페이지) 

 

심층과 표층은 본래 지질학 및 지형학에서 쓰이는 용어이지만 질 들뢰즈의 철학에서는 이를 인간의 존재와 의미의 발생을 설명하는 공간적 은유의 의미를 지닌다. 저자는 프락탈 이론을 처음 접했을 때 무릎을 쳤다고 말한다. 역(易)과 라이프니츠를 읽으면서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주름 개념이 그야말로 시각적으로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프락탈의 주름이 구상적인 주름, 기하학적인 주름이라면 역(易)과 라이프니츠의 주름은 훨씬 추상적인 주름, 존재론적인 주름이라는 점에서 즉물적으로 동일시할 수는 없다.(363 페이지) 

 

나는 라이프니츠의 주름 논의의 핵심인 접힘과 펼쳐짐론을 보며 접힘을 지구 내부의 단층에 의한 스트레스 축적으로, 펼쳐짐을 스트레스가 한계를 넘을 때 에너지가 급격히 표출되는 것으로 설명하다가 그만 두었다. 라이프니츠 철학에서는 겉으로는 복잡하고 무질서해 보이는 세상의 이면(裏面)에 엄격한 수학적 질서가 있다. 단층론에는 종잡을 수 없는 현상 이면에 엄밀한 물리학적 질서가 있다. 

 

모나드론이 한 개체에 다른 개체들이 반영된 채 세계의 시간이 그물망처럼 접혀 있다고 보듯 단층에 의한 지진론 역시 프랙탈 같은 구조로 엮여 있다고 본다. 물론 모나드론은 형이상학적이다. 이 세계가 신이 창조한 가능한 최선의 세계라는 라이프니츠의 사상을 예전에는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이라고 그런 거부감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지만 세상의 메커니즘이 절묘하다는 생각은 더해진 느낌이다. 

 

책의 결론격의 이야기는 이렇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자연과학적 관심을 인간과 문화에까지 확장시킬 때 늘 불만족스럽고 나아가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결과들이 나오곤 한다. 자연과하기 사회과학, 인문학을 가로지르면서 종합적 사유를 하는 것은 매혹적인 일이다. 문제는 자연과학에서 세운 어떤 관점이나 이론을 사회과학, 인문학을 가로지르는 과정 없이 곧바로 확장해서 인간과 문화를 이야기하는 경우다. 그럴 경우 늘 조야(粗野)한 결과로 이어진다. 그것은 문학적 자연관을 자연과학 공부를 거치지 않은 채 그대로 자연에 투사해서 얻게 되는 결론이 우스꽝스러운 것과 똑같이 우스꽝스럽다.”(368 페이지) 철학을 다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물론 과학과 함께 하는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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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투의스케치북 2026-08-16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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