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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독 - 유목적 사유의 탄생
이정우 지음 / 아고라 / 2016년 12월
평점 :
탐독(耽讀)이란, 책을 즐겨 읽는 것을 말한다. 유목적 사유의 탄생이란 부제를 가진 [탐독]은 철학자 이정우 교수의 책이다. 정확히 20년전인 2006년 아고라 출판사에서 나왔다. [탐독]은 내가 구입한 저자의 첫 번째 책이 아니다. 첫 번째 책은 1997년에 나온 [가로지르기]이고 두 번째 책은 1994년에 나온 [담론의 공간]이다. 순서대로 읽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저자는 자신이 책의 세계, 지성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중학교에나 가서였다고 말한다. 목차는 문학, 철학, 과학의 3부로 이루어졌다. 이 순서는 아마도 일반적인 사람들이 읽는 순서가 아닌가 싶다. 물론 저자는 철학자이기에 세 분야의 책을 두루 읽을 것이고 특히 과학과 철학을 함께 읽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문학 애호 시기를 지난 지 오래다. 그럼에도 평론에 대해서는 마음이 열려 있다. 저자는 에밀 졸라의 [목로 주점]을 철학과의 관계 하에서 이야기한다. 저자는 먼 훗날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 매료되었을 때 [목로주점]을 역사적으로, 철학적으로 재발견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궁금한 것은 저자는 문학을 여전히 사랑하는가?다. 저자가 중요하게 거론하는 책이 [삼국지연의]다. 유비, 조조 등이 등장하는 책이다. [주름, 갈래, 울림]에서 저자가 라이프니츠 철학을 이야기할 때 유비, 제갈량 등을 이야기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익히 알고 있는 소설과는 다른 갈래의 인물들을 상상해보자는 것이다.
저자는 [연의]를 읽는 시간을 늘 행복했다고 말한다. 특히 제갈량은 자신에게 하나의 꿈이요 이상이요 낭만이었다고 말한다. 마지막까지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갸륵한 마음과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면서 삶이 다할 때까지 온몸을 살라 쟁투하는 모습이 삶의 한 모델이 되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이제 그 시간으로 아득한 저편으로 사라져 갔으니 시간이야말로 누구도 대적하지 못할 절대적 힘이 아니던가라고 말한다.
저자는 베르그송의 말처럼 시는 우리에게 새로운 형태의 지각을 준다고 말한다. 저자는 시는 우리에게 이미 드러나 있으나 우리의 둔한 지각이나 때묻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저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이야기한다. 이틀 또는 사흘이란 빠른 시간에 침식을 잊고서 몰두한 소설은 그 전에도 또 그 후에도 없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지적인 성향으로 말한다면 자신은 과학적 성향보다는 인문학적 성향이 더 강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저자의 부모님은 저자가 의사가 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그러나 병원에 몇 달씩 입원했을 때 의사라는 직업이 얼마나 고단한 것인가를 알게 된 어머니 덕분에 의사에의 길을 일찍 접을 수 있었다고 한다.
찰스 다윈의 사례와 비슷한 듯 다르다. 다윈은 1827년 에든버러 대학교 의대에 진학했으나 마취 없이 진행되던 당시 수술 장면과 끔찍한 시체 해부에 큰 충격을 받고 2년 만에 중퇴하고 의사의 길을 포기했다. 그 후 다윈이 간 곳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였고 전공은 신학이었다. 나는 어떤 유형일까? 2020년 지질해설사의 길에 들어선 이래 과학에 집중하고 있지만 문득 문득 인문에의 향수 같은 것을 느낀다. 이는 아직 내가 과학과 함께 인문을 공부하는 단계에 들어서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저자는 과학의 세계에 접근하면서 세계의 또 다른 차원을 볼 수 있었고, 그런 경험이 자신의 사유를 아니 어쩌면 자신의 감성과 가치관까지도 상당히 바꾸어 놓았던 것 같다고 말한다. 과학을 공부하면서 그리고 훗날 철학을 공부하면서 저자는 예전과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 되었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고 말한다. 한 인간은 직업, 전공, 계층을 비롯해 자신이 속해 있는 장(場)의 영향을 결코 벗어날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래서 장과 장 사이에는 거의 소통이 불가능할 정도의 간극(間隙)이 패여 있고, 한 인간의 삶도 옮겨 다니는 장들에 따라 뚝뚝 끊어지기도 한다고 말한다. 훗날 저자는 가로지르기의 개념과 실천을 통해서 간극들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가로지르기]는 교보문고에서 우연히 보고 매료되어 산 책이다. 출간 연도인 1997년의 일이니 3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간 구입해 소장하고 있는 그의 책은 [가로지르기]에서 [세계철학사 1, 2, 3, 4]까지 모두 27권이다. 그간 서평을 한 권도 쓰지 못했다. 저자의 '가로지르기'는 기존 학문의 격자와 고정된 담론의 경계를 넘나들며 독자적인 사유를 펼치는 것을 말한다. 물론 저자는 가로지르기는 인간의 문제로 귀결되는 바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은 아니고 그것을 통해 기존 담론 체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새유를 창조했을 때 의미 있는 작업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230 페이지)
저자는 가로지르기를 하는 데 이공계 학문을 공부한 것이 큰 행운이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서울대학교에서 공학, 미학을 공부했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물리학, 생물학, 독일 문학, 역사학 등 담론 세계를 가로지르는 긴 유목(遊牧)을 시작한 저자는 30대 중반까지도 그것이 힘들었고 어딘가에 정착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유목이 자신의 사유라는 것을, 그때까지 힘겹게 했던 가로지르기가 자신의 사유의 본질이고 스타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정처 없이 유목하던 저자는 결국 유목 자체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되었고 역설적으로 표현해서 유목에, 가르지르기에 안착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저자의 유목 분야 중 물리학이 눈에 띈다. 나는 내가 관계하는 지구과학보다 더 물리학 책을 많이 읽는 때도 있다. 저자는 [주역(周易)]에서 늘 관심 있게 생각했던 지도리(기; 機)란 개념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의 책 가운데 [시간의 지도리에 서서]가 있다. 저자는 전파과학사에서 나온 작은 문고본 책들을 통해 비로소 넓은 안목에서 과학을 보게 되었다고 말한다. 오로지 교과서들만을 가지고서 과학 공부를 하는 것은 결코 좋은 방식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양자(量子)가 진동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에너지의 불연속을 함축하며 이것은 에너지를 연속적인 무엇으로 파악했던 이전의 생각을 무너뜨렸다. 이것은 물질에 대한 사유의 역사에서 중요한 하나의 지도리를 형성한다.(212 페이지) 주역(周易)에 나오는 지도리는 세상을 움직이고 인간의 삶을 바꾸는 가장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핵심 기틀을 의미한다.
저자는 파(波)는 물질이 아니라 에너지를 이동시킨다고 말하며 입자들이 파를 전달시킨다고 말하는 것과 입자들이 파(波)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고 덧붙인다. 루이 드 브로이의 물질파 개념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저자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삶 죽음 운명]에도 그 이야기가 나온다. 내게 특별히 재미 있게 느껴진 부분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나오는 데미우르고스, 파라데이그마, 코라, 아낭케를 논한 부분 등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를 다시 읽을 필요를 느낀다.
저자는 한국에는 유독 하이젠베르크의 책들만이 많이 소개되어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최근 여러 물리학자들의 책이 번역되어 나왔다. 눈에 띄는 것은 이탈리아 물리학자들의 책이다. 특히 카를로 로벨리의 책이 그렇다. 이라크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짐 알칼릴리도 내가 즐겨 읽는 물리학 책 저자다. 저자는 양자역학과 더불어 열역학에 깊은 흥미를 가졌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열역학은 열이라는 존재를 한 계의 부피, 압력, 온도의 개념을 통해 다룬다.(233 페이지) 이는 열역학이 열 현상을 철저하게 외부적 시선으로, 객관적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 뜨겁다는 감각적 사실은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몸의 차원에서는 현상학적으로는 열이란 무엇보다 뜨거움을 통해 지각된다. 저자에 의하면 기하학은 색도, 맛, 냄새, 촉감도, 또 인간도, 의미와 가치, 역사도 없는, 오로지 형태만이 존재하는 추상성을 다룬다.(189 페이지) 그러나 이 추상성의 세계에 입문해야만 비로소 과학의 세계에 들어설 수 있다. 이를 지구과학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지질학은 지구를 위도와 경도, 판의 경계, 변환 단층이라는 기하학적 선과 도표로 파악한다. 지진을 릭터 규모나 진도(震度) 같은 추상적인 숫자와 에너지 단위로 다룬다. 그러나 인간에게 지진은 대지가 흔들리고, 서 있는 발밑이 무너지며, 삶의 터전이 파괴되는 절대적인 공포와 감각의 경험이다.
과학은 지구를 선과 도형으로 단순화(추상화)하여 규칙을 찾아내지만, 그것이 현상학적 몸과 만날 때 재난의 역사가 된다. 저자가 말했듯 나이가 든다는 것은 관심이 점차 좁아진다는 것을 뜻한다.(249 페이지) 나의 경우 문학에 관심이 거의 사라진 것은 관심이 좁아진 것을 반영한다. 저자는 생물학은 꾸준히 공부해온 담론이고 앞으로도 평생토록 많은 시간을 바칠 영역이라 말한다.(250 페이지) 나의 경우는 어떤가? 생물학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그리 쉽지는 않다.
저자는 물질, 에너지, 정보가 생명체 이해의 근간을 이룬다고 말한다. 2001년 무렵 기(氣) 수련을 하며 기(氣)를 물질, 에너지, 정보로 놓고 보려했던 것이 생각난다. 생명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진화다. 저자는 진화의 과정이란 결국 생명체들이 시간에 처해서, 차이의 운동에 처해서 스스로의 동일성을 계속 바꾸어 나간 역사 이외의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263 페이지) 상당히 인상적인 말이다.
2부 ‘과학의 세계’편에 특이하게도 계급 투쟁의 역사와 정치경제학 이야기가 나온다. 다음 말을 보라. “갈릴레오는 진공상태 및 마찰이 없는 바닥을 가정하고 역학적 법칙을 세운 후 거기에 실제 현실에서 고려해야 할 변수들을 부가해서 물체의 운동을 위한 함수를 세웠다. 이런 인식 방법은 근대 과학의 인식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고 주류 경제학 역시 이런 방법을 구사한다. 주류 경제학이 우선 전제하는 완전 경쟁 시장의 모델이 그것이다. 이 시장에서 이기성과 합리성을 본질로 하는 개인들이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물건을 사고 판다.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개인은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개인이기도 하고 그래서 우리는 자유주의 정치철학과 주류 경제학이 맞물려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273 페이지)
과학과 경제학 또는 사회과학이 맞물려 있음을 알게 하는 글이다. 주류 경제학(신고전파 경제학)은 갈릴레오의 진공 상태를 사회과학에 그대로 가져왔다. 복잡한 인간의 감정과 윤리를 모두 지워버리고 오직 ‘철저하게 이기적이고 완벽하게 합리적인 존재(Homo Economicus)’만을 가정한 것이다. 마찰이 없는 바닥처럼 독과점이나 정보의 비대칭이 전혀 없는 완전 경쟁 시장이라는 가상의 실험실을 만들었다. 이 진공 상태에서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라는 수학적 균형 함수를 세우고, 현실의 왜곡(정부 규제, 독점 등)은 나중에 고려해야 할 사소한 변수로 취급한다.
저자의 맥락으로 돌아가면 갈릴레오의 이 선택은 생생한 현실(마찰이 있는 세상)을 배반하고 오직 형태와 수식만 존재하는 추상성의 세계로 진입한 사건이다. 역설적이게도 현실을 그대로 관찰하기를 포기하고 ‘가상의 진공’을 상상했기 때문에 인류는 근대 과학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얻을 수 있었다. 저자는 지적 유목을 시작한 후로 자연과학, 사회과학, 역사, 문학 등 여러 담론의 세계를 유랑했지만 결국 철학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후에도 과학 철학, 그리스 철학, 프랑스 철학, 동양 철학 등 철학 세계 내에서의 유랑은 계속되었고 지금은 결국 철학의 테두리에서도 벗어나 버렸다고 말한다.
물론 오랜 기간 동안 철학에 몰두했기 때문에 철학이 자신의 사유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긴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철학자라고도 또는 다른 무엇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저 사유하는 사람, 저작 활동과 교육활동을 하는 사람 정도라고 생각할 뿐이라고 말한다. 오랜 시간 동안 유목을 해왔기 때문에 이제는 유목이 특별히 유목으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신의 사유가 흘러가는 대로 사유하고 글을 쓸뿐이며 그런 가로지르기의 사유, 유목의 사유가 자신에게는 오히려 더 편안하고 친숙하다고 말한다.(285 페이지)
저자는 과학도 예술도 다른 모든 것들도 현실과 상관적으로 이루어질 때 우리 삶으로부터 괴리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메를로 퐁티의 존재론적 환원주의는 거부해야겠지만 우리로 하여금 지각된 세계의 의미를 계속 생각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현상학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무엇인가에 매료되었던 적이 없는 사람이 그것에 대한 의미 있는 비판을 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299 페이지)
저자는 항상 철학, 과학, 문학 세 가지가 혼효(混淆)되어 있는 사유를 원했던 지금도 그렇다고 말한다. 혼효(混淆)란 서로 다른 성질의 것들이 뒤섞여 하나로 합쳐짐을 뜻하는 말이다. 저자가 철학적 개안(開眼)을 하게 된 것은 박홍규 선생의 베르그송 강의를 들으면서부터다. 저자는 자연과학을 공부하면서 가지게 된 물질, 생명, 정신에 대한 형이상학적 관심사에 대해 말한다. 베르그송은 결정론과 자유의지 논쟁이 한참 절정에 올랐을 때 사유를 시작했다.(313 페이지) 저자는 호모 사피엔스는 성인을 모델로 한 편협한 개념일 뿐이라 말한다.
3부 ‘철학 마을 가로지르기‘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나 자신의 사유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래 한동안 몰두했던 작업은 베르그송과 바슐라르의 비교였다.”(321 페이지) [담론의 공간]에 관련 이야기가 나온다. “현대 철학은 베르그송의 철학이 대전제로 삼고 있는 연속의 원리를 포기함으로써 성립했다. 바슐라르, 캉길렘, 알튀세, 푸코, 세르 등의 인식론, 다양한 구조주의적 인간과학들, 카타스트로피 이론, 분자생물학, 아날학파, 게르의 철학사 등등 우리는 오늘날 도처에서 불연속의 개념을 만난다. 불연속은 현대사회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275 페이지)
저자는 맹목적 탈주도 시대착오적인 회귀도 아닌, 탈주와 회귀 사이에서 근대성을 제고한다는 것, 그로써 전통 – 근대 - 탈근대가 모두 균형 있게 성찰되는 사유를 시도한다는 것, 그것이 자신의 목적이었다고 말한다. 이런 과정에서 자신이 발견한 인물이 바로 다산 정약용이었다고 말한다.(338 페이지) 저자는 자신이 다산에게서 발견한 것은 자본주의적 주체와 대비되는 도덕적 주체였다고 말한다. 저자는 우리가 실학이라고 통칭하는 담론들이 대체적으로 실사구시의 성격을 띤 담론이었던 데 비해 다산만은 동북아 전통의 핵을 형성하는 경학(經學)의 세계를 정면 돌파하려 했다고 말한다. 바로 여기에 철학자로서의 다산의 위대함이 있다고 말한다. 물론 이때의 경학은 좁은 의미의 경학만이 아니라 사서(四書)까지 포함한다. 사서를 편찬한 것이 주자이고 보면 다산에게 사서의 새로운 독해는 무엇보다 중요한 의미를 띤다고 하겠다.
2025년 11월 나온 한형조 교수의 [두 개의 논어]를 감명 깊게 읽은 기억이 새롭다. 두 개의 논어란 주자가 본 논어, 다산이 본 논어를 말한다. 이정우 교수에 의하면 다산은 주자를 넘어서기 위한 노력을 한평생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나는 [두 개의 논어]의 많은 부분에서 다산의 해석에 공감했다. 이런 대립 구도는 주자와 다산의 맹자 이해로 이어진다. 다산은 [맹자요의]를 통해서 도덕적 주체를 다루고 있거니와 그가 맹자의 해독을 통해서 말하려 했던 것은 주자와 상반된다. 주자와 다산의 맹자 이해 - 사실 맹자는 두 가지의 해석을 다 허용한다고 생각한다 - 는 칸트와 스피노자의 대립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칸트가 현실적인 좋음과 나쁨으로부터 아예 단절을 이루는 도덕을 세우려 했다면 스피노자는 기독교적인 선악을 넘어서 현실 내재적인 윤리를 세우려 했다. 이와 유사하게 다산은 주자의 본질주의 및 초월적 도덕주의를 비판하고 노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윤리를 세우려 했던 것이다.(341 페이지) 나는 이런 대립 구도를 좋아한다. 저자에게는 레비스트로스의 투명한 초합리주의보다 클라스트르의 이야기가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클라스트로의 [폭력의 고고학]도 꼭 읽어보길 바란다고 저자는 말한다. 클라스트로의 인류학은 과거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미래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한다.
나는 고고학보다 인류학에 마음이 간다. 저자는 라이프니츠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관심이 있었다고 말한다. 들뢰즈는 서구 존재론의 용광로다. [차이와 반복]이 세계의 심층을 다룬다면 [의미의 논리]는 표층을 다룬다. 전자가 잠재성의 세계를 다룬다면 후자는 현실성의 세계를 다룬다. 저자에게 [차이와 반복]은 기(氣)의 사유로, [의미의 논리]는 역(易)의 사유로 다가왔다. 세계의 잠재성은 기(氣)이고 기화(氣化)의 결과로서의 생성이 역(易)이기 때문이다.(358 페이지)
심층과 표층은 본래 지질학 및 지형학에서 쓰이는 용어이지만 질 들뢰즈의 철학에서는 이를 인간의 존재와 의미의 발생을 설명하는 공간적 은유의 의미를 지닌다. 저자는 프락탈 이론을 처음 접했을 때 무릎을 쳤다고 말한다. 역(易)과 라이프니츠를 읽으면서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주름 개념이 그야말로 시각적으로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프락탈의 주름이 구상적인 주름, 기하학적인 주름이라면 역(易)과 라이프니츠의 주름은 훨씬 추상적인 주름, 존재론적인 주름이라는 점에서 즉물적으로 동일시할 수는 없다.(363 페이지)
나는 라이프니츠의 주름 논의의 핵심인 접힘과 펼쳐짐론을 보며 접힘을 지구 내부의 단층에 의한 스트레스 축적으로, 펼쳐짐을 스트레스가 한계를 넘을 때 에너지가 급격히 표출되는 것으로 설명하다가 그만 두었다. 라이프니츠 철학에서는 겉으로는 복잡하고 무질서해 보이는 세상의 이면(裏面)에 엄격한 수학적 질서가 있다. 단층론에는 종잡을 수 없는 현상 이면에 엄밀한 물리학적 질서가 있다.
모나드론이 한 개체에 다른 개체들이 반영된 채 세계의 시간이 그물망처럼 접혀 있다고 보듯 단층에 의한 지진론 역시 프랙탈 같은 구조로 엮여 있다고 본다. 물론 모나드론은 형이상학적이다. 이 세계가 신이 창조한 가능한 최선의 세계라는 라이프니츠의 사상을 예전에는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이라고 그런 거부감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지만 세상의 메커니즘이 절묘하다는 생각은 더해진 느낌이다.
책의 결론격의 이야기는 이렇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자연과학적 관심을 인간과 문화에까지 확장시킬 때 늘 불만족스럽고 나아가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결과들이 나오곤 한다. 자연과하기 사회과학, 인문학을 가로지르면서 종합적 사유를 하는 것은 매혹적인 일이다. 문제는 자연과학에서 세운 어떤 관점이나 이론을 사회과학, 인문학을 가로지르는 과정 없이 곧바로 확장해서 인간과 문화를 이야기하는 경우다. 그럴 경우 늘 조야(粗野)한 결과로 이어진다. 그것은 문학적 자연관을 자연과학 공부를 거치지 않은 채 그대로 자연에 투사해서 얻게 되는 결론이 우스꽝스러운 것과 똑같이 우스꽝스럽다.”(368 페이지) 철학을 다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물론 과학과 함께 하는 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