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게 되는 한국사 - 머리에 새기고 마음에 남기는
김재원 지음 / 빅피시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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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저잣거리 지식 중개상으로 소개하는 김재원은 대중서 한 권이 나오려면 수십, 수백 명 연구자의 연구 성과에 기대어야 한다고 말한다. 책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근대사와 현대사이다. 저자에 의하면 근대라는 개념은 대단히 논쟁적인 말이다.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근대를 개항 전후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본다. 저자는 글의 초반부가 조금 복잡하고 어려워 보여도 인내심을 가지고 읽기를 바라는 마음을 내보인다. 책의 제목은 [울게 되는 한국사]이다. 부제는 '머리에 새기고 마음에 남기는'이다.

 

저자는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결말보다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우리는 결말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나온 말이고 교훈을 위해 과정을 되살펴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가슴 아픈 사건은 동학도(東學徒)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 조정이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한 것이다. 갑신정변으로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맺어진 톈진 조약에 의하면 일본은 조선에 대해 청과 동일한 파병권을 갖는다는 조항이 있다. 청나라 군대가 인천에 상륙한다는 소식이 일본에 전해졌다. 조선에서 청과 일 양국 군대는 동시에 철수하고 동시에 파병한다는 톈진 조약을 핑계로 일본군 1만 명이 조선에 파병되었다. 저자는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뒤늦게 상황 파악을 한 조선 조정이 농민군과 교섭을 벌이려 했지만 이미 상황은 걷잡을 수 없었다고.(47 페이지)

 

청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파병한 것은 농민군 진압이라는 명분에 의한 것이지만 내심은 일본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일본 역시 다르지 않았다. 두 나라가 전쟁을 벌이자 농민군의 전투 대상이 조선 관군에서 일본군으로 바뀌었다. 협상 대상인 조선 조정이 일본과 뜻을 함께하는 모양새가 된 까닭이었다.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자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선이 자주권을 가진 중립국이기를 바랐던 것일 뿐 그 이상의 군사적 충돌은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의 입장은 달랐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삼국(프랑스, 독일, 러시아) 간섭으로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고 요동 반도를 포기하는 대가로 기존 배상금 2억량의 추가로 3천만 냥을 얻어내고는 치욕적으로 물러나야 했다.

 

일본은 러시아와 연결된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사건을 벌이고 만다. 조선이 가장 치욕스러웠던 부분은 사건을 추적할 만한 단서가 많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대원군이 일본인 낭인들을 시켜 민비를 살해했다는 루머가 떠돌았다. 살기 위해, 다른 누군가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숨 가쁘게 내달리던 조선은 다시 한반도에서의 열강 간의 균형추를 맞추려고 시도했다. 기울어진 일본으로의 추를 러시아 쪽으로 돌려놓기 위한 노력이었다. 고종은 변화하는 세계정세에 적응하기 위해 홀로서기를 강행했다. 대한제국이라는 얇디얇은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말이다.(60 페이지)

 

저자는 동학도와 농민들이 세상을 바꾸자며 죽창을 들었고, 이들을 진압한다는 핑계로 일본과 청나라가 조선 땅에서 전쟁을 벌였다고 말하며 승전 과정에서 일본이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높였고 러시아와 대립각을 세우다 조선의 왕후가 암살당하는 초유의 사건까지 벌어졌다고 말한다.(61 페이지) 여기서 문장을 볼 필요가 있다. 러시아와 대립각을 세운 것은 일본이고, 암살당한 것은 왕후다. 주체가 다른 것이다. 그러니 일본이 러시아와 대립각을 세운 끝에 조선의 왕후를 암살했다고 말해야 자연스럽다.

 

일본이 왕후를 암살한 을미사변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아관파천으로 개화파 인사들 내부의 세력 균형이 재배치되었다. 개화파 내부의 친일 인사들이 일선에서 물러나고 독립 협회라는 새로운 거대 정치세력이 탄생했다. 1895년 을미사변, 1896년 아관파천, 1897년 대한제국 수립이라는 큰 분수령이 만들어졌다. 1898년 독립 협회가 서울 종로 광장에서 한국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대중집회인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 만민 공동회는 아관파천 이후 심해진 외세의 이권 침탈을 막아내고 백성들의 권리를 지키며 나라의 정치를 개혁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집회였다.

 

황국 협회는 독립 협회가 왕을 쫓아내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황국협회는 고종 황제의 황권 강화와 보수파 정부를 지지하기 위해 결성된 친 정부 성향의 어용 단체다. 고종은 군대를 동원해 독립 협회를 강제 해산시켰다. 독립 협회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조직이 아니었다. 하지만 투쟁 과정이 너무도 독선적이고 급진적이었다. 1904123일 러일전쟁 직전 고종은 느닷없이 중립을 선포했다. 하지만 곧 전쟁터로 변해버린 한반도 땅에서 중립화 선언은 의미가 없었다.

 

일본은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었다. 그나마 일본을 견제하던 미국도 일본이 필리핀에서의 자국의 확고한 이권을 보장해주자 대한제국의 침략을 허용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고종은 나라를 위해 순직할 의지가 털끝만큼도 없었던 황제였다. 1907년 헤이그 특사단이 파견되었다. 평화회의 의장국이던 러시아가 대한제국의 참가를 일본에 알렸다. 일본은 현실적인 방법으로 대한제국의 평화회의 참가를 무력화하려 했다. 통감부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 대한제국 법부는 이상설에게 사형을, 이준과 이위종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1910822일 창덕궁 흥복헌에서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었다. 1905년 덕수궁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된 지 5 년만의 일이었다. 3.1 만세운동 직후인 1920년까지 신흥 무관 학교는 1천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고, 3천여 명의 독립군을 양성했다. 이들은 간도 더 넓게는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행해진 독립전쟁의 지도자로 성장했고 바로 1920년대에 피 터지는 독립전쟁의 주인공이 되었다. 울게 되는 한국사라고만은 할 수 없는 내용이 청산리, 봉오동 전투다. 한 때 대첩(大捷)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그 표현이 무색하게 이후 독립군의 무장투쟁에 침체를 가져왔다.

 

농토를 잃고 일자리를 잃은 조선인들은 일본으로 건너가야 했다. 재일 조선인 대부분은 잡부나 일용직 노동자와 같은 하층 노동자로 살아가거나 탄광 노동자와 같은 위험한 일을 일본인 대신 도맡았다. 19112500명에 지나지 않았던 재일 조선인은 19203만 명을 넘어섰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 병합한 후 조선인을 향한 멸시적 시선에 조선인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덧붙여졌다. 이 상황에서 1923년 간토(관동) 대지진이 일어났다. 지진 발생 직후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탔다는 유언비어가 빠르게 일본 사회에 퍼졌다.

 

우물에 독을 탔다는 작은 거짓은 자연재해를 틈타 조선인들이 일본인을 집단으로 폭행하고 약탈하거나 심지어 폭탄을 던지거나 부녀자를 겁탈하고 있다는 소문으로까지 번졌다. 일본인 자경 단원들에 의해 조선인을 향한 집단학살이 자행되었다. 1929년 미국발 세계 대공황으로 경제가 무너지면서 조선인들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이 차마 살 수 없는 곳에 움집이나 판잣집을 짓고 살아야 했던 조선인들은 1930년대 30만 명을 넘어섰다. 1930년 후반 중국 침략이 본격화하면서 중일전쟁이 시작되었고 1938년 국가 총동원법, 1939년 국민 징용령이 공포되면서 조선인에 대한 강제징용이 시작되었다. 강제징용에 의해 일본의 탄광이나 광산, 군수공장 등에서 노동해야 했던 재일 조선인은 100만 명 이상이었다. 식민지 조선인들은 일본에서 학살 대신 학살에 준하는 고강도 강제 노동을 만났다.

 

급격한 세계사적 변화 속에서 새롭게 바라본 중국인을 향한 조선인의 감정은 혐오였다. 근대라는 새로운 세상 속에서 중국인은 조선인에게 야만이었다. 어쩌면 일본과 상대적 우월 의식을 공유했다고도 볼 수 있다. 문제는 노동시장에서 조선인들이 중국인들과 경쟁했다는 점이다. 중국인들이 값싼 임금으로 노동시장을 잠식해 가자 조선인은 박탈감을 느꼈다. 박탈감과 혐오는 비인도적인 테러와 학살로 이어졌다. 그리고 중국인에 대한 혐오감정이 노골화된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배화(背華; 화교를 배척한다는 뜻) 폭동으로 불리는 반 중국인 폭력사태다.

 

식민당국은 1910년대까지 조선인들의 생업 유지를 핑계로 중국인 노동자 입국을 제한해 왔다. 하지만 1920년대가 되자 기존의 중국인 이주 정책을 수정했다. 싼 가격의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제국과 식민지 사이에 왜곡된 경제 체제가 본질적 문제였지만 당시 언론은 오히려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자 간의 대립을 부추겼다. 1920년대 말 세계 경제 대공황이 일어났다. 후발 제국주의 국가가 공항을 이겨낼 손쉬운 선택지는 전쟁이었다. 일본은 곧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그들의 1차 목표는 만주였다.

 

대공황으로 인해 영국, 미국, 일본의 제국 협조 체제에 균열이 발생했고 경제 불황으로 돌아선 일본 민심은 군부의 대륙 침략에 힘을 실어주는 모양새였다. 19319월 일본군은 조선 국경을 넘어 만주를 침략했고 이로써 만주국이 탄생했다. 일본 군국주의의 확장은 그 자체로 조선의 독립운동의 엄청난 후폭풍으로 다가왔고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독립운동은 거대한 암흑기에 접어드는 듯했다. 임시정부가 있던 상해는 일본의 점령 위기에 놓였고 신간회(1927년 창립된 좌우합작단체)는 해산되었다. 국내 사회주의 계열의 노동운동은 탄압받기 시작했고 조선인들의 독립 의지도 꺾여가고 있었다.

 

이봉창은 김구에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봤습니다. 이제 영원한 쾌락을 꿈꾸며 독립 사업에 헌신할 겁니다."라는 말을 했다. 일왕 저격에 실패한 이봉창은 32세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윤봉길은 계몽 운동만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하고 무장 투쟁의 길을 걷기로 했다. 윤봉길은 무장투쟁을 이끄는 독립군이 될 수 없다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의거라고 생각했다. 거사 직후 윤봉길은 일본 헌병에게 연행되었고 상하이 파견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아 우편선에 실려 오사카 육군 형무소에 수감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나자와 육군 구금소를 거쳐 19321219일 군작업장에서 향년 24세로 총살형을 당했다.

 

일본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장준하도 1944년 일본군 학병에 강제 징집되어 중국 쑤저우 지구에 배속되어 있었다. 여느 학병처럼 강제로 일본군에 끌려간 장준하는 부대에서 조선인 학병을 규합해 친일파 총살을 요구하던 중에 부대에서 탈출해 중국군 유격대에 합류했다. 일본 게이오대학 문학부 재학중 학병으로 끌려온 김준엽도 마찬가지였다. 부대에서 탈출한 김준엽은 194479일 중국군 유격대 휘하에 있던 장준하와 역사적인 만남을 갖는다. 그런 저항이 쌓이고 쌓여 일본 제국주의는 패전하고 우리는 해방이라는 역사적인 결과를 맞이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일본제국의 식민이 아닙니다라고 힘겹게 외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해방은 힘겹게 우리 손으로 찾은 결과물이었다.

 

19452월 얄타(러시아) 회담과 7월 포츠담(독일) 선언을 거치며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해방시킨다는 내용이 국제무대에서 합의되었다. 194592일 일본이 서명한 항목 문서에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확약한다는 내용이 삽입되면서 한국의 독립이 공식화되었다. 한국인들은 식민지배에서 벗어났음을 깨닫고 환호했지만 이 환호는 다시 더 큰 아픔과 슬픔으로 다가왔다. 한반도의 정중앙을 가로지르는 선 즉 38선이 생겼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에서 논의된 한국의 해방에는 적절한 시기라는 조건이 있었고 이 조건을 핑계로 연합국의 두 축이었던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양분한 것이다.

 

분단은 시작됐고 1945811일 소련이 북한 땅에 들어왔고 98일 남한 땅에는 미군이 들어왔다. 194512월 소련, 미국, 영국 대표가 모스크바 3상 회의를 통해 한국의 독립에 관한 문제를 논의했고 여기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정되었다. 여수와 순천 지역 주민들이 반란군이 아닌 좌익 중심의 인민위원회에 동의했던 것은 폭력적이고 친일적이었던 경찰 세력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더불어 경찰과 같이 친일행위를 일삼던 이들이 행정을 이끄는 상황, 게다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무능에 대한 반감이었지 반란군의 주장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지역민들에게 반란군의 사상이나 이념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문제는 그저 생존이었다.

 

제주 4.3 사건과 여순 사건을 통해 대한민국에는 새로운 존재가 탄생했다. 바로 빨갱이다. 물론 빨갱이는 여순 사건 이전에도 존재하던 표현이었지만 이승만 정권은 여순 사건을 계기로 공산주의자는 빨갱이라는 공식을 넘어 빨갱이는 악마라는 등식을 완성했다. 빨갱이란 언제 죽여도 상관없는 존재라는 의미였다. 그 누구도 사상과 이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제 한국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사상은 반공이었다. 1948531일 남한은 선거를 통해 제헌국회를 구성했다. 안타까운 것은 반민특위가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었다. 정부 수립 이후 대다수 국민의 관심 대상이자 염원이었던 친일 청산은 그야말로 허무한 실패로 끝이 났다.(165 페이지)

 

전쟁은 학살이 일어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이다. 한국 전쟁 때 벌어진 학살의 문제점은 학살의 주체였다. 학살을 일으킨 장본인이 남북의 국가 권력이었기 때문이다. 남한은 빨갱이 사냥에 혈안이 되었고 북한은 흰 패 사냥(공산주의에 동조하지 않는 자들을 사냥하는 것)에 열을 올리며 이념에 따른 정치적 학살을 자행했다. 남북한은 데칼코마니처럼 각자의 이념과 지향을 폭력으로 관철하며 상대방을 피로 굴복시켰다. 북한은 19482월 조선인민군을 창군하고, 19489월 정부를 수립했다. 창군(創軍)이 정부 수립보다 먼저였다. 군 조직은 남한보다 먼저, 정부 수립은 남한보다 늦게 단행한 것이다. 이는 분단의 책임을 남한에 미루고자 한 북한 정권의 노림수였다. 남한이 먼저 정부를 수립했으니 자신들은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정부를 만들었다는 논리였다.

 

남과 북이 서로 다른 정부를 수립한 시점부터 둘은 적이었다. 서로 한반도 유일 합법 정부임을 주장해야 했기 때문이다. 3.8선은 사실상의 국경선이었지만 남과 북 모두 이를 국경선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양측에게 3.8선 너머의 땅은 그저 언젠가 되찾아야 하는 땅이었고 그래서인지 그 주변에서 끊임없이 싸웠다. 인민군이 급박하게 후퇴하는 과정에서 우익 인사들은 지역에 남은 좌익 인사를 보복할지 모를 위협 세력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인민군은 빨갱이 사냥에 최전선에 있던 경찰이나 우익 청년단원들을 학살했다. 이 보복 학살이 더욱 가슴 아픈 이유는 인민군이 우익 인사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보도 연맹 사건의 피해자 유가족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가족과 친지를 학살로 내몬 이들을 또 다른 학살의 피해자로 만든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우리와 타자를 나누며 살아가고 있다.

 

일본이 패망한 이후 한국에 남은 일본 재산은 어떻게 처리되었는가. 한국은 이를 적산 즉 적의 재산이라 명명했다. 이때 일본과의 전쟁에서 이긴 미국이 등장했는데 일본 행정이 미군에 넘어갔으니 일본의 재산은 곧 미국의 재산이었다. 이후 1945126일 한국에 있는 일본 재산은 국유와 사유를 막론하고 미군정청에 귀속되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89월 대한민국 정부 및 미국 정부간의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 협정에 의해 한국 정부가 미국으로부터 일본 재산에 대한 권리를 이양받았다. 처음부터 미국은 한국과 일본이 화해하기를 바랐다. 이유는 간단했다. 냉전이라는 새로운 국제 관계 때문이었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소련과 중국의 확장을 막을 든든한 동맹국을 원했다. 그런데 한국은 너무나도 약했고 일본만으로는 부족했다.

 

어쩌면 우리는 여전히 한일 회담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만족스러웠을지 모를 이 회담 결과 누군가는 또 다른 상처를 입었고 진짜 피해자들은 아직도 아무런 사과와 보장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217 페이지) 1960년 후반부터 시작된 한강변과 강남의 성장은 서민 더 정확하게는 도시 빈민의 희생을 강요했다. 사실상 서울시 개발의 로드맵에서 도시 빈민이 설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눈여겨 볼 대목이 있다. 경제가 무너지면 정권은 흔들린다는 말이다.

 

저자는 유신 정권은 어처구니없게도 내부의 권력다툼으로 종말을 맞이했다고 말한다. 어쩌면 유신 정권의 이 황당한 마무리야말로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비극일지 모른다고 말한다. 시민들의 손이 아닌 유신의 1, 2인자 사이의 술자리 다툼으로 종결되었기 대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 술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대국적인 정치를 하라는 말을 했음을 감안하면 단순한 권력 다툼이라 하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저자는 유신 정권이 우발적 총탄으로 무너진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로 인해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고 말한다. 황당한 마무리라는 말과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로 인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울게 되는 정도가 아니라 가슴 아프고 비참한 사건들이 우리 역사에 너무 많았다. 마지막 챕터는 한강의 기적이 무너진 1997년의 겨울이다. 구제 금융을 받아야 했던 사건을 말한다. 현대사는 거의 동시대이기에 생소함이 덜하다. 책이 다룬 근대사에 집중한 이유다. 우리에게 비극이 아닌 때는 없었다. 책이 다룬 부분은 정치, 군사, 경제와 관계된 역사다. 저자는 식민 청산과 통일이라는 화두로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없다고 말한다. 저자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20265[세대X 한국사 - 혐오를 멈추고 시대를 읽는 현대사 수업]이란 책을 냈다. 혐오를 멈추는 것도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만하다. 이 책은 오랜만에 읽은 역사 책이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책이다. 다음에는 어떤 역사책을 읽어야 좋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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