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오(深奧)한 앎, 부박(浮薄)한 삶‘(철학자 김영민 교수의 표현)란 말은 경쾌하면서 깊이감이 있다. 각각 이론과 실천을 상징하며 대비되는 앎과 삶이란 단어를 배치했을뿐 아니라 앎은 심오하고 삶은 부박하다니 깊이와 경쾌함은 더욱 그렇다. 위의 지적 놀이는 감람암(橄欖巖)처럼 세 음소가 모두 ㅏ음이 있고 ㅁ받침이 있는 단어를 음미하는 나의 놀이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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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 문명과 과학적 사유
최화 외 지음 / 문사철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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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 문명과 과학적 사유는 철학자들의 사유를 모은 책이다. 근대과학이란 물리학의 발달로부터 출발했다. 갈릴레오가 현실적 사물에 수학을 적용하려 했을 때 그가 완전히 독창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천문학에서는 그보다 먼저 천체의 움직임을 수학적으로 계산하려는 시도는 계속되어 왔었고 그런 시도의 원조를 따지자면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천문학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플라톤은 수학적 법칙을 천상의 세계에 대해서만 적용했고 갈릴레오는 그것을 지상의 세계에도 적용했다. 천상에만 질서가 있다는 고대의 생각을 뿌리치고(?) 지상에서 질서를 찾으려 한 것이다.(16 페이지) 베르그손은 자유는 우리가 매순간 느끼는 자유의 감정 그 자체이며 어느 정도 자유로운가는 우리 내면의 어느 정도의 깊이에서 나온 행동인가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전통 형이상학이건 근대 물리학이건 모두 물질을 이용하려는 지성의 힘에 기반을 두고 세계를 설명한 시도였다면 베르그손은 새롭게 우리의 인식능력은 지성을 넘어서는 측면, 생명의 입장에서 지성의 자리를 한계지을 수 있는 측면을 지닌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철학은 이제 전통 형이상학을 완전히 뒤집어 정지체에서 운동으로, 본질에서 기능으로, 형상에서 지속으로, 공간에서 시간으로의 역전이 이루어진 것이다


닫힌 우주에서 열린 우주로, 형태 중심에서 유전 중심으로, 성년 중심에서 연속성의 담지자인 씨앗 중심으로, 개체에서 종으로, 도덕률에서 상황으로, 무감동에서 참여로 등의 변혁이 베르그손에게서 일어난 것이다. 정지가 존재에서 운동이 존재라는 말로 바뀐 것이다. 생물은 운동하지만 자신임을 잃지 않는다. 자발적 운동은 말하자면 모순적 운동인데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이런 운동이 베르그손이 말한 지속(持續)이며, 지속이야말로 진정한 존재라는 것이 바로 운동이 존재라는 말의 의미다


운동이 존재라는 말은 진정한 존재는 운동이라는 의미다. 운동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부단(不斷)히 타자화되는 운동이며 다른 하나는 운동했음에도 타자화되지 않고 자기동일성을 잃지 않는 운동이다. 기억이 지속의 자기동일성을 확보해준다. 그러한 생명의 존재방식은 지성적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베르그손은 반지성주의가 아니라 초()지성주의다. 지성은 주어진 것들의 배열을 달리할 수 있을 뿐이지만 창조는 배열 정도가 아니라 주어진 것 자체를 즉 없던 것을 새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인간 이성은 자연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근세에 와서 더욱 주목받기 시작했다. 과학은 인간 이성이 이룩한 위대한 결과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 맞추어 인간 이성을 다소 제한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도 생겨났다. 이른바 수학적, 과학적 이성 또는 과학적 합리성의 틀에 따라 이성이 마치 오성과 같이 규정되는 것이다. 근대의 과학적 합리성의 토대를 이룬 것은 바로 근대 물리학을 가능하게 한 수학(기하학)이다.(85 페이지


아인슈타인은 많은 철학책들을 읽고 철학에 대해 많이 알고 생각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철학적 배경이 상대성 이론을 만들어내는데 긴요한 기여를 했다. 아인슈타인은 또한 자신이 만든 상대성 이론이 가지는 철학적, 물리학적 함의를 설명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반대로 오늘날의 물리학자들은 철학적인 문제로 간주되는 시간, 공간에 대한 물리학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다.(144 페이지) 제네시스를 쓴 이탈리아 물리학자 귀도 토넬리,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등을 쓴 카를로 로벨리는 어떤가


동양과학의 발화는 주의를 끈다. 조셉 니덤의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전개된 논지는 중국에도 과학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에는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인과율에 의한 과학은 없었다. 동양과학문화에서 인과는 중요 담론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니덤은 중국과학이란 말은 자유롭게 썼다. 미국인 중국학자 나탄 시빈(Nathan Sivin)은 니덤의 생각을 비판했다. 중국인들이 자연을 정리하는 방식은 유별(類別; classification)이었다. 그들은 인과 대신 유별을 이론적으로 다듬어 나갔다


유별은 서양에도 있었지만 중국의 유별은 독특했다. 미셸 푸코는 중국의 유별을 접한 후 충격에서 비롯된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고 썼다. 그것이 그가 말과 사물이라는 지식의 분류학에 관한 책을 집필하게 된 계기였다. 동물은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황제에 속하는 동물, 향료로 처리하여 방부 처리된 동물, 사육동물, 젖을 빠는 돼지, 인어, 전설상의 동물, 주인 없는 개, 광폭한 동물, 셀 수 없는 동물, 낙타털과 같이 미세한 모필로 그려질 수 있는 동물 등등.. 


조선조 회화에 대한 인식은 시대적 정치적 배경에 따라 변화했다. 조선초기에는 조선왕조 개국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따라 대체로 회화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이었다. 국가의 기틀을 잡고 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며 왕조를 안정시키는 것이 시대적으로 당면한 과제였다. 문인사대부의 역할 또한 유교이념을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하며 국가안정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이는 시(), (), ()를 비롯한 예술일반에 대한 인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조선초기에는 개국에 따라 국가의 기틀을 잡고 공고히 하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였기 때문에 여기적 활동인 예술 활동에 집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림 그리고 글씨를 쓰며 즐기는 일은 여기(餘技), 소도(小道), 천기(賤技), 말기(末技), 잡기(雜技)로 인식되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도본말예(道本末藝), 완물상지(玩物喪志)로 대표된다. 조선 전기의 문인인 강희안(姜希顏; 강희맹의 형)은 당대 최고라는 자신에 대한 평가가 오히려 자신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 보았다


성종실록에도 회화는 잡기(雜技)와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비록 회화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이었다 해도 이런 인식이 그림을 비롯한 예술활동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로 이어지지 않았다. 완물상지를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작품 활동에만 매달려 도를 구하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회화에 대한 인식은 조선후기에 두드러진다. 조선후기는 양란을 거치며 국가적 위기상황이 있었지만 왕조가 안정되었으며 도시가 발달하고 경제적으로도 발전하여 문화적 욕구가 상승한 시기다


사회 전반적으로 문화적 수준이 높아졌으며 그 결과 조선초기의 회화인식과는 달리 회화할동을 공공연한 문인의 활동으로 내세울 수 있는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미수 허목, 표암 강세황, 추사 김정희 등에서 회화 인식이 변화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미수 허목은 무릇 기예의 오묘한 경지란 전념하지 않으면 터득할 수 없다며 그림도 높은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집중적인 노력과 지속적인 탐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학문을 하는 태도로 회화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은 회화가 더 이상 완물상지로 폄하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신의 그림에 속기가 없고 고상하며 글씨 또한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자평한 강세황은 영조의 말에 따라 절필(絶筆; 그림 그리는 것 그만 둠)했던 인물로 문인화의 기본 개념으로 속()과 아()를 들었다. 조선후기 문인화론의 완성은 김정희에서 이루어졌다. 김정희는 강세황을 비판했다. 사실 그대로 그리는 것을 지양(止揚)한 것이다. 동기창(董其昌)은 독만권서 행만리로(讀萬卷書 行萬里路)란 말을 했다.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 길의 여행을 떠나라는 말이다. 김정희도 가슴 속에 오천 권의 문자가 있어야만 비로소 붓을 들 수 있다는 말을 했다


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卷氣)는 김정희가 처음 쓴 말로 서권기의 핵심은 다독(多讀)이다. ()을 칠 때 서권기가 필요했다. 조선에는 난이 서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난을 직접적으로 관찰하고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중국의 화첩(畫帖)을 보고 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사난(寫蘭)의 어려움이 제기되었으며 난은 특히 사의를 드러내는 화목으로 여겨졌다. 이런 배경에서 난초의 사의성은 학식과 문자적 의미와 연관을 갖게 된다. 서권기는 자신의 뜻을 잃지 않고 지켜나간다는 의미로도 쓰였다


김정희가 말하는 문자향 서권기란 문인화가 갖추어야 하는 학식 인품 등 여러 덕목을 통합적으로 포함하는 다의적 용어로 쓰였다. 김정희는 회화에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적용하여 논하며 회화를 도의 차원에서 논의할 수 있게 하며 학문과 동등한 지위를 갖추게 했다. 격물치지는 사물에 가까이 이르러 그 사물의 이치<; >를 아는 것을 의미한다. 회화를 격물치지의 수준에서 논의하면 그림은 더 이상 잡기가 아니며 그림에서도 도를 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뛰어난 학문과 예술의 경지는 단지 실사구시의 방법을 따르고 격물치지적 태도를 취하는 것만으로 완성될 수 없다. 학습을 통한 깨달음을 내면화하고 실천해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며 깨달음을 얻기 위한 내적 성숙이 필요하다김정희는 그림 그리는 자에게는 무자기(毋自欺) 즉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우리는 종종 말에 속는다. 말들은 우리가 무심코 창 밖을 바라볼 때 거기에 있는 창문 유리창처럼 결코 투명한 매체가 아니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지도는 영토가 아니고 개란 관념은 짖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소박하게도 저 창문처럼 말들을 투명한 것으로 믿기를 좋아한다. 그런 말들은 투명한 듯 보이지만 이미 상당한 두께를 가진 색유리와 같다. 나아가 그것은 심지어 우리의 유용성과 행위의 관점에서 실재를 조각내고 절단해 명사, 형용사, 동사로 굴절시킨다. 물론 이러한 굴절은 그 자체 오류는 아니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이 또한 실재의 일부이며 우리 지성의 결과인 과학이 파악한 세계는 실재의 반을 표현한다


단 이것으로 나머지 반을 모두 설명하고자 할 때 문제와 오류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물리 화학적 체계로, 유기체현상으로 모두 설명을 하고자 할 때가 그렇다. 베르그손은 햄릿이라는 걸작은 사실상 전혀 예측불가능한 창조적인 작업(지속, 직관, 생명이 갖는 본질적인 특성)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햄릿이 나오고 난 이후에야 셰익스피어는 햄릿을 쓸 가능성을 갖고 있었지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햄릿과 동시에 또는 이후에 성립되는 가능성을 과거로 역투사한 것이며 착각에 불과하다. 즉 회고적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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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도서관에도, 남산도서관에도, 종로도서관에도, 파주도서관에도, 연천도서관에도, 양주에서 가장 큰 옥정호수도서관에도 없는 동서양 문명과 과학적 사유(2015년 출간)를 양주 옥계도서관에 가서 빌려와 읽는다. 
최화의 글을 통해 베르그손의 지속(持續) 개념에 대해 일보 진전한 인식을 얻게 되었다. 배니나의 추사 김정희의 유교적 특성도 읽을 만하다. 
필자 배니나는 당시 경희대 대학원 철학과 박사 과정이었다. 그의 단독작이 없을까 하고 검색해보니 2024년 1월 제이슨 브레넌의 정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다른 한 번역자와 함께 번역했다. 
이력란에 경희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미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경희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나온다. 
2021년 등록된 한 사이트에는 경희대학교 학술연구교수로 나온다. 단독작이 언제 나오려는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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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지고 있는 철학자 신승철(申承澈; 1971 - 2023)의 저작은 다섯 권이다. 1) 구성주의와 자율성, 2) 에코소피, 3) 지구 살림 철학에게 길을 묻다, 4)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 5) 눈물 닦고 스피노자 등이다. 잠이 부족했고, 2시간 30분이 걸린 치과 치료를 받아 지친 몸과 마음으로 일산(예배), 파주(‘양식; 糧食‘ 구입)를 지나 집에 와 쉬었다. 이런 저런 생각 속에 불안감이 끼어 드는 듯 해 신승철 님의 지구 살림 철학에게 길을 묻다를 들춰보았다.


정서(情緖)와 정동(情動)을 설명한 글에 눈이 멈췄다. 그 글에 의하면 정서는 감정이 발생할 수 있는 근원이고, 정동은 그 저변에 흐르는 힘과 에너지다.(85 페이지) 움직이지 않을 때의 정서 표현 양식이 감정이라면 움직일 때의 마음이 정동이라 할 수 있다. 확실히 아무 것도 안 할 때 생각이 복잡하다면 무언가 할 때는 그렇지 않다. 이럴 때 읽기와 쓰기가 약이 된다.


얼마전 오랜만에 다시 펼쳐든 조주연의 현대미술 강의 중 에필로그에서 다음의 구절을 만났다. “책을 쓴다는 것은, 알고 보니, 내가 아직도 모르는 것을 발견하는 과정이었다. 이제는 제법 알게 되었다는 어줍짢은 자족, 그 뒤에 숨어 있던 앎의 공백들, 내가 모르는 줄도 몰랐던 앎의 공백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글을 쓰다가 딱 막혔던 순간들이다.“


공백을 메울 수 있게 되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더구나 자신이 모르는 줄도 몰랐던 것들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다니 얼마나 좋은가. 앎의 공백을 마주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막막한 경험이겠지만 반전(反轉)의 기회를 잡는 행운이기도 하리라.


로버트 헤이즌의 지구 이야기도 말할 거리가 많은 책이다. 도널드 프로세로의 화석은 말한다에 마셜 케이 이야기가 나온다면 로버트 헤이즌의 지구 이야기에는 알프레드 베개너 이야기가 나온다. 로버트 헤이즌의 지구 이야기, 로버트 맥팔레인의 언더 랜드, 가와카미 신이치의 한 권으로 충분한 지구사(地球史), 김정률의 지질학의 역사, 앤드루 놀의 지구의 짧은 역사, 팀 콜슨의 존재의 역사 등으로 내 앎의 공백을 메우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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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께 딸이
딸에게 엄마가
이는 오늘 전곡도서관에서 진행된 이인석 미술 전문가가 현대미술과 고미술의 이해 강좌에서 필독 자료로 추천한 미술 서적들 중 한 권으로 포함된 조주연의 ‘현대미술 강의‘ 머리말에 들어 있는 표현이다. 인상적이어서 기억하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이 책을 읽은 것은 2017년 알라딘 서평단 과제 도서로 받은 덕이다. 저자는 2002년 미학과 박사가 된 분이다. 나는 오늘 강의를 들으며 여러 가지 질문을 했는데(강사가 그렇게 하도록 했다) 라스코나 알타미라 동굴 등에 보이는 그림은 왜 그려졌다고 생각하는지?도 그 중 하나다.
강사는 그 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야 하는데 그것은 어려운 일이라 답했다.(현대미술 강의 390 페이지에 관련 내용이 나온다.) 사냥설, 유희설, 모방설, 파괴설 등 다양한 설이 제기된 상황이다.
조주연은 남아공의 인지고고학자 데이비드 루이스 윌리엄스의 가설을 소개했다. 그의 가설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가 '왜' 이전에 '어떻게'를 물었다는 점이다. 데이비드 루이스 윌리엄스의 말마따나 동굴벽화 최대의 미스터리는 그림의 용도 이전에 그림 자체의 출현이다.
“깊고 어두운 동굴 벽에 오록스(소의 조상격인 거대한 솟과 동물)를 피카소마저 놀랄 정도로 실감나게 그려놓은 인류 최초의 화가는 그림을 본 적도, 그림이 무엇인지도 배운 적도 없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단 말인가?“(저자는 오로크스라고 썼다.)
빛이 전혀 없는 완전한 암흑 속에서 눈에 일어날 수 있는 현상 중 하나가 환각이다. 데이비드 루이스 윌리엄스는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동굴 속의 어둠에 대응하기 위하여 뇌가 일으킨 단순 환각을 벽에 옮긴 것이 동굴 벽화에 산재하는 추상적인 문양들이라고 설명했다.
저자는 책을 쓰는 것은 알고 보니 자신이 아직도 모르는 것을 발견하는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데이비드 루이스 윌리엄스의 가설은 장 클로트의 ’선사 예술 이야기’(2022년 2월 열화당 출간)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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