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金洙映; 1921 - 1968) 시인은 포로 수용소 체험을 다룬 시를 발표하지 않았다. 무엇 때문일까?

당연히 부끄러움 또는 수치심 때문이다. 초기의 김수영 시인은 설움이라는 말을 많이 했지만 그에 못지 않게 부끄러움이나 수치 등의 말도 많이 했다.
김수영 시인과 대비되는 사례가 이탈리아의 화학자, 소설가 프리모 레비(1919 - 1987)이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인 레비는 수용소 체험을 글로 많이 남겼다.

여기서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나라면 어땠을까? 나는 아마도 레비에 가까웠을 것이다.

다만 수용소의 참담한 현실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인생은 아름다워(La vita è bella)’란 영화가 있다.

“유태계 이탈리아인인 귀도 오라피체가 풍부한 상상력으로 나치의 유태인 수용소에서 아들과 아내를 구하는 이야기”인 ‘인생은 아름다워’는 마음 먹기에 따라 삶은 유쾌할 수 있다는 말을 하는 듯하다.

김수영 시인은 자조(自嘲)의 웃음 즉 부끄러움의 웃음을 짓곤 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을 극복하겠다는 의지(意志)를 드러내는 웃음이었다.
김수영 시인의 경우처럼 나에게도 부끄러움은 극복의 의지를 다지게 하는 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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