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소설을 잘 읽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무수히 얽히고 설킨 등장 인물들의 관계를 익히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유명인들의 관계 역시 내게는 그렇게 생각된다.

 

하지만 미술사학이나 문화유산 관련 학자들의 가계도에는 관심이 있다. 선친(先親)이며 선학(先學)인 고인들의 학문적 위업을 후학(後學)이자 소생(所生), 나와 동시대의 저자들이 얼마나 창조적으로 넘어서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이다.

 

최근 '조선시대 화가 총람'을 출간한 정양모 선생의 경우가 대표적으로 내 관심에 부합한다.

 

국학자 위당 정인보 선생의 아드님인 이 분은 아버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벅차오르고 미어진다는 말을 하며 아버지 발끝도 따라가지 못하는 자신이 그저 답답할 뿐이라 덧붙였다.(경향신문 20171130)

 

예수의 신발끈조차 감당할 수 없노라 했던 세례 요한의 심정이 이해된다.

 

유명 학인들의 창조적 선학 극복을 말했지만 나 같은 사람들에게 동시대 저자들의 학문적 성과는 갈피를 잡기조차 어려울 만큼의 깊이와 넓이가 아닐 수 없다.

 

서해문집에서 나온 아시아의 미() 시리즈 중 한 권인 박은영 교수의 '풍경으로 본 동아시아 정원의 미'를 읽다가 같은 시리즈에 저자로 참여한 강희정이란 분을 이름만으로일망정 알게 되었다.

 

박은영 교수의 책도 그렇지만 강희정 교수의 '지상에 내려온 천상의 미'는 외워서 넷 중 하나를 고르는 미술 시험을 치르고 난 뒤 느끼게 된 허망함을 해결하기 위해 나 스스로 부과한 서술(敍述)의 자료로 구입한 책이다.

 

책의 부제인 '보살, 여신 그리고 비천의 세계'의 비천은 당연히 飛天이다. 그럼에도 비천은 보살이나 여신에 비해 낯선데 그나마 실크로드로 가는 첫 관문인 돈황의 상징도 석굴사원 막고굴의 구석구석을 장식한 비천이라는 저자의 설명이 요긴하게 다가온다.

 

어디에 가면 서양의 요정이나 천사에 해당하는 비천을 볼 수 있을까?

 

모래로 뒤덮인 명사산에 1000개의 불상이 떠오르는 환영(幻影)을 보고 천불동을 축조했다는 동진(東晋)의 승려 낙준이 문득 생각난다.

 

"수십 년이 걸리는 여행, 다시 돌아올 것을 기약조차 할 수 없는 구법의 길"(일지 스님 지음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 147 페이지)을 나선 구법승(求法僧)들의 노정(路程)을 인생의 메타포로 처리하는 것은 예의가 아닐 것이다.

 

12월 둘째주 수요일(13) 미술사학자 강소연 님의 강의를 들으러 종로에 가게 될 것 같다.

 

'인문학의 꽃 미술사학, 그 추체험(追體驗)의 방법론'의 저자이기도 한 미술사학자 강우방(姜友邦) 선생의 따님이자 '사찰불화 명작강의'의 저자인 강소연 교수의 강의이다.(다른 사람의 체험을 자신의 것인 양 느끼는 것을 의미하는 추체험의 의미는 크다.

 

이 말은 정신분석에서의 전이轉移를 연상하게 한다. 대상에 대해 배우는 것이 아닌 대상을 다루고 읽는 방법에 대해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쁘게 움직여야 나를 조금 볼 수 있을 것이다. 늘 그렇듯 기대가 크다. 지속가능한 대안으로 삼을 수 있도록 애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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