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갔던 모든 곳에는 시인들이 늘 나보다 앞서 있었다.˝(레진 드탕벨 지음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는 책들‘ 28 페이지).

프로이트의 말이다. 이 말을 프로이트는 항상 무의식의 발견을 시인에게 양보했다는 말(엘리자베트 라이트 지음 ‘무의식의 시학‘ 17, 35 페이지)에 비추어 보면 좋을 것이다.

아니 두 말은 맥락이 같다. 정신과 의사 김종주 박사는 창조적인 작가들은 직접 영혼에 관한 진실을 직관으로 알아차리는데 정신분석학자는 좀 더 힘든 방법으로 뒤늦게야 진실을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라 풀이했다.(‘이청준과 라깡‘ 36 페이지)

경위야 어떻든 시인에게는 영광스럽게 여겨지는 말이리라. 프로이트의 말은 시인의 언어(시)는 일반인들의 언어보다 더 정신분석적 독해에 합당한 대상이라는 말이다.

정신분석 비평을 하는 박지영 시인은 평론집 ‘욕망의 꼬리는 길다‘에서 자신의 작업(분석비평)에 대해 불편해 하는 시인도 있고 자신도 몰랐던 심리를 깨달으며 아하 하고 인정하는 시인도 있으리라 본다는 말을 했다.(6 페이지)

예상형의 말이지만 과거 그가 그런 상반된 평가를 받았으리란 점은 충분히 추정 가능하다.

어떤 시에 대한 어떤 해석이 그런지는 말하지 않아도 되리라 생각한다. 다만 ˝의존대상이 모친으로부터 처에게로 전치되었다고는 하지만 2년 연상의 부인에게서 그의 의존욕구는 채워지지 않은 채 과음으로 표현될 수 있는 구강성격의 일면이 나타나고 있었다.˝(‘이청준과 라깡‘ 281 페이지)는 글을 예시하고 싶다.

누가 그랬다는 말일까? 이청준이 아니라 만해 한용운 승려 시인을 두고 하는 말이다.

두루 알려진 사실이니 불편할 것은 없는가? 아니면 과도기의 한 때 그런 것이니 별 일 아닌가? 아니면 오히려 그런 점은 대시인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가?

심우장 가고 싶은, 눈 내리는 날이다. 나의 소를 찾아 다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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