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출신의 김춘수(金春洙: 1922 - 2004) 시인이 ‘귀향(歸鄕)’이란 시에서 윤이상(尹伊桑; 1917 - 1995) 작곡가와 전혁림(全爀林: 1916 – 2000) 화가를 말한 부분을 읽는다.

..그날
뇌조(雷鳥)는 뇌조의 몸짓으로 멀리멀리 사라져 가더라고 했다.
그건 구(球)도 원통(圓筒)도
원추(圓錐)도 아니더라고 했다.
그건 빛<色>이며 빛<光>이 아닐까
전혁림은 그날 그런 생각을 해봤을까,

오랜만에 와보니 윤이상은 또다시
촛대마냥 말라 있다...

학교에서는 ‘뇌조는 빛‘이라는 구절은 은유(隱喩)로, ‘촛대마냥‘은 직유(直喩)로 설명했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다.

시를 그렇게 문법으로 분석하며 읽는 것은 재미를 반감시키기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직유도 하나의 은유“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직유도 하나의 은유라는 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修辭學)’에서 한 말이다.

은유를 설명하는 많은 책들 가운데 눈에 띄는 책이 내게는 철학자 김형효 교수의 책(‘마음 혁명’)이다.
저자는 ”백합화 같은 소녀는...했다”라는 문장을 예로 들며 은유법은 백합화 즉 현장에는 없는 숨은<은: 隱> 단어로 소녀를 설명하는 수사법이라는 말을 한다.

이에 비해 “술 마시자“는 말을 ”술 한 잔 하자”로 표현하는 것에 쓰인 환유법(換喩法)은 술과 술잔의 상호 인접성에 근거를 둔 수사법이다.

은유가 현장에는 없는 것을 끌어들이는 수사법이라면, 환유는 술을 현장에 함께 있는(인접해 있는) 술잔으로 표현하는 수사법 즉 장소를 바꾸는(치환하는: 換) 수사법이다.

수사학은 세상을 인간 중심으로 더 잘 이해하려는 소유욕의 일종이라 말하는 저자에 의하면 은유는 정신적 소유를, 환유는 물질적 소유를 의미한다.

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글이 최현식 교수의 ‘감응의 시학’에 나온다.

저자에 의하면 은유(적 언어체계)는 오로지 주체의 관점에서 대상을 동일화하는 데 반해 환유(적 언어체계)는 한 개체와 다른 개체의 인접 관계 즉 연관성에 주의한다.

저자는 서정(抒情)을 모든 것을 자기화하는 권력적인 것으로 정의한다.

김형효 교수가 말한 소유를 이해할 글로 “서정은 이미 말해지거나 의도된 욕망을 넘어서는 감각의 운동”이며 “실재계를 끊임없이 배반하며 차이와 위반을 생성하는 감응 행위”라는 문장을 들 수 있다.(‘감응의 시학’ 15 페이지)

진리, 구조, 가치 등 우리가 사용하는 학문적 용어들까지도 은유라는 말을 한 사람은 니체이고, 두 관념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유지될 때라야 은유는 의미를 지닌다는 말을 한 사람은 김애령(철학자)이다.(‘여성, 타자의 은유’ 75 페이지)

은유 없이는 그 어떤 글쓰기 작업도 불가능하며 극단적으로 말할 경우 모든 글이 은유적인 글인지도 모른다.(최문규 지음 ‘문학이론과 현실인식‘ 35 페이지)

읽는 것이 인생(Lesen ist leben)이라는 독일어가 있다. 쓰기가 인생이라는 말도 가능할 것이다. 읽기나 쓰기가 인생에서 절대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읽기(쓰기)는 닮은 듯 다르게 이전 것을 반복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인생과 닮았다는 의미이다.

모든 사람은 섬(고립된 존재)이지만 어느 누구도 섬이 아니다. 즉 전적으로 고립되어 있지 않다.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타인과 연결되어 있고 그 관계 안에서만 의미 있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김애령 지음 ‘여성, 타자의 은유‘ 5, 6 페이지)

전적으로 고립되지 않은 것을 닮은 것으로, 고립된 것을 다른 것으로 볼 여지가 있을까? 아니 그렇게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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