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에세이를 잡문(雜文)이라 부르는 것일까? 형식이 자유롭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정형시인 시조(時調)보다 자유로운 장르인 시(詩)를 더 선호하고 인정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선호 여부가 자유로운 글인가 정형적인 글인가에 의해서만 갈리는 것은 아니겠지만 의아하다.

잡문을 사랑한다는 이명원 평론가의 글을 오랜만에 다시 펴본다. 그가 뛰어난 잡문의 미덕으로 든 것은 인식의 아름다움과 개성적인 스타일이다.(‘해독’ 15 페이지)

동의한다. 일정한 틀이 없어 자유로운데 인식의 치열함이나 깊이마저 없다면 읽힐 가치가 있겠는가.

사유를 일정한 형식에 맞출 필요가 없는 만큼 치열하고 아름다운 사유를 펼칠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스타일이 없으면 진정으로 스승과 결별할 수조차 없다(‘공부론’ 11 페이지)고 말한 철학자 김영민 교수가 생각난다.

나는 김정란 시인의 ‘거품 아래로 깊이’를 아름답고 치열한 에세이집으로 추천한다. ‘비평 정신의 실종’이란 글에서 시인은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에 생을 거는 사람들을 만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진다고 말한다.(225 페이지)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에 생을 거는 사람들이 치열하고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김정란 시인께서 정상화된 상지대의 “대학원장 보직”을 받았다는 소식을 페북에 알렸다. “은퇴“를 불과 육 개월 남긴 시점이라고 한다.

”시인의 언어가 예언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후기 산업 사회에서도 여전히 진실”(265 페이지)이라는 시인의 다른 말을 음미하게 된다.

시인은 예언적 능력이란 말이 어색하다면 단순히 징후 포착 능력이라고 말해두자는 말을 했다.

징후 포착의 방식을 배우기 위해 여러 시(詩)와 시론(詩論)과 시론(時論)을 읽어야겠다. 그 타자의 목소리들을 듣고 내 길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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