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서른 여섯의 나이로 타계한 시인 여림. 나는 1999년 신춘문예 당선 시인인 그를 이름으로 알지 못한 대신 가끔 그의 시를 알았던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최측의 농간(출판사)에서 보내준 그의 유고 시집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에 수록된 한 편의 시 때문인데 그것은 ‘1999년 2월 3일 아침 0시 40분’이란 시이다.
2월 3일이면 신춘문예 당선 이후겠는데 이 시에서 시인은 “...힘이 든다/ 여지껏 시와 내가 지녀왔던 경계심, 혹은 긴장감들이/ 한꺼번에 용해되면서 나는 밤낮으로 죽지 않을 만큼만 술/을 먹었고 그 술에 아팠다/ 생각해 보라/ 35년을 아니, 거기에서 10년을 뺀 나머지의 생애를 한/ 사람이 시로 인해서 피폐해 갔다”는 말을 한다.
신춘문예 당선으로 경계심 또는 긴장감이 용해되는 것은 어떤 류(類)의 것일까? 어떻든 ‘1999년 2월 3일 아침 0시 40분’이란 시는 윤동주 시인의 ‘참회록’의 한 구절을 생각하게 한다.
“....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란 구절이 있는 윤동주 시인의 시.
시대가 다르고 고뇌의 성격이 다르지만 아픔은 아픔이라 말하는 것은 굳이 두 시에 모두 나이를 지칭하는 숫자(이십사 년 일 개월 vs 35년, 거기에서 10년을 뺀 나머지의 생애)가 등장하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말하자면 여림 시인의 법랍(法臘: 원래 뜻은 출가하여 승려가 된 해부터 세는 나이) 즉 (대부분) 무명 시인으로, 그리고 신춘문예 당선으로 맞은 짧은 환희를 맛본 시인으로서의 삶은 25년인 셈이다.
어제 나는 폭염 속에서 국립중앙도서관으로, 경복궁으로, 정독도서관으로 바쁘게 돌아다녔다.
걷기의 양이 갑자기 늘어 지치고 아픈 가운데 중요한 서류작업을 위해 간 정독행은 헛걸음이 되고 말았다. 일정을 확인하지 않은 탓이다.
어제의 헛걸음으로 나는 여림 시인의 절망을 잠시 내 것인 듯 여겼다. 나이도 다르고 등정(登程: 오르는 길)도 다르고 등정(登頂)도 경험하지 못한 나의 오만이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