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타계한 박이문 님의 ‘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을 뒤늦게 읽고 있다. 뒤늦게라는 말은 ‘존재와 표현‘, ’현상학과 분석철학‘ 같은 동(同) 저자의 책들을 읽느라 미처 시간을 쓰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위의 두 책이 본격 철학서인 데 비해 ’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은 철학적 에세이 또는 회고록에 해당한다.
두 책들과 달리 은유가 적소(適所)에 등장한다는 점으로도 그런 점을 알 수 있다. 아리아드네의 실,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178 페이지), 페넬로페의 글쓰기(106), 파우스트적 욕망(107 페이지) 등등...
아리아드네의 실,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 등은 저자가 발견한 ’철학적 바윗돌을 움직일 수 있는 단서‘를 은유하는 말이다.
저자는 철학적 글쓰기를 페넬로페의 옷짜기에, 시적 글쓰기를 페넬로페의 반작업(反作業)에 비유한다.
페넬로페는 남편 오디세우스가 전쟁에 나가자 몰려든 구혼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시아버지의 수의(壽衣)를 다 짜면 청을 받아주겠다고 한 뒤 낮에는 천을 짜고 잠에는 푸는 반복 작업을 했다. 천을 푼 것은 반작업이다.
페넬로페가 지혜로운 여성이듯 아리아드네 역시 지혜롭다. 아리아드네는 제우스와 에우로페 사이에서 태어난 ’미노스’와 파사파에의 딸이다.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미노스가 포세이돈과 맺은 계약을 어기고 황소(포세이돈이 미노스에게 준)를 돌려보내지 않자 포세이돈은 미노스의 아내 파시파에를 바다에서 올라온 황소에게 정신없이 빠져들게 한다.
미노스는 다이달로스에게 특별 주문한 미로에 황소와 파시파에 사이에서 태어난 반인반수의 미노타우로스를 가둔다.
매년 아테네에서 잡아들인 아홉 명의 소년과 소녀를 먹이로 바쳐야 하는 등 시름이 깊어지자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가 크레타 섬으로 향한다.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의 도움(미로에 들어가는 테세우스에게 실을 주어 테세우스로 하여금 실을 되짚어 나올 수 있게 함)으로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끔찍한 저주로부터 아테네를 해방시킨다.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와 함께 아테네로 가는 도중 실수로 그녀를 낙소스 섬에 두고 가버리고 그 사이 디오니소스가 그녀를 아내로 삼았다.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가 그런데 내게는 백상현 교수의 ’라깡의 루브르‘에 나오는 설명이 참고점이 된다.
’정신병동으로서의 박물관‘이라는 부제를 가진 이 책은 루브르의 전시물들을 강박증, 히스테리, 멜랑꼴리, 성도착의 것들로 분류한다.
저자는 다이달로스를, 폐쇄성으로 수인을 서서히 질식시키는 감옥이 아닌 출구에 도달할 것만 같은 가능성의 환영(幻影)이 유지되게 하는 미로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신경증적 마음의 위대한 건축가라 칭한다.
욕망이 소멸하지도 않고 초과되지도 않는 구조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던 존재였다는 것이다.
더 전문적이고 복잡한 이야기는 생략하고 인용하자면 저자는 박물관을 공백을 가두는 가장 전형적인 장소로 본다.
저자는 박물관을 죽은 사물들의 장소, 공백의 장소로 본다.(자세한 것은 책을 직접 참고하시길..)
이 책도 그렇지만 캐롤 던컨의 ’미술관이라는 환상‘도 빼놓을 수 없다. 정치(적 의도)와 무관한 듯 보이는 미술관이 이데올로기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주장하는 던컨의 논의...
그나저나 나는 왜 ’정신병동으로서의 박물관‘(부제), ’미술관이라는 환상(‘Civilizing Rituals’) 등의 책에 흥미를 느끼는가.
부조화한 삶의 출구를 찾으려는 것인가. 그렇게 말하기에 두 책은 사회적이며 객관적인 논의가 반영된 지극히 이성적인 책이다.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