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학자 이현군의 '서울, 성 밖을 나서다'는 지금의 서울은 도성 안이 아니라 성 밖에 새로 만들어진 도시라는 의미를 지닌 제목의 책이다. 가령 서초, 송파, 강남 3구와 여의도는 조선 시대 한양이 아니었다. 서초구는 경기도 과천이었고 강남, 송파, 강동은 경기도 광주였다.
지난 문화해설사 수업 시간(2016년 10월 27일) 서울 강남의 선정릉(宣靖陵)을 보며 강남 도심에 왕릉이 있다니, 란 생각을 했다. 하지만 사실은 강남에 봉은사와 선정릉이 들어선 것이 아니라 사찰과 왕릉이 있는 한강 남쪽의 옛 경기도가 서울에 편입된 것이다.(207 페이지)
저자는 서울 변화사를 공부하기 전에는 강남을 서울로 알았었다고 한다. 현재 서울은 강북 14구, 강남 11구 등 총 25구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시대 한성부의 핵심은 도성 안이다. 북의 백악, 서의 인왕, 남의 목멱, 동의 타락산으로 둘러싸인 곳이 도성이다.
나도 착각을 하고 있었다. 강남, 서초, 송파의 강남 3구라는 말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관악, 영등포, 금천, 구로 등의 구가 강남이라는 말에 의아함을 느꼈던 것이다. 착각할 만한 것은 또 있다. 대개 북쪽이 위가 되게 지도를 그리고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기에 한강 남쪽의 하천이 한강으로 들어가지 않는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안양천과 탄천이 남쪽에서 발원하여 한강으로 들어가는 하천이다.
저자는 지리학의 관점, 공간과 장소의 맥락에서 서울을 넷으로 나눈다. 사대문을 기준으로 한 도성 안, 한성부에 포함되었지만 도성 밖에 해당하는 지역, 한강, 현재 서울에 포함되는 조선시대 경기도 지역 등이다.
한강은 강원도에서 발원한 북한강과 충청도에서 시작된 남한강이 양수리에서 만나 한성부 남쪽을 흘러 서해에서 임진강 및 예성강과 만나는 강이다. 강남 지역은 조선시대에는 경기도였던 곳이다. 1943년은 구(區) 제도가 시행된 해이다. 우리나라는 원래 섬나라(반도?)가 아니었다. 분단이 되면서 남한은 섬이 되었다.
무슨 무슨 로(路)라는 말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 따온 말이다. 성 밖을 나가면 어느 고을에 도착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름이다. 조선 시대 성곽은 일제 강점기 전후로 계속 파괴되었다. 주로 파괴된 지역은 상대적으로 낮은 지역, 주요 교통로였다. 광무 3년(1899년) 5월 서대문과 청량이 사이에 전차가 개통되던 때 동대문과 서대문 부분의 성곽 일부가 철거되었다.
광무 4년(1900년) 종로와 용산을 연결하는 전차 궤도가 부설되면서 남대문 부근의 성곽 일부가 철거되었다. 남대문 부근의 성곽이 대대적으로 철거된 것은 융희 원년(1907년)이다. 1907년 일본 왕의 아들이 한국을 방문했는데 이때 성벽처리위원회를 만들어 조직적으로 성벽을 파괴해 나갔다.
도성의 성곽이 사라지면서 성문을 여닫는 것이 의미가 없어져 인정(人定), 파루(罷漏) 제도도 사라졌다. 인정(人定)은 조선시대 치안 유지를 위해 실시한 통행 금지 제도로 매일 밤 10시경에 28번의 종을 쳐 성문을 닫고 통행 금지를 알린 것이다. 파루(罷漏)는 통행금지 해제를 알리기 위하여 새벽 4시경에 종을 33번 친 것이다.
전농(典農)은 조선 시대 왕이 농사 시범을 보이던 곳이다. 친경(親耕)은 왕이 농사를 직접 짓던 일이다. 적전(籍田)은 왕이 농사를 짓던 밭이다. 전농동의 전농이 典農인데 궁의 후원에 친경지(親耕地)나 친잠지(親蠶地)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궁 밖의 특정 지역에서도 왕이 농사 시범을 보인 것이니 낯설게 느껴진다.
동헌(東軒)과 객사(客舍) 중 중요한 것은 객사(客舍)이다. 객사는 여관이 아니다. 살아 있는 임금의 신위가 모셔져 있던 곳이다.(75 페이지) 사찰은 종교 시설이기도 했지만 지역의 거점 역할을 하기도 했다. 조선 시대 태조는 새 도읍지를 찾는 과정에서 회암사에 머물기도 했다.(78 페이지)
광진구는 경기도 구리시와 경계가 되는 곳이다. 수락산, 불암산, 용마산, 아차산이 중랑천 동쪽의 맥을 형성하고 있다.(86 페이지) 아차산(峨嵯山)에 올라가면 경기도까지 가본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전망이 좋다. 한강도 잘 보이고 강남도 보이고 경기도도 보인다. 전철을 타고 오지만 멀리 온 것처럼 느껴진다. 아차산은 봉수대가 있던 곳이다.(87 페이지)
도성 안의 대로는 궁궐에서 시작한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에 있는 세종로가 가장 큰 길이다. 종로는 동대문과 서대문을 연결하는 큰 길이다.(110 페이지) 남산은 서울의 남산이 아니라 한양 도성의 남산이다. 서울의 남산은 관악산이다.(112 페이지)
현대 도시 서울을 이해하려면 밤에 답사를 다녀야 한다. 남산에서 내려다 본 야경 속에 서울의 숨겨진 도시 질서가 보인다. 낮에는 모든 것이 다 보이기에 오히려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할 수 있다. 어둠 속에서 별이 더 빛나듯 자본주의 도시 서울은 밤에 더 잘 보인다.(113 페이지)
현재 서울시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향교가 양천향교(강서구 가양동 234 번지) 조선 태종 때 창건된 것인데 지금 우리가 보는 향교는 새로 복원한 것이다.(133 페이지) 양천향교 역 근처에 겸재 정선 기념관이 있다.(136 페이지)
정조가 수원 화성으로 가던 길은 두 갈래였다. 남태령을 넘어 과천을 지나 수원으로 가는 길과 시흥을 지나는 길이다. 정조는 과천에 사도세자를 죽게 한 김약로의 형 김상로의 무덤이 있어서 그 꼴을 보기 싫어 시흥을 통하는 길을 이용했다고 한다.(151 페이지)
저자는 전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 다음이 낙성대역인데 처음 서울에 왔을 때 낙성대도 대학인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낙성대는 하늘에서 별이 떨어진 터 즉 낙성대(落星垈)이다. 한 사신이 있어 밤에 시흥군에 들어오다가 큰 별이 인가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아전을 보내 보게 했는데 마침 그 집 며느리가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가 강감찬이다.(160, 161 페이지)
서울 특별시 기념물 1호가 잠원동의 뽕나무였다. 남산이 누에머리 모양을 닮았고 누에 먹이가 되는 뽕이 많아야 하기에 잠원과 잠실에 뽕나무를 심은 것으로 서초구청 자료집인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서초전’은 말한다.
한양 도성에서 남한산성으로 가려면 송파진과 광진을 건너야 한다. 송파진 옆에 송파창이 보이고 그 남쪽에 삼전야(三田野)가 표시되어 있다. 송파창과 삼전야 사이에 삼전도비가 있다. 정식 명칭은 대청황제 공덕비이다. 청태종에게 인조가 세 번 절하고 땅에 이마가 닿도록 아홉 번 고개 숙이는 치욕(삼배구고두례: 三拜九叩頭禮)을 당했다. 비석에 새겨진 글자는 여진(청나라) 문자, 몽골문자, 한자 등이다.(189 페이지)
잠실(蠶室)은 뽕나무 밭, 누에치기, 양잠 등에서 유래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고 지금은 휘황찬란한 도시가 되었다.(199 페이지) 석촌호수에서 좀 더 동북쪽으로 가면 올림픽 공원이 나온다. 86 아시안 게임과 88 서울 올림픽이 유치되면서 조성되었다. 원래 가난한 사람들이 살던 동네였는데 그들을 내보내고 공원으로 만들어졌다. 조성 당시 발굴단 총지휘자가 군인이었다고 한다.(201 페이지)
앞서 선정릉 이야기를 했지만 그 능이 있는 곳은 삼릉공원이라 불린다.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의 무덤인 선릉, 성종의 아들이 중종의 무덤인 정릉이 있기 때문이다.(204 페이지) 서울의 중심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려면 고등학교의 이전을 살펴보면 좋다. 현재 강남의 서울고, 휘문고, 경기고, 숙명여고, 동덕여고, 경기여고, 정신여고 등은 강북에 있던 학교였다. 옛 서울의 중심은 강북 그 중에서도 도성 안이었다. 종로의 정독도서관 입구에 중등교육발상지라는 표지석이 있다. 이곳에 경기고등학교가 있었다.
서울고등학교는 경희궁(터)에 있었다. 일제가 옛 궁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고등학교를 세웠다.(210 페이지) 서초, 강남, 송파구의 도로망은 격자형이다. 지역을 개발할 때 인공적으로 도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211 페이지)
앞에서 강남, 서초, 송파의 강남 3구라는 말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관악, 영등포, 금천, 구로 등의 구가 강남이라는 말에 의아함을 느꼈다고 말했는데 저자 역시 서울에서 강남 중의 강남은 그 세 구로 서울시민마저 소외시킨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1963년 이전에는 서울도 아니었던 곳, 영등포 동쪽이었던 곳이 진짜 강남이다. 이제 어느 지역에 사는가가 경제적 능력을 보여주는 지표가 되었다.(212 페이지) 저자는 집은 투자 대상이 아니라 사는 곳이라 말한다.(222 페이지) 집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이라는 말이 기억난다. 저자는 이러다가 서울에 아파트(a – part - ment: 분리된 개인 주택)만 들어서는 것은 아닌지 우려한다.
현재 서울의 의미는 역사성이나 문화중심지라기보다 아파트가 비싼 곳으로 인식된다. 이제 생각의 프레임을 바꿔야 한다.(224 페이지) 회복이 필요하다.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어도 되살릴 수 있는 것은 다시 살려야 한다. 저자는 말한다. 앞에서 말한 산과 하천을 다 외울필요는 없다고. 그리고 집 근처에 있는 산을 먼저 올라가는 것부터 시작하자고 말한다.
강도 마찬가지이다. 강은 흐르고 연결된다. 이 하천을 따라 걸으면 한강을 만나고 한강을 따라 걸으면 또 다른 하천을 만난다. 조금씩 산, 계곡, 하천을 따라 걷는다면 어느 순간 서울의 자연이 머릿 속에 그려질 것이다.(229 페이지)
‘서울, 성 밖을 나서다’를 읽음으로써 올해 뒤늦게 알게 된 이현군의 책을 두 권째 읽게 된 것이다. ‘옛 지도를 들고 서울을 걷다’는 다소 생소했지만 ‘서울, 성 밖을 나서다’는 저자의 논지에 내가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옛 지도를 들고 서울을 걷다’에 비해 쉬워서인지 구체적이고 생동감이 느껴졌다. 서울을 더 많이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읽었음을 말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