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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유토피아
리아 페이- 베르퀴스트·정희진 외 62인 지음, 김지선 옮김, 알렉산드라 브로드스키 & 레 / 휴머니스트 / 2017년 2월
평점 :
절판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는 한국과 미국의 페미니스트 64명이 쓴 에세이, 시, 픽션, 그림, 인터뷰 등을 모은 책이다.(일본인이 한 명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은 페미니즘 책이지만 수록된 내용들이 서로 조금 이질적이거나 모순적이기도 하다. 물론 오히려 이런 점이 다양한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으로 인한 살아 있음을 증거한다 할 수 있다.
한국인 필자들로는 정희진, 최은영, 이진송, 김하나, 최서윤 등이 참여 했다. ‘여자가 여행을 떠날 때’, ‘미친년들’, ‘레스보스 섬’, ‘유토피아에도 투쟁이 있을까‘, ’유토피아에서 포르노 배우는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남자에게서 자유로운 세상’,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 ’눈부신 순간‘, ’페미니스트 헌법‘, ’하느님이 여자가 되면‘ 등 다양하고 개성 넘치는 글들이 읽는 맛을 더한다.
“모든 인간 존재가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출구가 없는 세계를 상상하려고 할 때, 나는 우리가 동등한 대지 위에서 자신을 완전히 실현하는 이미지를 그려본다.”(23 페이지) 사실 여행, 그것도 여자가 하는 여행은 위험하다. 64명의 필자가 참여한 책인데 전체가 400여 페이지 정도이니 짧은 글들이 주를 이룬다.
따라서 결론을 낸다기보다 단면(斷面)을 보여주는 정도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메시지가 강렬해 흡인력이 있다. 테사 스미스는 가부장제가 죄악시하며 규탄하는 것을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는 미덕으로 칭송한다는 말을 한다. 그것은 절망을 드러내고 소리내어 불만을 토로하고 대담하게 자유로운 상상력을 펼치고 석양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원하는 것이다.
이 점이 페미니스트 유토피아의 위상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한 필자는 가모장제라는 전복을 위한 날개를 펴는 첫걸음으로 페더 크레스트(Feather Crest) 건설을 주장한다. 페더 크레스트는 사랑스럽고 가벼운 이름으로 선택된 것이다.(feather는 깃털, crest는 새의 볏, 정상: the top of extreme point of something 등을 의미한다. 물리학 용어로는 마루를 의미한다. 매우 상징적인 이름이다.)
레스비언의 기원이 된 레스보스 섬이라는 이름을 피해 만든 이름이다. 정희진은 전쟁의 원인은 단 한 가지로 누군가 또는 우리가 원하기 때문이라는 말에서 영감을 얻어 유토피아는 우리가 원한다면 실현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이 글의 제목은 ’동네 급식소‘이다. 이 글은 여성들이 무임금 노동인 끼니 준비를 하는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 차원에서 제기된 글이다.
자신의 어머니가 순명(順命)하지 못하고 파계한 수녀였다고 밝힌 필자는 어머니가 평생 소원인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포기한 것이 아버지의 밥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필자는 2000년대 초반 명문대 장학생으로 미국 유학을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식구들 밥은 어떡하고?”란 주위의 말을 듣고 분노를 넘어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필자는 여성들의 식사 준비 스트레스, 노동, 고민의 시간을 줄이기 위해 또 음식 낭비를 막기 위해 최소한 열 가구 단위로 급식소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필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최우선의 유토피아는 친환경 유기농 재료로 음식을 만드는 24 시간 개방 무료 식당이 500 미터 간격으로 있는 것이라 말한다. 이 정도 간격이면 식후 걷기를 위해서도 좋다고 필자는 말한다. 필자의 구체적이고 일상적이면서도 혁명적인 대안 제시는 역시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엘리자베스 도이치는 ’섭식장애를 보내며‘에서 아름다움을 닮기 위해 우리 몸을 바꾸거나 틀에 욱여넣을 필요 없이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해보자고 말한다. 도이치는 우리는 몸이 우리하고 상상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글을 보며 최근 나온 ’살빼지 않겠습니다‘란 책을 생각했다. 프랑스 모델들의 화려함 이면에 거식증과 우울증의 망령이 도사리는 현실을 고발한 책이다.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는 페미니스트들의 희망과 꿈에 대한 책이다. 다양한 주제의 글들을 통해 우리는 세상의 복잡함보다 여성들이 불리한 점들이 참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 필자는 “놓치고 있는 프로젝트가 무엇인가?”라는 페미니즘적 질문을 계속 밀어붙여야 한다고 말한다.(155 페이지) 이 글의 제목은 ’유토피아에도 투쟁이 있을까‘이다.
또 다른 필자는 우리의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해 아기가 아직 요람에 있는 동안 젠더화된 기대에서 스스로를 해방하는 것을 원한다고 말한다.(173 페이지) 필자는 아들이다 딸이다를 말하는 대신 사람이라 말하는 출산 현장을 상상한다. "축하합니다. 사람입니다. 대단한 일을 해내셨습니다."란 의사의 말이 들리는 현장을 상상하는 것이다.
최서윤은 '우리 모두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루어진 세계'란 글에서 메갈과 미러링에 대해 논한다. 메갈은 2015년 5월부터 12월까지 디시인사이드 메르스겔러리와 이들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웹사이트 메갈리아에서 활동하던 사람들로 여성혐오로 유명한 일베의 말투를 차용했다.
미러링은 거울이 빛을 되비추듯 자신이 받은 것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여성에게 가해지던 성희롱의 방식으로 남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것이다. “미러링 만큼 역지사지에 도움이 되는 방법이 있을까?“라고 말하는 필자는 배움의 기회가 없어서 저지른 실수가 평생의 낙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덧붙인다. 물론 배울 기회가 있었음에도 여성혐오를 고수하는 남자들은 용서의 여지가 없다.
은하선은 '남자에게서 자유로운 세상'에서 “페미니스트 남자를 아직 만나 보지 못한 것은 자신이 게으른 탓일 수 있지만 세상에 할 일이 이토록 많은데 어디에 있을지도 모를 상상 속의 동물 기린과도 같은 페미니스트 남성을 찾는 일에만 에너지를 써야 할까?“라 말한다.(281 페이지)
은하선이 상상하는 유토피아는 모든 여성이 남자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배우는 세상이다. 은하선은 여성들이 좋은 남성을 기다리기보다 남성에게서 자유로워지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한 필자는 유토피아를 갈등을 환영하는 세계라 말한다.(332 페이지) 이진송은 처음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란 말을 들었을 때 고민했다고 한다.
“미래일까? 장소일까? 관계일까? 제도일까? 정체성일까?”(353 페이지) 이진송은 자신의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는 토마스 모어의 상상과 달리 물질적으로 풍부하지도 정서적으로 평화롭지 않다고 말한다. 이진송은 모두가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읽고 싶은 책을 살 수 있고 그 책을 읽은 수 있는 저녁을 가지고 권위나 인정에 대한 강박 없이 저만의 이야기와 문장을 쓰고 공유할 수 있기를 꿈꿀 뿐이라 말한다.(354 페이지)
'페미니스트 유토피아'의 필자들은 국적도 다르고 나이나 정체성 등에서 다양하다. 이진송의 글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든다. '연애하지 않을 자유'를 읽으며 크게 공감했었는데 이번 글도 참 좋다. 그의 미래에 주목하고 싶다. 지금도 의미 깊은 글을 쓰지만 공부(현대소설)가 어떤 진보와 깊이를 이끌어낼지 궁금하다.
책을 읽기 전에 준비 차원으로 읽은 라비나 고메즈(Lavina Gomez)의 '대상관계이론'으로부터 충격을 받았다. 여성 심리 치유사의 책으로 존 볼비의 모성 박탈(maternal deprivation)이론의 이면(볼비의 이론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으로 이용되었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을 밝힌 글로부터 내가 갖게 된 감정은 충격이라기보다 깊은 공부를 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이었다.
사회적 연결고리를 생각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를 세우려는 사람들 역시 같은 차원의 과제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는 오랜만에 읽은 생동감 넘치는 페미니즘 글이다. 계속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유의미한 책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