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잠이 덜깬 채로 클래식 음악 방송을 켜니 아딘셀의 바르샤바 교향곡이 나온다.

그렇게 좋아하는 곡이 아닌데 곡명과 작곡가 이름이 정확히 기억난다. 더구나 의식이 불명료한 상태인데도 그러니 기이한 일이라 말해야 하는 것일까?

음악도 공부하듯 곡명과 작곡가명을 기억해두는 습성 때문일까?

하지만 자주 듣지도 않는 곡이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어떻든 이와 반대로 좋아하는 곡을 분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슈베르트의 즉흥곡 네 곡이 그렇고 쇼팽의 발라드 네 곡이 그렇다. 바흐의 파르티타, 프랑스 모음곡, 영국 모음곡 등등도 그렇다.

이런 예는 참 많다. 내 무의식과 의식이 분열되어 있어서 생기는 일은 아닐 것이다.

곡 자체가 미묘하고 섬세한 차이들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곡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고 주 멜로디를 가려내야 음악을 즐기고 아는 것일까?

최근 들은 이야기가 내게 생각거리를 준다. 시인도 시를 쓰고 한 달 정도가 지나면 어떤 상황에서 그 시를 썼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는 시인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또는 파악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말보다 더 충격적(?)이다.

어떻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겠지만 의미심장한 정보다.

나에게는 시나 소설을 속속들이 알아야 이해한 것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빈틈, 여지, 작가 자신에게도 낯선(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는)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결과이리라.

그래서 시를 논문 쓰듯 분석해왔다.

최근 ˝상식은 없고 지식에만 몰두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것도 같은 맥락을 증거하는 말일 테다.

지식욕이 권력욕의 한 형태라는 생각이 든다.

저장하고 쌓아두는 스톡(stock)형 읽기가 아닌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플로우(flow)형 읽기가 권장되는 시대이다.

그렇게 할 수 없는 장르가 있지만 새겨들을 말이다.
사람을 대하는 데에서도 어김 없이 적용될 말이다.
아프지만 깨달음의 시간이기도 한 것이 다행이다. 아프기만 하고 깨달음은 없는 시간은 없는 것이겠으니 사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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