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문화 평론가 강영희 님의 ‘올바른 불행 사용법 몰랐던 류철균‘이란 글을 읽었다.
류철균이 ˝나는 불행의 사용법을 알고 있다˝는 자신의 카톡 글을 언젠가 ˝나는 불행하다˝는 글로 바꾸기 바란다는 강영희 님이 주장하는 것은 불행에 대한 진정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보며 ‘호모 루덴스‘의 저자 요한 하위징아가 ‘문화사의 과제‘란 책에서 진화란 개념이 역사학에서 처음 나온 것이라 주장한 것을 생각하게 된다.
이 말을 통해 돌아보게 되는 것은 진화의 의미, 역사를 배우는 것의 의미, 그리고 내 정체성 등이다. 최근 정조(正祖)를 좋아한다는 36기 동기 한 분, 연암 박지원을 좋아한다는 한 시인과 대화를 하며 내 정체성을 돌아보았다.
나는 정조를 좋아하고, 연암보다 다산을 좋아한다. 연암은 자신을 감추는 글을 잘 썼고, 다산은 자신을 명징하게 드러내는 글을 잘 썼다. 연암이 해학과 골계에 능했다면 다산은 진지하고 간곡했다.
연암과 다산 사이에 정조가 있다. 문체반정으로 인한 화제거리는 그 한 예이다. 정조의 독살설, 정조가 고백한 태양증(기와 담 등의 울체로 인한 다혈질, 조급증 등) 등을 더 알아보아야 한다.
정조는 밤에 벽을 돌 때가 있었다고 한다. 정조의 개혁군주 여부 즉 정조가 개혁 군주인가 아니면 수구적 인물인가의 여부 등도 더 알아 보아야 한다.
물론 내게는 왕권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도를 치우고 어좌 뒤에 책가도 병풍을 둘러친 정조,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한 사건으로 트라우마를 안고 반대파에 둘러 싸인 채 왕이 된 정조,
총애하는 의빈 성씨 사이에서 얻은 세자 순의 이른 죽음을 지켜보며 한없는 상실감에 싸였을 정조에 관심(연민)이 간다.
불행 그리고 거기서 나아가 인간에 대한 연민이 없을 경우 나타나는 증상의 생생한 예가 최근 드러났다. 삼성의 반도체 노동자가 백혈병으로 사망한 것에 이의제기하는 사람들을 겨냥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신성한 삼성을 흔들지 말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하는 이상한 괴물 같은 족속들이다. 어디부터 잘못된 것인지 안타까운 현실이다.
자본주의의 영향에 괴물이 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바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럼에도 우려스러운 것은 물론이다. 한 생명에 대한 비인간적 시각은 백번 탄핵되어도 지나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