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 여행 바이블 - 물빛 가득한 영혼의 휴식처
오동석 글.사진 / 서영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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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석님의 <크로아티아 여행바이블>은 요즈음 쓰고 있는 발칸 여행기에 참고하려고 고른 책입니다. 저자는 동유럽에서 10여년을 살았으며, 유럽의 현지 가이드를 하면서 여행작가 겸 투어리더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자가 쓴 글을 보면 아주 다양한 자료를 잘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슬로베니아의 블레드 호수, 포스토이나 동굴, 크르아티아의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그리고 아드리아해의 진주 두브로브니크를 ‘발칸여행의 판타스틱 포’로 꼽았습니다. 마침 제가 다녀온 발칸여행 상품에서도 이들 네 곳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는데, 저자의 말씀이 충분히 공감이 가는 것 같습니다.

 

‘물빛 가득한 영혼의 휴식처’ <크로아티아 여행 바이블>에서는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베네치아, 보스티아 헤르체고비나의 4개국의 명소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가 가보지 못한 곳을 소개하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가본 곳이 빠져 있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루마니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알바니아 같은 발칸(광범위의) 국가들의 경우는 여행지다운 곳이 부족하다 못해 없는 곳도 있다고 잘라 말하기도 합니다. 저자는 좋은, 아니 유능한 가이드임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여행에서 처음 5분에 해당하는 것은 도착지 숙소라는 것입니다. 여행이 어떻게 진행될 것이라는 개념을 잡는 것은 첫날 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한 여행은 후반으로 갈수록 좋아야 한다는 점도 공감합니다. 처음에 좋은 곳을 보면 뒤에 보는 것들은 시시하게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발칸 같은 경우는 여행사 상품이라고 해도 다양하게 구성되고 있어서 기회가 되면 다시 가볼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빠지지 않는 판타스틱 포의 경우는 다시 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크로아티아 여행 바이블>에는 여행지에 대한 다양한 설명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역사를 포함한 인문 지리를 망라하고 있어서 이 지역에 대한 앎을 풍부하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발칸여행기를 쓰면서 많이 인용하게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원전을 밝혀서 읽는 분들에게도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의 경우는 원자료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진에 대하여도 이야기하면, 아주 좋은 사진을 곁들이고 있는데, 같은 장소도 시간에 따라 다른 모습을 소개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 사진 설명이 붙여져 있다는 것입니다. 책으로 묶어 내다보면 설명이 길어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여행칼럼을 쓸 때는 요점만 추려가 간략하게 정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칼럼이 끝나더라도 나중에 얻는 자료는 꾸준하게 추가해서 보완하기 때문에 이야기가 점점 길어지는 경향이 있기도 합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는 가급적이면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려고 노력을 하게 됩니다. <크로아티아 여행 바이블>에서는 그런 점이 조금 아쉽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사라예보의 라틴 다리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암살당하는 장면은 순전히 우연의 연속이있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예정된 장소에서 저격이 이루어진 것처럼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은 맞지만 당시 발칸반도를 둘러싸고 있던 제국들 사이의 힘의 균형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었는지를 설명했더라면 좋았겠다 싶습니다.

 

발칸을 여행하면서 보았던 것들 중에 궁금했던 것들을 이 책을 읽으면서 답을 얻은 것도 적지 않았습니다. 물론 우리 일행을 안내한 가이드도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지만, 인솔에 가이드까지 겸하는 바람에 힘이 들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크로아티아를 중심으로 한 발칸 여행을 다시 다녀오는 느낌으로 읽었던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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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텍쥐페리의 우연한 여행자 - 인간 존재의 빛나는 증언
생 텍쥐페리 지음, 양혜윤 옮김 / 세시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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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생 텍쥐페리의 우연한 여행자>를 읽게 되었습니다. 사실 다시 읽은 셈입니다. 읽어가면서 기시감이 더해지더니, 모두 읽은 다음에 확인해보았더니 지난해 읽었던 <인간의 대지; http://blog.joins.com/yang412/13684296>와 같은 작품이었습니다. <인간의 대지>의 원제는 ‘Terre des hommes’인데, <생 텍쥐페리의 우연한 여행자>는 ‘Wind, sand and stars’로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불어판과 영어판으로 각각 번역을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글의 내용에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만, 표현에서는 차이가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옮긴 분들이 원전에 대하여 언급을 하지 않고 있어서 다만 추측을 할 따름입니다.

 

<인간의 대지>는 ‘대지는 우리에게 만권의 책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왜냐면 대지가 인간에게 저항하기 때문이다’로 시작하여 “‘정신’의 바람이 진흙 위로 불어야만 비로소 ‘인간’은 창조된다.”로 끝납니다. 적어놓고 보니, 대지가 인간에게 저항한다는 표현이 과연 적절한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 앞에 인간이 한 없이 작은 존재라는 것을 생텍쥐페리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시원치 않은 비행기로 자연에 맞선다는 것 자체가 도전 일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막에 불시착해서 천행으로 빠져나온 자신의 경험은 물론 안데스 산에 추락하여 귀환한 기요메의 경험, 그리고 이륙은 했지만 돌아오지 않은 선배 동료 비행사를 보면서 자연의 위대함을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생 텍쥐페리의 우연한 여행자>는 ‘대지는 우리에게 그 어떤 책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왜냐하면 대지는 저항할 줄 알기 때문이다.’로 시작해서 ‘영혼이 대지 위에 숨 쉴 때, 오직 신성한 정신만이 인간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로 끝을 맺고 있어 맥락은 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과 모래와 별’이라는 제목은 거대한 자연 앞에서 나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때문인지, 저자의 경험을 낭만적으로 표현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여행을 하다보면 밤에 비행기를 타는 경우도 있습니다. 운 좋게 창가에 앉게 되면 지상에 흩어져 있는 불빛을 볼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는 엄청난 불빛들이 모여 휘황찬란하기도 하지만, 사람이 별로 살지 않는 곳을 지날라치면 헤아릴 수 있을 정도의 불빛이 흩어져 있는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생텍쥐페리는 그 불빛의 의미를 이렇게 읽었습니다. “이 어둠의 망망대해에서 반짝이고 있는 모든 불빛들은 하나하나가 그 나름대로의 뜻과 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어떤 집안의 불빛은 책을 읽기 위해서 그렇게 켜져 있었고, 다른 집안에서는 공간을 측정하기 위해서, 또 안드로메다 성운을 열심히 관찰해보기 위해서 켜져 있기도 했다. 그 모든 불빛 속에서 사람들은 사랑을 속삭였을 것이다.(7쪽)”

 

사막에 추락한 생텍쥐페리가 생환되는 과정도 그렇지만 기요메가 겨울 안데스 산속에 추락했다가 생환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은 어쩌면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귀감이 되는 바 있다고 생각합니다. 피켈도, 로프도, 식량도 없이 4,500미터나 되는 높은 봉우리를 기어오르기도 하고 영하 40도의 추위 속에서 발과 무릎, 손이 터져 피를 흘리며 깍아지른 절벽을 기어오르기를 계속하였지만, 종국에는 쏟아지는 졸음에 무의식적으로 저항하면서 걸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동료들에게 돌아가기 위한 길이 아니라 죽음으로 향하는 길일 수도 있는... 하지만 자신이 돌아가지 못할 경우에 아내가 부딪쳐야 하는 난관을 생각하면 반드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사력을 다해 앞으로 전진했다는 것입니다. 역시 사랑의 힘은 무서운 것 같습니다. 생텍쥐페르는 파리-다카르 노선의 우편비행기와 남미노선의 우편비행기를 몰면서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의 험난한 자연환경과 그에 맞서는 비행사들의 빛나는 열정을 작품에 잘 녹여냈던 것입니다. <생 텍쥐페리의 우연한 여행자>는 자신은 물론 동료들이 겪은 사건들을 변주없이 적고 있어 당시 우편비행의 사정을 잘 그려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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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플레
애슬리 페커 지음, 박산호 옮김 / 박하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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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평탄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누구나 한 번쯤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끔찍한 일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옆에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일 수도 있습니다만, 당사자에게는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헤어날 구멍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어려움을 헤치고 나갈 수 있습니다.


<수플레>에서는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충격적인 사건을 당하고 헤쳐 나가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스탄불에서, 뉴욕에서 그리고 파리에서, 세 사람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고 연결고리가 없습니다. 다만 무너진 삶을 추스르는 계기를 부엌이라는 공간에서 찾아낸다는 것과 거의 동시에 수플레를 만드는 요리책을 사게 된다는 점이 유일한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사람이 부딪히는 충격적인 상황은 결코 남의 나라 일이 아니라 바로 내가 당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작가가 서로 떨어져 살고 있는 세 사람의 인생을 돌아가면서 설명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구촌 어디에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 등장하는 뉴욕의 릴리아는 필리핀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촉망받는 여성 화가였는데 두 살 아래 아니와 결혼해서 37년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사랑이라 생각했던 릴리아는 어느 날 갑자기 아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남편과 아이들이 자신을 그저 가정부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람으로 생각해왔다는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 됩니다. 두 번째 등장하는 파리의 마크는 역시 아이가 없지만 아내와 알콩달콩 살아가다가 어느 날 아내가 부엌에 쓰려져 숨져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일상의 소소한 일을 모두 아내가 맡아서 해주었기 때문에 마크는 당장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세 번째 등장하는 이스탄불의 페르다는 아이들이 장성해서 집을 떠나고 남편과 함께 살고 있는데, 어느 날 다리가 부러진 친정어머니를 집에서 모셔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됩니다. 특히 페르다를 못살게 하는데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어머니입니다. 수술을 받고 열심히 재활치료를 받아 걸을 생각은 아예 접고 침대에 드러 누워버린 것입니다. 나중에는 치매 증세까지 생겨서 페르다의 삶을 구렁텅이에 몰아넣게 됩니다.


세 사람이 맞은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끔찍한 상황은 모두 다르지만 세 사람이 찾아낸 해결방법은 모두 부엌에 있었습니다. 릴리아는 당장 필요한 생활비를 하숙을 쳐서 충당하려 합니다. 하숙생들을 들여 그들에게 식사를 만들어주기 위하여, 그리고 음식냄새를 싫어하는 남편 아니를 괴롭히기(?) 위하여 다양한 요리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마크 역시 아내의 죽음을 딛고 일어서기 위하여 음식만드는 법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부엌을 먼저 만들고 할 수 있는 요리법을 늘려나갑니다. 마크의 아내를 잘 아는 친구들은 그런 마크를 소리없이 응원하구요. 페르다 역시 쓰러진 어머니를 비롯해서 남편과 함께 생활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요리하기는 페르다가 잘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보니 마크만 부엌일이 처음인 셈입니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수플레(Soufflé)는 거품을 낸 계란 흰자에 치즈나 감자 등을 섞어 틀에 넣고 오븐에 넣어 구워 낸 과자입니다. 그런데 거품을 내는 과정이나 오븐에서 굽는 시간에 따라서 볼록하게 솟아난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아주 어렵다고 합니다. 잘나가던 삶이 폭삭 망하는 꼴에 비유하고 싶어서였을까요? 작가는 수플레를 제대로 만들어내는 것으로 무너진 하늘에서 솟아날 구멍을 찾아내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삶이 모두 제각각이듯이 다양한 결말을 보여줍니다. 그 결말이 반드시 해피엔딩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는 오랜 악연의 끈을 잘라내고 화해하는 모습을 누구는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모습을 그리는 반면에 누구는 그저 주저앉는 모습으로 마무리를 해서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또한 하나의 마무리가 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리고 보니 슬픈 결말을 맞은 주인공은 잘못된 과거에 복수하듯 살다가 폭삭 가라앉는 수플레처럼 자신도 무너지고 말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주위 사람들과 관계를 풀어내기 위하여 노력한 주인공들은 제대로 된 수플레에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역시 부엌은 우주의 중심이고 주저앉아버린 영혼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인생의 레시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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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천국, 쿠바를 가다 - 세계적 의료모범국 쿠바 현지 리포트
요시다 타로 지음, 위정훈 옮김 / 파피에(딱정벌레)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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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의 의료체계가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아무래도 마이클 무어감독의 2007년 작 영화 <시코>가 개봉된 다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민간의료보험체계를 쿠바식 무상의료체계와 비교하여 충격을 안겨준 영화입니다. 당시 쿠바식 무상의료체계를 우리나라에 도입할 수 있을까하는 질문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쿠바의 의료체계에 대하여 알려진 바가 많지 않던 터라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바는 없습니다만, 과연 가능할까하는 의구심을 가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마침 년초에 쿠바를 여행할 기회가 있어 가이드에게 물어보았는데, 정말 쿠바에서는 무상으로 진료를 받고 있고, 서구식 무상의료체계에서 드러나는 진료대기의 문제도 없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꿈의 의료체계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은데도, 여전히 가능하겠는가 하는 의문은 남았습니다. 일본 나가노현 농업대학의 요시다 다로교수가 쓴 <의료천국, 쿠바를 가다>는 쿠바의 무상의료체계에 대한 송가라는 느낌과 함께 저자가 행간에 남긴 의미들이 제가 가지고 있던 의문을 키워준 것 같습니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쿠바가 사회주의혁명에 성공하고, 냉전시대에 소련에 밀착하여 미국정부와 갈등을 빚으면서 오랫동안 경제제제를 받아왔습니다. 최근 미국과 국교를 재개하고 있어 낙후된 쿠바경제가 회생의 기회를 맞았다고 합니다. 사실 현대의학은 이미 자본집약적인 산업의 경지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따라서 동원할 자산이 충분치 않았을 쿠바의 의료수준이 경지에 올랐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의료천국, 쿠바를 가다>에서는 그런 생각이 틀렸다는 점과 맞았다는 점을 같이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책은 모두 네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의료전달체계의 기본이 되는 1차의료를 담당하는 쿠바의 지역예방의료는 저변이 넓고 단단하게 구축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의사들이 자유롭게 직장을 선택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쿠바의 의학수준을 다룬 생명공학 부문에서의 성과를 보면 놀랄만하지만, 이 영역의 전반적인 수준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선택과 집중의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이런 성과를 통하여 만든 의약품을 해외에 수출하여 막혀있는 외화의 취득원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대체의학을 육성하는 것도 미국 등 서구사회가 대체의학을 추구하는 것과는 관점이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서구사회의 대체의학은 현대의학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환자들을 위한 틈새시장 같은 것인데, 과학적으로 효능이 입증되지 않아서 주류의료체계에 들어서지 못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쿠바가 시도하는 대체의학은 제2차 세계대전 무렵의 일본이나 전후 중국 공산당이 채택했던 전통의학으로 무너진 현대의학 체계를 메웠던 시도에 가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쿠바는 의료를 통하여 라틴아메리카지역의 중심에 서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재난의 현장에 대규모의료진을 보내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그리하여 의료를 통한 국제협력을 꾀하는 전략인 듯합니다. 인구 1100만 정도의 국가에서 연간 1만 명이 넘는 의사를 배출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한명의 의사를 교육시키려면 막대한 자원이 투입되어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1960년 쿠바혁명이 일어난 직후 새로 배출된 의사는 330명이었습니다. 쿠바 최대의학교인 아바나의과대학에는 2만8천명이 재학하고 있다고 합니다. 쿠바의 의학교육이 6년제임을 고려한다면 년간 5천명이 졸업하고 의사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쿠바의 의사수에 대한 자료를 보면 21세기 초반에 인구 1천명당 5명을 상회하는 수준입니다. 뿐 만아니라 2012년 세계 68개국에 파견된 쿠바 의료인력은 의사 1만5천명을 비롯하여 3만9천여 명에 달했는데, 여기에는 베네주엘라에 파견된 쿠바의료인력 3만명은 제외한 것입니다. 베네주엘라정부는 대신 하루 9만 2천 배럴의 석유를 공급했습니다. 구 소련이 무너지고 쿠바에 대한 지원이 끊어진 것에 대한 대응전략이기도 합니다.(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4385)


사회주의국가 쿠바가 전략적으로 육성하고 있는 의학교육의 산물인 의료인력을 국내에 재배치하는 전력으로서의 무상의료체계를 자본주의 국가에서 채택하는데 많은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재난현장에 투입되었다는 의료봉사단을 구성하는 의사들의 경력을 따져보았을 때도 응급의료에 대한 경험이 얼마나 충분했는지 의문이 들었다는 정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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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 -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삶의 해부
테렌스 데 프레 지음, 차미례 옮김 / 서해문집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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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얼마 전에 주제 사마라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 http://blog.joins.com/yang412/13929327>를 읽으면서 인간이 극한상황에서 과연 인간이기를 포기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고 해도 서로 협력해서 극복하기보다는 손톱만큼의 힘을 가지로 타인을 위협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타인을 위협하는 존재가 있는가 하면 타인을 감싸는 존재가 나뉘는 현상이 과연 일어날 것인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나치가 저지른 홀로코스트와 스탈린이 저지른 참담한 숙청과정에서 인간으로서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을 정도로 비참한 처지에 몰렸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그 참상이 어땠는지를 적나라하게 적은 기록을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너무 끔찍해서 소개되지 않았거나 소개되었더라도 제가 읽기를 피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정신과의사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http://blog.joins.com/yang412/5396723>에서도 인간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살아남기 위하여 인간성이 어떻게 망가져 가는지를 소개하였습니다. 하지만 <생존자>에서는 정말 인간이 인간을 이렇게 대우할 수 있는 것인지, 차라리 그들을 편하게 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인간적인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보면 인간이 가장 무서운 존재인 것 같습니다.


생존자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남긴 기록들을 광범위하게 소개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와 같은 인용을 읽어가면서 정말 그랬을까? 혹시 기록한 사람이 기억을 하지 못하거나 왜곡된 기억을 하고 있는 것은 없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인간의 기억의 오류가 점차 확인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존자>는 홀로코스트에 관심이 많은 분들에게는 고전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방대한 자료를 취합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자는 먼저 문학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생존자, 즉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남은 사람들을 경우를 검토합니다. <페스트>, <수선공>,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연옥>, <암병동> 등입니다. 인간이 죽음에 몰리는 다양한 상황을 망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영웅으로 추앙받는 시대는 끝이 났다고 단언합니다. 생존의 의미가 중요해졌다는 것입니다. 생존자란 “인간으로서의 행동방식을 영위하려는 의지를 잃지 않은 채 공포와 절망을 견디어 낸 사람, 즉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까지도 살아남은 사람(30쪽)”이라고 정의합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살아남기 위하여 누군가 타인의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단서를 붙여야 하지 않을까요?


이어서 저자는 소설 속의 인물이 아닌 자신이 겪은 일을 누군가에게 전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살아남으려 노력한 사람들의 기록을 정리합니다. 극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기록으로남기는 이유는 비슷한 것 같습니다. “나와 경험을 함께 했던, 그러나 이제는 말 못하고 유명을 달리한 수많은 사람들을 대신하여 나는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79쪽)” 살아남은 사람들은 일종의 강박관념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의무감 때문에 죄의식을 느낄 수가 없었다고 토로하는 사람도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의 감정은 상당히 흔들리는 듯합니다. 뇌의식을 논한다는 것은 살아남았기 때문에 죄의식을 느낀다는 것인지, 아니면 살아남기 위하여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힌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런 경험은 대체로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적지 않았던 듯합니다. 실제로 <생존자>를 읽어가다 보면 행간에서 묘한 느낌이 오기도 합니다.


어떻든 생존자들이 일관되게 술회하는 점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매사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닥친 운명에 순응해서는 결국은 정신이 피폐해지기기 때문에 기회가 될 때마다 단장을 하고, 먹을 것을 챙겨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은 빅터 프랭클박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 살아남으려면 두 가지 선택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것, 두 번째는 스스로를 건사하는 것도 힘든 판에 남의 사정을 챙길 생각은 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정답인지는 겪어봐야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자가 더 큰 힘을 발휘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읽어가다가 책장을 덮고 싶은 생각이 몇 차례나 일었지만, 끝가지 읽어냈던 것은 이런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인간은 인간이엇 위대한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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