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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플레
애슬리 페커 지음, 박산호 옮김 / 박하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평탄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누구나 한 번쯤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끔찍한 일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옆에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일 수도 있습니다만, 당사자에게는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헤어날 구멍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어려움을 헤치고 나갈 수 있습니다.
<수플레>에서는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충격적인 사건을 당하고 헤쳐 나가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스탄불에서, 뉴욕에서 그리고 파리에서, 세 사람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고 연결고리가 없습니다. 다만 무너진 삶을 추스르는 계기를 부엌이라는 공간에서 찾아낸다는 것과 거의 동시에 수플레를 만드는 요리책을 사게 된다는 점이 유일한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사람이 부딪히는 충격적인 상황은 결코 남의 나라 일이 아니라 바로 내가 당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작가가 서로 떨어져 살고 있는 세 사람의 인생을 돌아가면서 설명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구촌 어디에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 등장하는 뉴욕의 릴리아는 필리핀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촉망받는 여성 화가였는데 두 살 아래 아니와 결혼해서 37년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사랑이라 생각했던 릴리아는 어느 날 갑자기 아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남편과 아이들이 자신을 그저 가정부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람으로 생각해왔다는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 됩니다. 두 번째 등장하는 파리의 마크는 역시 아이가 없지만 아내와 알콩달콩 살아가다가 어느 날 아내가 부엌에 쓰려져 숨져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일상의 소소한 일을 모두 아내가 맡아서 해주었기 때문에 마크는 당장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세 번째 등장하는 이스탄불의 페르다는 아이들이 장성해서 집을 떠나고 남편과 함께 살고 있는데, 어느 날 다리가 부러진 친정어머니를 집에서 모셔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됩니다. 특히 페르다를 못살게 하는데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어머니입니다. 수술을 받고 열심히 재활치료를 받아 걸을 생각은 아예 접고 침대에 드러 누워버린 것입니다. 나중에는 치매 증세까지 생겨서 페르다의 삶을 구렁텅이에 몰아넣게 됩니다.
세 사람이 맞은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끔찍한 상황은 모두 다르지만 세 사람이 찾아낸 해결방법은 모두 부엌에 있었습니다. 릴리아는 당장 필요한 생활비를 하숙을 쳐서 충당하려 합니다. 하숙생들을 들여 그들에게 식사를 만들어주기 위하여, 그리고 음식냄새를 싫어하는 남편 아니를 괴롭히기(?) 위하여 다양한 요리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마크 역시 아내의 죽음을 딛고 일어서기 위하여 음식만드는 법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부엌을 먼저 만들고 할 수 있는 요리법을 늘려나갑니다. 마크의 아내를 잘 아는 친구들은 그런 마크를 소리없이 응원하구요. 페르다 역시 쓰러진 어머니를 비롯해서 남편과 함께 생활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요리하기는 페르다가 잘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보니 마크만 부엌일이 처음인 셈입니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수플레(Soufflé)는 거품을 낸 계란 흰자에 치즈나 감자 등을 섞어 틀에 넣고 오븐에 넣어 구워 낸 과자입니다. 그런데 거품을 내는 과정이나 오븐에서 굽는 시간에 따라서 볼록하게 솟아난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아주 어렵다고 합니다. 잘나가던 삶이 폭삭 망하는 꼴에 비유하고 싶어서였을까요? 작가는 수플레를 제대로 만들어내는 것으로 무너진 하늘에서 솟아날 구멍을 찾아내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삶이 모두 제각각이듯이 다양한 결말을 보여줍니다. 그 결말이 반드시 해피엔딩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는 오랜 악연의 끈을 잘라내고 화해하는 모습을 누구는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모습을 그리는 반면에 누구는 그저 주저앉는 모습으로 마무리를 해서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또한 하나의 마무리가 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리고 보니 슬픈 결말을 맞은 주인공은 잘못된 과거에 복수하듯 살다가 폭삭 가라앉는 수플레처럼 자신도 무너지고 말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주위 사람들과 관계를 풀어내기 위하여 노력한 주인공들은 제대로 된 수플레에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역시 부엌은 우주의 중심이고 주저앉아버린 영혼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인생의 레시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