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의 모든 하루 - 김창완의 작고 사소한 것들에 대한 안부
김창완 지음 / 박하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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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드라마에서 주로 만나고 있습니다만, 데뷔 무렵 김창완님이 활동하던 산울림의 노래들은 놀랍다는 느낌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노랫말도 그렇고, 멜로디 역시 그 무렵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년 전에는 <사일런트 머신, 길자>라는 제목의 소설까지 발표하여 작가의 영역까지 활동을 넓혀 다재함을 떨치고 있습니다.

<안녕, 나의 모든 하루>는 그런 그의 속마음을 담은 에세이집입니다. 김창완 작가는 매일 아침, 하루를 시작할 때 자신의 속마음과 주변의 것들을 들여다보면서 느낀 소중한 삶의 가치들에 대하여 적어왔는데, 그리하기가 16년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특히 그렇게 적은 에세이를 주위 사람들에게도 보낸다고 하는데,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모은 글 가운데 엄선한(?) 것들을 <안녕, 나의 모든 하루>에 담았습니다.

오랜 세월 쌓여온 글들 가운데서 고른 만큼, 일단 계절적 요소는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가을을 이야기하고서는 바로 꽃샘추위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그 사이의 글들을 건너뛰었거나, 아니면 성격이 비슷한 글들끼리 묶다보니 계절적 요소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모두 181개의 글이 ‘쓰러지는 방향으로 가야 쓰러지지 않는 자전거처럼’, ‘꽃들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폭로하기 전에’, ‘나의 빛깔에서 너의 냄새가 난다’, ‘내가 구름이거나 바람이었을 때’, ‘가끔은 큰 소리로 울었으면 좋겠다’ 등 다섯 개의 제목 아래 나누어져 있습니다. 제목부터 깊이가 느껴지는 것처럼 글내용 역시 깊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노랫말처럼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촌철살인의 무엇이 느껴집니다.

예를 들면 아침에 집을 나서는데 앞을 가로질러가는 고양이의 우아한 자태로부터 사람들의 우아한 걸음걸이를 이끌어내고, 오늘 하루가 멋진 날이 될 거라고 믿는 경우입니다. 묘하게도 고양이에 대한 사람들의 느낌은 그리 우호적이지 못해서 아침에 집을 나서는데 고양기가 앞을 가로질러 갔다면 재수없는 하루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 같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작가님은 오늘 하루가 멋질 것이라고 초긍정적인 생각을 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니 첫 번째 글 역시 고양이를 화제로 하고 있어, 김작가님의 고양이 특히 길고양이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양이 이야기처럼 김작가님의 글은 간단하면서도 마치 대화하듯 읽히기 때문에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딱 한편만 빼고서 말입니다. 글쎄 민들레 홀씨를 붙들어다가 무거운 삶의 짐을 내려놓자고 시작한 글에서 갑자기 “생야일편부운기 사야일편부운멸(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사는 건 구름 한 조각 생기는 것이고, 죽는 것은 구름 한 조각 사라지는 것이라는 말이 있지요(56쪽)”이라고 드리대듯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나 이런 사람이야!’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할까요?

산문집이라고 해서 산문만 담은 것은 아니고, 여러 편의 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저의 관심사이기도 해서 ‘기억 모자이크’라는 시를 옮겨두겠습니다. “이제 그 사람의 얼굴은 / 또렷이 기억나지 않는 게 맞아. / 부분부분 떠오르는 모습이 없는 건 아니지만 / 그것 모자이크 같은 거야. / 피카소 그림처럼 눈이 뒤통수에 붙어 있고 / 코가 귀 밑에 매달려 있는 거나 마찬가지지. // 시간은 기억을 자르는 칼이지. /어떤 기억, 어떤 모습이라도 잘려져 있다면 / 그건 시간이 지나간 흔적이야 // 내 기억이 맞는다면 / 이 봄날의 풍경도 가위질 당한 사진 같아야 돼 / 벌써 기간이 많이 흘렀으니까.(203쪽)”

책은 어디를 펼쳐 읽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의 행운을 가늠하기 위하여 눈을 감고 책장을 펼쳐 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에필로그에 해당될 것 같은 ‘노란 리본이 있습니다’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제가 운이 나빴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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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곳이 없는 남자 시간이 없는 여자
미나시타 기류 지음, 이서연 옮김 / 한빛비즈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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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즈음에는 제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아무래도 나이가 들어가는 탓인가 봅니다. 무엇인가 새로운 일을 찾아 관심이 밖으로 향하던 젊을 때와는 분명 달라진 점입니다. 아직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낮 시간에는 집밖에 있지만, 저녁이나 주말에는 집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새 몸에 익은 책읽기와 글쓰기 습관도 한 몫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가끔은 아내가 출타하고 제가 집을 지키는 경우가 생깁니다. 이럴 때 아내는 꽤나 미안해합니다. 젊었을 적에도 아내가 저녁시간에 출타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때는 저도 밖에서 일을 보고 있어서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어떻든 미안해하는 아내에게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하곤 합니다. 은퇴를 하게 되면 이런 상황이 더 많아질 것입니다. 하지만 속칭 ‘젖은 낙엽족’으로 몰릴 생각은 없는데다가 나름대로 시간을 즐길 요량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내 역시 자신만의 시간을 즐길 권리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스스로 살아가는 방식이 있다면 굳이 다른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에 관심을 둘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만, 사회학자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입니다. 오늘 [북소리]에서 소개하는 미나시타 기류의 <갈 곳이 없는 남자, 시간이 없는 여자>는 앞서 말씀드린 상황을 사회학의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물론 일본사회의 경우이기는 합니다만, 일본사회의 변화가 우리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관심을 가져볼만 합니다. 저자 미나시타 기류씨는 와세다 대학원에서 사회과학을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수료한 사회학자이자 시인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직장을 은퇴한 남편과 그의 아내라는 특정한 연령대의 일본인들에서 나타나는 사회현상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저 나름대로는 여성인 저자가 남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굳이 말씀드리는 것은 남편과 아내, 혹은 남성과 여성을 차별화하려다 보니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이는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남성이나 여성이나 각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거리는 분명 있을 것 같습니다.


직장에 다니는 남편과 가정을 지키는 아내를 논의 대상으로 하고, 은퇴 이후의 시점에 아내와 남편 사이에 생각의 괴리가 일어나는 원인이 ‘샐러리맨 가정에 일어나는 시공간의 뒤틀림’에 있다고 저자는 보았습니다. 시간의 뒤틀림은 남녀 간의 하루 이동거리의 차이에서, 공간의 뒤틀림은 남편은 직장을 그리고 아내는 동네를 주활동 무대로 하고 있기에 발생한다고 보았습니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갈 곳이 없는 남자’라는 제목의 1부는 남성의 상황을, ‘시간이 없는 여자’라는 제목의 2부는 여성의 상황을 설명하고 ‘남녀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위해’라를 제목의 3부에서는 문제의 해결방안을 제시합니다. 제1장은 1부에 속해있습니다만,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한 총설에 가까운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총론으로 떼어냈더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어떻든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작금의 상황은 남녀의 시공간 분리가 초래한 비극이라고 저자는 정의합니다. 우리도 흔히 쓰는 ‘남편은 돈 잘 벌고 입에 안 들어올수록 좋다’라는 우스개도 일본에서 건너온 것 같습니다. 일본의 아내들은 젊어서 그런 남편을 좋아하다가 은퇴한 다음에는 ‘젖은 낙엽’이라고 부르거나 심지어는 ‘대형 쓰레기’ 혹은 ‘산업 폐기물’이라고 비아냥거리면서 빨리 사라져주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일본사회 특유의 지나친 호들갑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신조어는 평범한 대중과 가정주부들이 만들어낸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회학자들이 이런 풍조에 장단을 맞추면서 사회현상으로 확산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이런 부류의 여성들도 있는 반면 여전히 남편 혹은 아내가 아플 때 극진히 돌보다가 세상을 떠나면 오래지 않아 뒤따라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회학자들은 이와 같은 전통적인 모습에는 관심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일본에서는 악몽을 꾸고 식은땀을 흘리는 남편에서 탈취제를 뿌리거나, 심지어는 남편을 보고 냄새가 난다고 핀잔을 주는 아내를 담은 광고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광고에 대하여 비판이 제기된 적은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여자는 요리하고 남자는 먹기만 하는 장면을 담은 광고는 여성단체의 강력한 항의로 결국 중단되었다고 합니다. 참 이율배반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이 존중받고 싶으면 상대를 먼저 존중해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요?


일본 사회에서는 고독사가 커다란 문제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고독사란 병사 혹은 변사의 한 종류로 사망 시 홀로 거주하고 있던 임차인이 누구에게도 간호를 받지 않고 임대주택 내에서 사망한 사고를 말하고 자살 혹은 타살을 제외한다.”라고 일본의 도시재생기구에서 정의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굳이 임대주택으로 제한을 둔 점이나 자살을 제외한 것은 적절해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도쿄도 23구에서 2013년에 발생한 의문사 가운데 독신가구였던 사례를 비교해보면 남녀의 비율이 2:1이 넘었고, 특히 60대 이상의 남자가 전체의 40%를 넘었다고 합니다. 이는 남성들의 사회적 고리가 약한 것에 기인하는 것으로 저자는 해석합니다. 일본 남성들은 오랫동안 직장제일주의에 지배받아왔기 때문에 일터에서 물러나면 단숨에 사회적 유대를 잃고 고립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관계의 부재는 남성을 결국 갈 곳이 없는 존재로 전락시킵니다. 문제는 사회에서도 갈 곳 없는 남자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저자는 일본 사회가 남성의 ‘노동’에는 적극적이면서 남성의 ‘행복’에는 소극적이라고 비판합니다. 이미 심각해진 초고령사회에서 고립된 고령자가 증가하는 것은 지역사회 전체를 불행하게 만들 위험이 크므로 적극적 대책마련이 시급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다양한 지역사회의 단체가 만들어져 은퇴 전부터 그 단체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장려해야 할 것이라는 제안을 내놓았습니다.


근래 들어 우리 사회도 일본을 닮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한국남성들은 직장 이외에도 다양한 모임문화가 발달해 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 있겠습니다. 각급 학교의 동창모임은 물론 향우회나 직장에서의 모임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모임을 만드는 전통이 꽤나 오래되었습니다. 이런 모임은 은퇴 뒤의 소일거리를 위한 자구책이 될 수 있을 것인데, 때로는 너무 심하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남성은 갈 곳이 없다고 본 저자의 견해에는 공감을 합니다만, 여성은 시간이 없다는 견해에는 공감하기 어려운 무엇이 있습니다. 여성인 저자의 팔이 안으로 굽는 탓인지, 아니면 남성인 저의 팔이 밖으로 굽지 못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우선 저자는 여성, 아니 아내의 시간은 가족의 공유자산이라고 정의합니다. 반면 가사를 돕느라 쓴 남편의 시간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가족의 공유자산에서 제외하는 듯합니다. 그리고 시간을 쪼개 가면서 살아온 자신의 삶을 소개하는데, 저자 스스로가 내세운 전제를 흔드는 일입니다. 직장을 가지지 않은 주부로서의 아내를 직장에 묶여 있다가 은퇴 후에 풀려난 남편과 대비한다는 전제 말입니다.


육아를 포함하는 가사에 대한 아내의 부담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돈벌이를 책임지는 남편의 부담보다도 더하다고 하겠습니다. 출산을 담당할 수 없는 한계에 더하여 가족 부양의 책임을 지고 있는 남편이 육아를 전적으로 책임질 수 없는 정황과 맞물려 육아 역시 아내의 몫으로 길가름이 되어 왔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의 사회참여가 늘어나면서 여성의 사회활동의 제약요소가 될 수밖에 없는 출산과 육아의 부담을 감당하기가 버거워 출산을 기피하는 경향도 생기고 있는 것입니다.


여성이 시간이 없는 이유를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산업의 발전에 따라 남성이 해오던 역할이 상당부분 사라졌다고 보았습니다. 구두를 만들 가죽을 손질할 필요가 없어졌고, 수도가 공급되면서 물을 길어올 필요도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가사노동의 부담은 오히려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기계가 옷감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천을 짤 일은 없어졌지만 바느질은 여전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천을 사다가 옷을 짓는 여성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맞춤옷도 아니고 기성복이 대중화되고 있는 세상에서 말입니다. 옛날에는 옷을 자주 빨아 입지 않았기 때문에 빨래의 양도 많지 않았지만, 면직물의 보급으로 빨랫감이 급증했다고 합니다만, 대용량으로 커가는 세탁기 이야기는 왜 쏙 빼놓는지 모르겠습니다. 심지어는 이미 조리된 것 사다가 끓이기만 하는 음식의 종류가 늘고 있는 것이나 시간이 많이 드는 장은 물론 김치까지도 사다 먹는 세상에 음식준비에 소요되는 시간 역시 많이 줄어들었다는 이야기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어떻든 한가한 주부는 환상 속에서나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는 남편이 저녁에 장을 봐주거나 밥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가사 분담은 아니라고 강변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워킹맘은 너무 고되다’라고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결국 “남편을 돌보고 부부 두 사람 분량의 가사를 맡아야 하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가사시간의 총량을 단축하는 확실한 방법은 아이를 두지 않는 것(157쪽)”이라고 단정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남성과 여성의 시공간의 왜곡을 이야기할 때 내세웠던 ‘남편은 직장으로, 여성은 집에서 활동한다.’라는 전제를 접어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뿐만 아니라 남편을 돌보는 시점도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돈을 벌어들여야 하는 역할이 끝난 다음의 이야기이고 출산과 육아는 남편이 밖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본다면 시간과 공간의 왜곡은 저자가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자는 여자의 행복을 완벽하게 획득하기 위해서 결혼, 일, 아이의 황금 삼각형을 손에 넣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평생을 가장 완벽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루지 못할 꿈을 뒤 쫓느라 숨차게 뛰다가 제 명을 다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려는 것은 아닐까요? 사회가 다양화되면서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없기에 ‘선택과 집중’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젊어서는 다양한 삶을 모색하고,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하면 최선을 다하여 살아내는 삶이야말로 축복받은 삶이라 할 것입니다.


미국으로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따시고 미국의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던 여자 선배님이 계셨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귀국하시더니 대학을 그만 두시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자녀들이 필요할 때 곁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린 결심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결심을 후회하지 않으신다고 하니 이런 선배님의 결정이 잘 못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결국 저자가 주장하는 ‘어느 순간에도 일을 포기하지 않는 사회’를 추구할 것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일을 포기할 수도 있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저자가 이 책을 통하여 설명하려고 하는 일본 남성의 관계 빈곤과 일본 여성의 시간빈곤은 상당부분은 공감할 수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공감하기 어려운 점도 없지 않는 것은 논리를 전개함에 있어 설정된 기본틀에서 일부 벗어난 점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남편과 아내, 아내와 남편의 관계를 재설정하고, 서로의 영역을 인정할 필요가 있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은퇴 후의 삶을 다시 설계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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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밤을 함께 주신 신의 아이러니
호세 카를로스 카네이로 지음, 김현균 옮김 / 다락방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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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북소리]에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픽션들; http://blog.joins.com/yang412/12878043>을 소개해드린 것을 기억하십니까? 「기억의 천재 푸네스」라는 단편 때문에 읽게 되었던 것인데, 이 책에 실린 열여덟 개의 단편을 읽으면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시간적 공간적 배경의 다양함에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더하여 이야기 전개의 기술적 요소로 사용하고 있는 ‘미로’라는 개념을 공간적인 이미지에서 시간적 이미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는 점도 매력적이었습니다. <픽션들> 읽기는 <알레프; http://blog.joins.com/yang412/12879477> 읽기로 이어졌는데, 그 무렵 참석했던 민음 아카데미의 ‘보르헤스 강좌’에서 다룬 두 번째 교재였기 때문입니다. 보르헤스의 환상문학에 흠뻑 빠졌던 것 같은데 그에 대한 공부를 더 깊이 하지 않았던가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픽션들>이나 <알레프>에 시린 단편들을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미진한 구석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호세 카를로스 카네이로의 <책과 밤을 함께 주신 신의 아이러니>는 그때 읽었어야 할 책입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이 책을 소개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이 책을 읽으시려면 <픽션들>과 <알렉스>를 먼저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이 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신 다음에는 <픽션들>과 <알렉스>를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스페인의 갈리시아 출신의 소설가이자 시인인 호세 카를로스 카네이로는 많은 문학상을 수상하였다는데도 <책과 밤을 함께 주신 신의 아이러니>만 국내에 소개되었을 뿐이며 작가 소개도 소략하다 싶습니다.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긴 김현균교수님은 <책과 밤을 함께 주신 신의 아이러니>야 말로 ‘평생 문학에 헌신한 보르헤스의 삶에 바치는 오마주’라고 정의합니다. ‘보르헤스는 문학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탈개성화하고 복수화하고 종국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춘다. 그러나 이 책은 복잡한 추상과 심오한 형이상학 속에 투영된 보르헤스의 맨 얼굴을 들추어 보여준다(253쪽)’라고 설명합니다.


나무 위키에 따르면 보르헤스의 도서관과 떼어낼 수 없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의 독서편력은 기호학, 해체주의, 환상적 사실주의, 후기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20세기 문학사는 물론 지성사의 핵심을 섭렵하기에 이르렀는데, 이와 같은 풍부한 책읽기가 그의 작품세계를 풍요롭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약관 무렵 시작한 글쓰기는 시, 평론, 수필, 단편소설 등 광범위하였는데 다만 장편소설은 없다고 합니다. 나무위키는 그를 가리켜 ‘20세기 세계 문학의 지배자. 포스트모더니즘의 창시자격인 인물이며, 특히 라틴아메리카 문학은 보르헤스 전과 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평가합니다.


저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 제네바에 묻힐 때까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삶을 18개의 단락으로 구분하여 정리하였습니다. 저자는 특히 보르헤스의 작품으로 그의 삶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즉 ‘문학이 된 삶이자 삶이 된 문학’을 논하고 있는 셈입니다. 작가 스스로도 이 책을 한 편의 이야기라고 정의하고 있기 때문에, 보르헤스를 마치 가공의 인물인 것처럼 느끼며 읽어도 좋을 수 있겠다고 옮긴이는 말합니다. 한편 저자는 보르헤스의 전기를 구성하면서 기억할만한 구절을 <모래의 책>에 있는 「울리카」에서 가져왔습니다. “나의 이야기는 사실에 충실할 것이다. 적어도 사실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기억에 충실할 것이다. 사실이나 사실에 대한 나의 기억이나 매 한 가지다(12쪽)” <책과 밤을 함께 주신 신의 아이러니>를 이루는 18개의 주제 가운데 첫 번째와 마지막 이야기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로 가름할 수 있기 때문에 보르헤스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16개의 장으로 구분되어 있는 셈입니다.


18개의 이야기가 모두 재미있게 읽히지만, 특히 공감이 가는 부분을 중심으로 발췌해봅니다. 먼저 시간과 영원성에 관한 일련의 에세이를 담은 <영원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저자는 “보르헤스를 읽는 것은 삶 그리고 문학과의 화해의 몸짓이다. 보르헤스는 종종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던진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우리는 그의 말을 이해하고 발가벗기고 상상하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60쪽)”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보르헤스를 큰 소리로 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픽션들>에서 읽을 수 있는 「바벨의 도서관」이야말로 문학에 관한 최상의 메타포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보르헤스는 미겔 카네 도서관에서 보조사서로 일하던 1941년에 이 단편을 썼다고 합니다. 바벨탑은 노아의 후예들이 하늘에 오르기 위하여 쌓다가 신의 노여움을 사 무너진 탑입니다. 애시 당초 불가능한 일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책의 불멸을 의미하는 도서관을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과학은 그런 도서관이 가능하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장미의 이름; http://blog.joins.com/yang412/12895088>에서 보르헤스와 그의 도서관을 등장시키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랄프 이자우는 <비밀의 도서관; http://blog.joins.com/yang412/13473271>에서 「바벨의 도서관」의 개념을 한층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처럼 불에 타서 세상에서 사라진 책은 물론 저자가 기획하는 단계에 있는 책의 내용을 담고 있는 책들까지도 소장되어 있는 환상의 도서관을 구상해낸 것입니다. 랄프 이자우의 <비밀의 도서관> 수준까지는 몰라도 보르헤스가 그렸던 「바벨의 도서관」은 전자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조만간 구현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올 초에 아르헨티나를 방문했을 때 페론과 에비타에 대하여 여전히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적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산업화와 적극적인 부의 재분배정책을 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르헤스는 페론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는데, 포퓰리즘적 정책의 이면에 숨긴 페론의 독재정치에 반발하였기 때문입니다. 1954년 페론은 초심을 버리고 대중적 반발을 불러온 파시즘적 협동조합주의를 내세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혼법 개정으로 사제단과 갈등이 불거지면서 입지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부정부패, 반복되는 쿠데타기도, 심각해진 경제 상황,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테러행위 등으로 페론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페론의 퇴장과 함께 보르헤스는 국립도서관장으로 임명되어 그의 천직이라고 할 도서관으로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도서관으로 돌아와 80만권이나 되는 책들을 탐사할 수 있었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시력이 나빠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무렵의 심정을 담은 시가 시집 <창조자>에 실리게 되는 「축복의 시」입니다. 옮긴이는 “어느 누구도 탄식이나 비난쯤으로 폄하하지 않기를, / 기막힌 아이러니로 내게 /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 신의 오묘함에 대한 나의 소회를.(109쪽)”이라는 첫 번째 연에서 이 책의 제목을 따왔다고 했습니다. 실명도 문학에 대한 그의 열정을 잠재우지는 못했습니다.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주고 그를 대신해 글을 써줄 사람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의 어머니 레오노르 아세베도 데 보르헤스가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녀는 보르헤스의 삶에서 가장 능률적이고 가장 성실한 후원자였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그 어떤 사랑보다도 위대한 것입니다. 그녀로 인하여 보르헤스의 새로운 신화가 탄생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하여 책을 읽는 사이 그의 마음속에서는 생겨난 빛이 아름다운 시어들을 만들어내게 된 것입니다. 책과 밤을 함께 주신 신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픽션들>에 수록된 단편들과는 달리 <알레프>에 실린 단편들은 별도의 장으로 구분하여 설명을 하고 있어서 이해가 미진했던 부분들을 집중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보르헤스는 항상 가장 좋은 작품으로 단편집을 시작하고 끝내기를 좋아했다는 점도 기억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알레프>의 경우는 「죽지 않는 사람」으로 시작해서 표제작 「알레프」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죽지 않는 사람」의 주인공, 즉 나는 로마제국의 디오클레티아누스 시절에 군단 사령관을 지냈는데, 갠지스강 너머에서 온 기병으로부터 서쪽 끝에 가면 인간을 죽음에서 깨끗하게 하는 비밀의 강이 있다는 사실을 전해듣습니다. 나는 그 강변에 있다는 원형극장과 사원이 즐비한 ‘죽지 않는 사람들의 도시’를 찾아 나섰습니다. 결국 그 강을 찾아 물을 마신 나는 불멸의 존재가 되어 20세기 초반까지 세상을 떠돌며 살다가 20세기 초 에리트레아 해안의 어느 도시 외곽에서 샘물을 마시고는 다시 죽는 존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죽지 않는 존재와 죽는 존재로 거듭 살아본 주인공은 두 가지 형태의 삶에 대하여 이런 생각을 합니다. 죽을 운명의 모든 존재들에게는 모든 것이 회복할 수 없고 불안한 가치를 지니는데 반하여, ‘죽지 않는 사람들’에게 각각의 행동은 무한히 반복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화 <사랑의 블랙홀>에서처럼 말입니다. 반복되는 일상이라면 지겨워서 차라리 죽음을 선택할 수 있기를 희망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이런 의미를 담아가면서도 저자는 호메로스를 등장시키고 자신을 호메로스와 동일시하는 느낌을 주면서도 자신은 보르헤스일 뿐으로 율리시스처럼 죽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점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보르헤스는 젊은 시절 썼던 시로 인하여 공산주의자로 몰리기도 했지만, 체 게바라나 카스트로 등과 불화를 빚을 정도의 반공주의적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입장은 당시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의 좌파에 철저하게 경도된 많은 젊은 작가 혹은 기성작가들과 달리 정치적 대세에 맞서는 것으로 인신공격과 심지어는 죽이겠다는 협박까지도 받았다고 합니다. 젊은 시절에 썼던 에세이 때문에 매카시 열풍이 일었을 때 미국비자를 받지 못한 적도 있지만, 훗날에는 비교적 친미적 성향을 보였다고 합니다.


많은 나라에서 훈장과 문학상을 수도 없이 받았고, 많은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보르헤스였지만, 노벨문학상만큼은 끝내 그를 외면했습니다. 스웨덴 학술원은 노벨상을 수여하고 50년이 경과되면 선정 과정에서 논의된 기록을 공개한다고 합니다. 이제 그의 수상이 점쳐지던 1970년대 후반부터 그가 죽은 1986년까지의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 사연을 알게 될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혹자는 보르헤스가 단 한 편의 소설도 쓰지 않았던 것이 약점이라고도 하지만, 시인이 수상한 경우도 많다는 점을 보면 딱히 약점이랄 것도 없을 듯합니다. 1976년 칠레정부가 수여하는 훈장을 받기 위하여 산티아고를 방문하였을 때 독재자 피노체트와 포옹한 것으로 노벨상 수상이 물 건너갔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리고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열린 어느 작가들의 모임에 참석했을 때, 어느 시인이 낭송하는 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는 특유의 빈정거림으로 자신의 느낌을 공표한 적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훗날 그 시인이 스웨덴 학술원의 사무총장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리고 보면 문학을 하시는 분들 가운데는 호불호를 솔직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있는 모양입니다. 저자는 헤밍웨이와 보르헤스 사이에 있었던 사연도 소개합니다. 굳이 그럴 까닭까지는 없었을 터인데, 보르헤스를 혐오했다는 헤밍웨이는 1950년에 다음과 같은 엽서를 보르헤스에게 보냈다고 합니다. “친애하는 호르헤스여, 다이키리의 대성당인 이곳 엘 플로리다에서 쿠바 친구 리노 칼보가 나에게 <알레프>를 건네주었네. 분명 지랄같이 좋은 책일세. 여기서는 자네가 스페인어권 최고의 작가라고들 한다네. 그러나 엿 먹으시라. 그대는 평생 운동장 밖으로 공을 차내지 못할 걸세, (…) 엘토레 블랑코 만세. 마음으로부터 아빠가(150-151쪽)” 보르헤스도 그냥 있지만은 않았다고 합니다. 헤밍웨이가 자살했을 때 묘비명 형식으로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다소 허세를 부리던 헤밍웨이는 자신이 위대한 작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 마침내 자살했다. 어느 정도 자업자득인 셈이다.” 장군에 멍군을 부른 셈입니다.


정리를 해보면, 저자는 ‘보르헤스의 문학은 포괄적 개념과 영원을 위해 글을 쓰겠다는 바람에서 배태되었기 때문에 그 높이는 엄밀성을 초월한다.’라고 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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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해줘
기욤 뮈소 지음, 윤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큰 아이 덕에 다시 만나는 기욤 뮈소의 작품입니다. 생각해보면 처음 만났던 뮈소의 작품 <센트럴 파크; http://blog.joins.com/yang412/13681844>도 큰 아이 덕에 읽었습니다. 저도 그 나이쯤에는 이런 종류의 책을 많이 읽었던 것 같습니다. 뭔가를 꾸준하게 읽는다는 것은 좋은 일 같습니다.


<구해줘>는 <센트럴 파크>와 마찬가지로 무대가 뉴욕입니다. <센트럴 파크>에서는 조발성 알츠하이머병이 이야기의 핵심이었다고 하면 <구해줘>는 죽음이 화두가 되는 것 같습니다. 죽음을 예시하고 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운명처럼 죽음을 피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죽을 운명이었던 사람이 그 운명을 피할 수도 있는 것일까요? 그 또한 운명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작가는 그 판단을 독자에게 맡겨둔 것 같습니다. 사실 죽은 사람이 죽음의 사자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현실감이 떨어지는 점은 있지만, 그래도 죽음에 대하여 생각거리를 주는 것 같습니다.


뉴욕이라는 도시는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도시이지만, 그 꿈을 무참하게 부수는 냉혹한 도시이기도 한 모양입니다. 브로드웨이 무대를 통해서 잘나가는 여배우가 되어 보겠다는 꿈을 안고 파리에서 온 줄리에트 보몽에게 뉴욕은 결코 곁을 내주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더 이상 노력할 힘이 소진된 줄리에트가 뉴욕생활을 접기로 한 마지막 날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갑자기 자살한 뒤로 생긴 허탈감을 일에 빠지는 것으로 메우고 있던 젊은 의사 샘 갤러웨이와 줄리에트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원나이트 스탠드가 아닌 운명이었던 모양입니다. 서로 상대에게 숨긴 진실이 꼬투리가 되어 운명을 바꾸게 만들었으니 말입니다.


파리행 비행기를 탔던 줄리에트는 샘에게 진실을 고백하기 위하여 비행기를 내리고, 그 비행기는 파리로 가던 중에 폭발하는 사고로 탑승객이 모두 사망하게 됩니다. 줄리에트는 폭발사고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체포되고, 샘은 여형사 그레이스로부터 그 사실을 전해 듣고 공항으로 쫓아갑니다. 그런데 그레이스는 10년 전에 총격을 받고 사망한 존재, 즉 죽음의 사자라는 것입니다. 비행기사고로 죽었어야 할 줄리에트를 다시 죽음의 세계로 데리러 온 것입니다. 그레이스가 죽음의 사자로 온 것이 이야기를 복잡하게 얽히게 하는 요소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녀의 죽음에 샘이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샘과 줄리에트처럼 사랑에 적극적인 관계와 대조되는 사이가 그레이스와 루텔리형사입니다. 파트너로 일하면서 서로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그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 것이 한으로 남는 관계 말입니다. 두 쌍의 사랑을 읽다보면 사랑 앞에 망설임이란 긴 후회를 낳게 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샘과 죽은 아내 페데리가 그리고 신부가 된 셰이크의 성장과정도 주목할 만합니다. 이 들이 수많은 젊은이들이 절망 속에서 스러져간다는 브루클린의 빈민가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었는지, 그러니까 진흙탕에서도 연꽃이 피어나듯 브루클린에서도 꿈을 지키고 키워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레이스가 줄리에트를 데려가기로 했던 이스트리버에서 맨하탄 상공을 지나 루즈벨트섬까지 운행하는 케이블카 사고는 일어났고, 그 안에는 두 사람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레이스는 과연 줄리에트를 데리고 케이블카에 탔을까요? 아니면 운명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하여 힘겹게 싸워온 샘이 사랑하는 줄리에트를 죽음에서 구하기 위하여 그 케이블카에 탈 수 있었을까요?


작가가 독자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는 그레이스의 말에 담겨 있는 것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난 당신에게 인간의 구체적인 행동 하나하나까지 미리 정해져 있다고 말한 적도 없고, 삶이 단지 미리 쓰여 있는 시나리오를 완성하는 과정이라고 말한 적도 없어요(381쪽)” 결국 운명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되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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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바람난 여자
아니 프랑수아 지음, 이상해 옮김 / 솔출판사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제목을 참 묘하게 정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원제목 <부끼네(bouquiner)>는 동사인데, 동사를 제목으로 정한 것도 일상적이지 않은데 ‘교미하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산토끼(lievre)와 책(livre)의 발음이 비슷한데서 착안한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단, 심부름 목록, 편지, 잡지 등 온갖 것들을 다 읽을 수 있지만, ‘부끼네’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책(bouquin) 뿐”이라고 저자는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책으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부작용들에 대한 소소한 고찰’이라는 카피가 정말 실감이 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책과 바람이 난 저자는 30여년을 오로지 편집 일만 해온 베테랑 편집자라고 합니다. 정말 책에 대한 애정이 없었으면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편집을 맡고 있으니 당연히 출판 예정인 원고는 수도 없이 읽었을 터이나 원고 말고도 그녀가 읽어온 책도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그녀가 읽는 책이 얼마나 될까 궁금했는데 역시 고수답게 똑 떨어진 답을 내놓지는 않았습니다. 오직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딱 한 곳에 나옵니다. 그것도 괄호에 넣어서 말입니다. “(그래 지긋지긋해. 너의 그 과장과 허풍이. 야단법석을 떨지 않고도 일주일에 스무 권씩 읽는-게다가 하나하나 또렷이 기억하는-아주 정상적인 사람들도 있어. 조금 많이 읽는 것 가지고 웬 유세?(239쪽)” 일주일에 스무 권씩 읽는 정상적인 사람들이라고 해도 일년이면 1,400권입니다. 여기서 그녀가 조금 많이 읽는다고 하는 것은 아마도 겸손한 표현이라고 본다면 도대체 일년에 얼마나 읽는다는 것인지 감이 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일년에 겨우 300권을 읽어내고서 힘에 부친다고 헉헉댄 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 책에는 책과 관련된 모든 일을 이야깃거리로 끌어오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화제들이 격하게 공감되는 것들인데, 앞서 독서양에서 이미 질려버린 것처럼 두 손을 든 책읽기는 ‘벌목하듯 책을 읽는다’라는 표현입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책읽기는 전집류 읽어치우기, 혹은 한 작가의 책을 폭식하듯 읽어내기 등이 포함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예전에 읽어냈던 전집들도 있고, 우연한 인연으로 오르한 파묵, 밀란 쿤데라의 전작 읽기를 마친 적도 있기는 합니다만, 아주 드문 경우였는데, 저자의 경우는 폭식하듯 책읽기가 일상처럼 되어 있는 모양입니다.


저자와 책읽는 버릇과 비슷한 점은 웬만하면 책장을 접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 경우는 젊었을 적에는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을 여백에 적었던 적이 있지만, 요즘은 리뷰를 쓰기 때문에 절대로 그런 일이 없습니다. 책장 끝에 무언가를 적기도 하는 저자와 다른 점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주변사람들에게 책을 많이 선물하고 받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 주변에서는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아서 자제하는 편입니다. 읽고 난 책 가운데 누군가와 공유하면 좋을 책들은 사무실에 작은 도서관을 만들어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도록 하고 있기는 합니다.


빌어간 책을 돌려주지 않는 분을 몇 분 겪고나서는 웬만하면 책을 빌려주지 않는 편입니다. 책이란 것이 조금 지나면 절판이 되어 구할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정작 필요할 때 볼 수 없다면 아쉽기 때문입니다. 글을 많이 쓰고 있는 요즈음 더욱 절감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저자가 책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써내려가면서 많은 저자와 그들의 작품을 인용하고 있는데, 대체적으로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계 작가, 작품들이 많은데, 제가 읽은 책은 별로 없을 뿐 아니라 처음 들어본 작가도 많아 저의 책읽기의 한계가 드러나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이야기에는 후기가 따로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후기도 책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화나 드라마처럼 속편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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