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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밤을 함께 주신 신의 아이러니
호세 카를로스 카네이로 지음, 김현균 옮김 / 다락방 / 2005년 3월
평점 :
4년 전 [북소리]에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픽션들; http://blog.joins.com/yang412/12878043>을 소개해드린 것을 기억하십니까? 「기억의 천재 푸네스」라는 단편 때문에 읽게 되었던 것인데, 이 책에 실린 열여덟 개의 단편을 읽으면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시간적 공간적 배경의 다양함에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더하여 이야기 전개의 기술적 요소로 사용하고 있는 ‘미로’라는 개념을 공간적인 이미지에서 시간적 이미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는 점도 매력적이었습니다. <픽션들> 읽기는 <알레프; http://blog.joins.com/yang412/12879477> 읽기로 이어졌는데, 그 무렵 참석했던 민음 아카데미의 ‘보르헤스 강좌’에서 다룬 두 번째 교재였기 때문입니다. 보르헤스의 환상문학에 흠뻑 빠졌던 것 같은데 그에 대한 공부를 더 깊이 하지 않았던가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픽션들>이나 <알레프>에 시린 단편들을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미진한 구석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호세 카를로스 카네이로의 <책과 밤을 함께 주신 신의 아이러니>는 그때 읽었어야 할 책입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이 책을 소개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이 책을 읽으시려면 <픽션들>과 <알렉스>를 먼저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이 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신 다음에는 <픽션들>과 <알렉스>를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스페인의 갈리시아 출신의 소설가이자 시인인 호세 카를로스 카네이로는 많은 문학상을 수상하였다는데도 <책과 밤을 함께 주신 신의 아이러니>만 국내에 소개되었을 뿐이며 작가 소개도 소략하다 싶습니다.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긴 김현균교수님은 <책과 밤을 함께 주신 신의 아이러니>야 말로 ‘평생 문학에 헌신한 보르헤스의 삶에 바치는 오마주’라고 정의합니다. ‘보르헤스는 문학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탈개성화하고 복수화하고 종국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춘다. 그러나 이 책은 복잡한 추상과 심오한 형이상학 속에 투영된 보르헤스의 맨 얼굴을 들추어 보여준다(253쪽)’라고 설명합니다.
나무 위키에 따르면 보르헤스의 도서관과 떼어낼 수 없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의 독서편력은 기호학, 해체주의, 환상적 사실주의, 후기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20세기 문학사는 물론 지성사의 핵심을 섭렵하기에 이르렀는데, 이와 같은 풍부한 책읽기가 그의 작품세계를 풍요롭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약관 무렵 시작한 글쓰기는 시, 평론, 수필, 단편소설 등 광범위하였는데 다만 장편소설은 없다고 합니다. 나무위키는 그를 가리켜 ‘20세기 세계 문학의 지배자. 포스트모더니즘의 창시자격인 인물이며, 특히 라틴아메리카 문학은 보르헤스 전과 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평가합니다.
저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 제네바에 묻힐 때까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삶을 18개의 단락으로 구분하여 정리하였습니다. 저자는 특히 보르헤스의 작품으로 그의 삶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즉 ‘문학이 된 삶이자 삶이 된 문학’을 논하고 있는 셈입니다. 작가 스스로도 이 책을 한 편의 이야기라고 정의하고 있기 때문에, 보르헤스를 마치 가공의 인물인 것처럼 느끼며 읽어도 좋을 수 있겠다고 옮긴이는 말합니다. 한편 저자는 보르헤스의 전기를 구성하면서 기억할만한 구절을 <모래의 책>에 있는 「울리카」에서 가져왔습니다. “나의 이야기는 사실에 충실할 것이다. 적어도 사실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기억에 충실할 것이다. 사실이나 사실에 대한 나의 기억이나 매 한 가지다(12쪽)” <책과 밤을 함께 주신 신의 아이러니>를 이루는 18개의 주제 가운데 첫 번째와 마지막 이야기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로 가름할 수 있기 때문에 보르헤스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16개의 장으로 구분되어 있는 셈입니다.
18개의 이야기가 모두 재미있게 읽히지만, 특히 공감이 가는 부분을 중심으로 발췌해봅니다. 먼저 시간과 영원성에 관한 일련의 에세이를 담은 <영원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저자는 “보르헤스를 읽는 것은 삶 그리고 문학과의 화해의 몸짓이다. 보르헤스는 종종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던진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우리는 그의 말을 이해하고 발가벗기고 상상하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60쪽)”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보르헤스를 큰 소리로 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픽션들>에서 읽을 수 있는 「바벨의 도서관」이야말로 문학에 관한 최상의 메타포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보르헤스는 미겔 카네 도서관에서 보조사서로 일하던 1941년에 이 단편을 썼다고 합니다. 바벨탑은 노아의 후예들이 하늘에 오르기 위하여 쌓다가 신의 노여움을 사 무너진 탑입니다. 애시 당초 불가능한 일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책의 불멸을 의미하는 도서관을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과학은 그런 도서관이 가능하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장미의 이름; http://blog.joins.com/yang412/12895088>에서 보르헤스와 그의 도서관을 등장시키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랄프 이자우는 <비밀의 도서관; http://blog.joins.com/yang412/13473271>에서 「바벨의 도서관」의 개념을 한층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처럼 불에 타서 세상에서 사라진 책은 물론 저자가 기획하는 단계에 있는 책의 내용을 담고 있는 책들까지도 소장되어 있는 환상의 도서관을 구상해낸 것입니다. 랄프 이자우의 <비밀의 도서관> 수준까지는 몰라도 보르헤스가 그렸던 「바벨의 도서관」은 전자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조만간 구현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올 초에 아르헨티나를 방문했을 때 페론과 에비타에 대하여 여전히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적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산업화와 적극적인 부의 재분배정책을 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르헤스는 페론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는데, 포퓰리즘적 정책의 이면에 숨긴 페론의 독재정치에 반발하였기 때문입니다. 1954년 페론은 초심을 버리고 대중적 반발을 불러온 파시즘적 협동조합주의를 내세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혼법 개정으로 사제단과 갈등이 불거지면서 입지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부정부패, 반복되는 쿠데타기도, 심각해진 경제 상황,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테러행위 등으로 페론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페론의 퇴장과 함께 보르헤스는 국립도서관장으로 임명되어 그의 천직이라고 할 도서관으로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도서관으로 돌아와 80만권이나 되는 책들을 탐사할 수 있었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시력이 나빠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무렵의 심정을 담은 시가 시집 <창조자>에 실리게 되는 「축복의 시」입니다. 옮긴이는 “어느 누구도 탄식이나 비난쯤으로 폄하하지 않기를, / 기막힌 아이러니로 내게 /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 신의 오묘함에 대한 나의 소회를.(109쪽)”이라는 첫 번째 연에서 이 책의 제목을 따왔다고 했습니다. 실명도 문학에 대한 그의 열정을 잠재우지는 못했습니다.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주고 그를 대신해 글을 써줄 사람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의 어머니 레오노르 아세베도 데 보르헤스가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녀는 보르헤스의 삶에서 가장 능률적이고 가장 성실한 후원자였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그 어떤 사랑보다도 위대한 것입니다. 그녀로 인하여 보르헤스의 새로운 신화가 탄생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하여 책을 읽는 사이 그의 마음속에서는 생겨난 빛이 아름다운 시어들을 만들어내게 된 것입니다. 책과 밤을 함께 주신 신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픽션들>에 수록된 단편들과는 달리 <알레프>에 실린 단편들은 별도의 장으로 구분하여 설명을 하고 있어서 이해가 미진했던 부분들을 집중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보르헤스는 항상 가장 좋은 작품으로 단편집을 시작하고 끝내기를 좋아했다는 점도 기억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알레프>의 경우는 「죽지 않는 사람」으로 시작해서 표제작 「알레프」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죽지 않는 사람」의 주인공, 즉 나는 로마제국의 디오클레티아누스 시절에 군단 사령관을 지냈는데, 갠지스강 너머에서 온 기병으로부터 서쪽 끝에 가면 인간을 죽음에서 깨끗하게 하는 비밀의 강이 있다는 사실을 전해듣습니다. 나는 그 강변에 있다는 원형극장과 사원이 즐비한 ‘죽지 않는 사람들의 도시’를 찾아 나섰습니다. 결국 그 강을 찾아 물을 마신 나는 불멸의 존재가 되어 20세기 초반까지 세상을 떠돌며 살다가 20세기 초 에리트레아 해안의 어느 도시 외곽에서 샘물을 마시고는 다시 죽는 존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죽지 않는 존재와 죽는 존재로 거듭 살아본 주인공은 두 가지 형태의 삶에 대하여 이런 생각을 합니다. 죽을 운명의 모든 존재들에게는 모든 것이 회복할 수 없고 불안한 가치를 지니는데 반하여, ‘죽지 않는 사람들’에게 각각의 행동은 무한히 반복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화 <사랑의 블랙홀>에서처럼 말입니다. 반복되는 일상이라면 지겨워서 차라리 죽음을 선택할 수 있기를 희망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이런 의미를 담아가면서도 저자는 호메로스를 등장시키고 자신을 호메로스와 동일시하는 느낌을 주면서도 자신은 보르헤스일 뿐으로 율리시스처럼 죽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점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보르헤스는 젊은 시절 썼던 시로 인하여 공산주의자로 몰리기도 했지만, 체 게바라나 카스트로 등과 불화를 빚을 정도의 반공주의적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입장은 당시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의 좌파에 철저하게 경도된 많은 젊은 작가 혹은 기성작가들과 달리 정치적 대세에 맞서는 것으로 인신공격과 심지어는 죽이겠다는 협박까지도 받았다고 합니다. 젊은 시절에 썼던 에세이 때문에 매카시 열풍이 일었을 때 미국비자를 받지 못한 적도 있지만, 훗날에는 비교적 친미적 성향을 보였다고 합니다.
많은 나라에서 훈장과 문학상을 수도 없이 받았고, 많은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보르헤스였지만, 노벨문학상만큼은 끝내 그를 외면했습니다. 스웨덴 학술원은 노벨상을 수여하고 50년이 경과되면 선정 과정에서 논의된 기록을 공개한다고 합니다. 이제 그의 수상이 점쳐지던 1970년대 후반부터 그가 죽은 1986년까지의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 사연을 알게 될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혹자는 보르헤스가 단 한 편의 소설도 쓰지 않았던 것이 약점이라고도 하지만, 시인이 수상한 경우도 많다는 점을 보면 딱히 약점이랄 것도 없을 듯합니다. 1976년 칠레정부가 수여하는 훈장을 받기 위하여 산티아고를 방문하였을 때 독재자 피노체트와 포옹한 것으로 노벨상 수상이 물 건너갔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리고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열린 어느 작가들의 모임에 참석했을 때, 어느 시인이 낭송하는 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는 특유의 빈정거림으로 자신의 느낌을 공표한 적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훗날 그 시인이 스웨덴 학술원의 사무총장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리고 보면 문학을 하시는 분들 가운데는 호불호를 솔직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있는 모양입니다. 저자는 헤밍웨이와 보르헤스 사이에 있었던 사연도 소개합니다. 굳이 그럴 까닭까지는 없었을 터인데, 보르헤스를 혐오했다는 헤밍웨이는 1950년에 다음과 같은 엽서를 보르헤스에게 보냈다고 합니다. “친애하는 호르헤스여, 다이키리의 대성당인 이곳 엘 플로리다에서 쿠바 친구 리노 칼보가 나에게 <알레프>를 건네주었네. 분명 지랄같이 좋은 책일세. 여기서는 자네가 스페인어권 최고의 작가라고들 한다네. 그러나 엿 먹으시라. 그대는 평생 운동장 밖으로 공을 차내지 못할 걸세, (…) 엘토레 블랑코 만세. 마음으로부터 아빠가(150-151쪽)” 보르헤스도 그냥 있지만은 않았다고 합니다. 헤밍웨이가 자살했을 때 묘비명 형식으로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다소 허세를 부리던 헤밍웨이는 자신이 위대한 작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 마침내 자살했다. 어느 정도 자업자득인 셈이다.” 장군에 멍군을 부른 셈입니다.
정리를 해보면, 저자는 ‘보르헤스의 문학은 포괄적 개념과 영원을 위해 글을 쓰겠다는 바람에서 배태되었기 때문에 그 높이는 엄밀성을 초월한다.’라고 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