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의사들 - 그곳에 히포크라테스는 없었다
미셸 시메스 지음, 최고나 옮김 / 책담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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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우여곡절 끝에 동유럽을 다녀왔습니다. 그 첫 번째 여정은 우리에게는 생소한 오시비엥침이었습니다. 폴란드어로 오시비엥침(Oświęcim)이라고 하는 지역은 독일어로는 익숙한 아우슈비츠(Auschwitz)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강제수용소를 세워 유대인 등을 학살하고, 심지어는 인체실험을 자행한 곳입니다. 종전 무렵 소련군이 예상보다 빠르게 이 지역을 압박하자, 당황한 독일군이 허겁지겁 퇴각하는 바람에 학살현장이 고스란히 남을 수 있었습니다. 1947년 폴란드 정부는 이곳에 박물관을 설립하여 수용소 건물, 철조망, 막사, 교수대, 가스실, 소각장 등, 나치가 자행했던 집단 학살의 상황을 재현해 놓았습니다.


<나쁜 의사들>은 나치가 세운 수용소에 똬리를 틀고서 살아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끔찍한 인체실험을 수행한 의사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이 책을 쓴 미셸 시메스(Michel Cymes)는 프랑스에서 라디오와 TV 진행자로 활동하는 의사입니다. 특히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할아버지를 잃은 희생자 가족이기도 합니다. 여러 번 미루던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방문길에 나치의사들의 인체실험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 계기가 되어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가족이 죽음을 맞은 곳, 그것도 정상적인 죽음이 아니라 학살을 당한 곳을 방문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죽음의 현장, “수많은 인간 실험동물들이 ‘의사’라고 불리는 자들의 가혹행위를 겪은 곳”에서 저자에게 들었던 의문은 ‘(그들이 한 일은) 무엇을 위해서였을까?’였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인 직업과 연을 맺어 놓고, 어떻게 사람들을 더 이상 인간으로 여기지 않고 죽이고자 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죽음의 의사들이 이곳에서 한 짓을 증언하라는 사명감을 느끼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료를 모으는 동안 ‘그들이 한 일은 나쁘지만, 그래도 의학을 발전시켰잖아’라는 알쏭달쏭한 말도 들었지만, ‘윤리를 자양분으로 삼은 의사로서의 내 작은 뇌 속에서 잔학행위는 의학의 진보로 연결되지 않는다(15쪽)’라고 다짐하였다고 합니다.


저자는 실력도 형편없으면서 자기과시욕으로 똘똘 뭉친 죽음의 의사들이 만들어낸 성과 역시 아무 쓸모없는 것으로 예단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추악한 의사들은 모두가 미친 것도 무능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성과에 대하여도 논란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역사가의 시각이 아니라 그저 의사라는 전문가적인 시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대중들에게 알리고자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 글은 반인류 범죄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부서지기 쉬운 기념물에 조촐하게 보탠 나의 작은 돌이다(16쪽)”라고 서문을 마무리하였습니다.


1945년 11월부터 1946년 10월까지 뉘른베르크에서 진행된 전범재판이 끝난 직후 나치의 비호아래 인체실험을 자행한 의사들에 대한 조사와 재판이 이어졌습니다. 전쟁범죄위원회 산하 전문가 위원회가 강제수용소의 나치 의사들을 조사를 맡아, 수많은 자료와 명백한 증거물, 증인들을 모았고, 그들이 수용된 사람들에게 가스실보다 혹독하고 유례없는 고통을 가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던 것입니다. 다하우에서 저체온증을 연구했던 지그문트 라셔는 죽임을 당했고, 아우슈비츠에서 쌍둥이실험을 주도한 요제프 멩겔레는 남미로 도주했지만, 스무명의 의사들을 피고인석에 앉힐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전공도 각기 달랐고, 재판당시 나이도 서른다섯부터 예순둘까지 다양했습니다. 외과의사 4명(카를 브란트, 프리츠 피셔, 카를 게브하르트, 파울 로스톡), 피부과 의사 3명(쿠르트 블롬, 아돌프 포코르니, 헤르타 오버호이져), 세균학자 4명(지크프리트 한드로저, 요아힘 므루고프스키, 게르하르트 로제, 오스카 슈뢰더), 내과 전문의 1명(빌헬름 바이글뵉), 방사선과 의사 1명(아우구스트 벨츠), 일반의 2명(발데마르 호벤, 카를 겐츠켄), 유전학자 1명(헬무트 포펜딕), 연구원 4명(헤르만 베커 프레이장, 볼프강 롬베르크, 지크프리트 루프, 콘라드 셰퍼) 등입니다. 병리의사가 없었다는 것이 참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동시에 병리의사의 판독소견이 없는 실험결과사 과연 신뢰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인체실험을 했던 의사나 과학자들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통해 1947년 과학자의 연구윤리에 관한 10개항의 기준을 만든 것이 뉘른베르크 강령입니다. 뉘른베르크강령은 재판을 위하여 법률가들이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의사들 스스로 전문적인 지침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대두되었고, 세계의사회는 1953년부터 인체실험에 관한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가 1947년의 뉘른베르크 강령을 수정 보완하여 만든 규범, ‘사람을 대상으로 한 의학 연구에 대한 윤리적 원칙’을 1964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제18회 세계의사협회 총회에서 채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모두 열네개의 항으로 되어 있는 헬싱키선언의 핵심은 ‘피험자의 이익에 대한 고려를 과학 및 사회의 이익에 우선시해야 한다.’라고 명시하는 등 피험자의 안전과 이익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나쁜 의사들>에서 다룬 죽음의 의사들과 그들의 범죄행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공군에서 복무한 지그문트 라셔는 조종사들이 고공에서 탈출하게 될 때 겪어야 하는 압력과 기온차를 극복할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동물실험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고, 실험설계 자체가 어려웠던 라셔는 힘러에게 지원을 요청하여 사형수를 대상으로 실험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압실과 얼음을 넣은 수조를 동원하여 실험을 수행하였고, 실험에서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은 부검을 통하여 병변을 확인하기까지 했습니다. 라셔의 연구에 대하여 ‘추위로 인한 쇼크 상태의 치료 문제를 해결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53쪽)’라는 평가도 나오고 있지만, 인간을 위하여 인간을 실험했다는 변명은 적절치 않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힘러의 눈 밖에 났던 라셔는 친위대에 체포되었고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역시 공군에서 복무한 내과 전문의 빌헬름 바이글뵉은 해수음용실험을 수행하였습니다. 바다에 추락한 비행사가 갈증으로 사망하는 상황을 해결하라는 힘러의 요구에 따라 셰퍼는 필터를 이용하여 해수를 거르는 방식을 개발하였고, 베르카는 설탕과 비타민C를 혼합한 물질을 해수에 투입하여 해수의 짠맛을 없애는 방식을 개발하였습니다. 두 가지 방식을 검증하기 위하여 바이글뵉은 40명의 집시들을 네 집단으로 나누어 해수와 베르카방식을 적용한 해수, 셰퍼의 필터로 거른 해수, 그리고 식수를 각각 먹였습니다. 첫 번째 실험은 6일 동안, 두 번째 실험은 12일 동안,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해수를 마시거나 베르카의 방식을 적용한 해수를 마신 피험자들은 갈증과 고통을 호소했고, 경련과 정신착란을 일으켰지만, 그에 합당한 조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실험자들은 장기의 변화를 관찰하기 위하여 간 천자술을 시행하였습니다. 전범재판에서 15년을 선고받은 바이글뵉은 겨우 절반의 형을 마치고 1952년 석방되어 1963년 사망할 때까지 북스테후데 병원에서 의사로 일했다는 것입니다.


아리베르트 하임은 수용소생활을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른 수감자를 처형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사람의 심장에 휘발유나 독을 직접 주사하거나, 마취도 하지 않고 장기를 적출하는 반인륜적 방식을 즐겨 사용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토드(Tod, 독일어로 죽음, 사신을 뜻함)박사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마우트하우젠의 도살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1941년 말 하임은 돌연 친위대 북부사단으로 전출되어 핀란드에 갔다가 종전과 함께 체포되었지만 이내 석방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덴바덴에서 산부인과의사로 평화롭게 살다가 1962년 전범으로 기소되면서 도주하였는데, 카이로에 정착한 그는 이름을 바꾸고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살다가 1992년 대장암으로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아우구스트 히르트는 화학전에 대비하여 전투가스의 해독제를 찾는 인체실험을 주도했습니다. 히르트는 쥐에게 독가스성분인 이페리트를 투여하였을 때 비타민A를 준 쥐들이 오래 생존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인체실험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는 피험자들의 팔에 이페리트 한 방울씩 떨어트리고는 해독 크림과 연고를 바르거나 약을 먹이고, 혹은 혈관주사를 놓고 조제한 약을 실험하는 등 다양한 방법들을 사용하여 해독조건을 찾아내려 하였습니다. 물론 대조군에게는 아무런 처치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페리트를 투여 받은 환자는 대략 6시간이 지나면 욱신거리는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전신으로 번지면서, 다음날에는 발열증상까지 나타났다고 합니다. 엿새째가 되어서 첫 번째 사망자가 나타났습니다. 죽은 사람을 부검해서 표본을 추출하고 남은 시신은 화장 가마에서 태웠습니다. 그는 해독제를 찾는 실험 이외에도 소위 스트라스부르 컬렉션이라고 부르는 유대인 골격과 두개골표본을 제작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연합군이 스트라스부르에 진주했을 당시 히르트는 수용소를 탈출하여 튀빙겐에서 멀지 않은 검은 숲에 몸을 감추었다가 1945년 6월 자살로 잔악했던 생을 마감했습니다.


아우슈비츠의 ‘죽음의 천사’로 불리던 요제프 멩겔레는 수용소에 도착하는 유대인들을 선별하여 가스실로 보내는 작업을 수행하는 한편, 유전학적으로 완전히 동일한 인간들의 삶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쌍둥이 연구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먼지가 쌓인 선로에서 멩겔레를 처음 본 유대인들은 황폐한 아우슈비츠를 배경으로 등장한 기품 있는 친위대 장교가 클라크 케이블 같이 생겨 살인자로 보기 어려웠다고 했습니다. 멩겔레는 독일 우생학의 거장 오트마르 폰 페르슈어 박사의 조교를 지냈습니다. 따라서 ‘유전적으로 병들고 가치 없는 사람들의 재생산 제한을 목표로 한 사회적 위생실천’을 주장한 페르슈어박사의 가르침을 받은 멩겔레는 쌍둥이의 비밀을 밝혀 독일이 세계를 지배하는데 기여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집시, 쌍둥이, 난쟁이 등등에 대한 모든 것을 기록하고 그림을 그려 분류했지만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습니다. 멩겔레는 다음 단계로 대상을 해부해서 장기를 분석하기로 했습니다. 당연히 죽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부검을 통해서도 역시 찾아낸 것이 없었습니다.


1945년 러시아군이 아우슈비츠에 진입했을 때 멩겔레는 탈출에 성공하여 고향 바이에른에 정착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의 혼란이 가라앉고 체포될 우려가 높아지자, 그는 1949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망명합니다. 페론 정권은 대외적으로는 중립을 내세웠지만 나치의 전직 고관들과 자본을 받아들이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는 헬무트 그레고르라는 이름으로 소아과 의사가 되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사교계에도 이름을 알렸습니다. 1956년에는 본명을 되찾아 결혼도 하고 1958년에는 제약사의 주주가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프랑크푸르트 대학이 그의 학위를 취소하면서 합법적으로 의술을 시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범죄인 인도 요청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에 이의를 제기하는 오만함을 보였지만, 결국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나야 했습니다. 알프레도 마옌이라는 이름으로 파라과이의 호에나우에 정착한 멩겔레는 1979년 브라질 베르지오 해변에서 해수욕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음을 맞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자들에 대한 처리가 완벽하게 끝나지 않은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는 페이퍼클립작전을 통하여 나치의 수많은 과학자들을 미국으로 데려와 독일의 첨단기술을 연구하게 하였는데, 이면에는 공산주의와의 맞서기 위하여 과학기술과 인적 자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수백 명에 이르는 나치 흉악범들이 법의 심판을 피하는 혜택을 얻었다고 합니다. 미국 뿐 아니라 소비에트연방도, 영국도, 프랑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떻거나 저자는 나치에 협력한 의사들에 대하여 ‘의학계의 수치’라고 결론을 맺었습니다. 이 책을 통하여 우리는 나치의 수용소 의사들이 했던 일의 의미를 분명하게 새겨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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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인간학 - 약함, 비열함, 선량함과 싸우는 까칠한 철학자
나카지마 요시미치 지음, 이지수 옮김, 이진우 감수 / 다산북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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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자는 인식이 높아지다 보니 때로는 배려를 요청하는 목소리가 지나친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이 드는 사람들이라면 솔깃해 할 수도 있는 책을 읽었습니다. ‘싸우는 철학자’라고 불리는 일본 철학자 나카지마 요시미치가 쓴 <니체의 인간학>입니다. 프롤로그의 첫 문장을 “프리드리히 니체. 그는 젊은 시절부터 내게 혐오의 대상이었다(20쪽)”라고 시작하는 철학자가 니체를 들고나온 것부터가 심상치 않다. 미워한다는 것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미운정이 들었다는 이야기거나, 아니면 자신의 모습과 흡사한 점이 있어서 미워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저자는 니체를 아주 잘 알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칸트 전문가라는 저자는 역시 40여년에 걸쳐 니체를 읽어왔고, 최근에는 자신이 운영하는 ‘철학 학원 칸트’의 학생들과 함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기 시작했다고 고백합니다. 특히 저자는 “니체의 착한 사람 공격이나 동정심 비난은 자신의 내면에 숨어 있는 약함, 비열함, 선량함을 향한 것이 아닐까 싱각하게 되었다(21쪽)”라고 하였습니다. 니체의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단호한 비판 분위기를 역시 <니체의 인간학>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습니다. 역시 저자는 니체와 같은 성향임에 틀림없을 것 같습니다. 저자가 니체의 ‘착한 사람 비판’을 들고 나온 데는 현대 일본 젊은이들의 성향에 대한 우려 때문으로 보입니다.


저자는 니체의 도덕비판을 바탕으로 ‘착한 사람의 폭력성’을 여섯 개의 명제로 구분하였습니다. 1. 착한 사람은 약자다, 2. 착한 사람은 안전을 추구한다, 3. 착한 사람은 거짓말을 한다, 4. 학한 사람은 무리를 짓는다, 5. 착한 사람은 동정한다, 6. 착한 사람은 원한을 품는다. 당연히 그와 같은 명제는 니체로부터 얻은 것이므로 심증은 있으나 물증은 없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실 첫 번째 명제는 ‘강자와 약자’, 착함과 악함‘이라는 이분법적 접근을 통하여 도출해낸 것으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입니다. 강하면서도 착한 사람도 많을 것이고, 약하면서도 악한 사람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저자가 현대 일본사회에서 발견한 약자들을 세 부류로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 약자는 인권과 민주주의가 보편화된 사회에서 배려의 대상인 ‘공인된 약자’로, 장애인, 범죄자, 성적 소수자, 외국인, 피차별 부락 출신자 들이 여기 속한다고 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두 번째 약자는 ‘반동적 약자’로, 이들은 자신이 약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착함으로 정당화하는 무리로 저자가 증오하는 부류라고 했습니다. 니체가 ‘무력감의 간계’라고 비판한 행태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약자로 저자가 현대 일본사회에서 발견한 히키코모리 및 사토리 세대와 같은 ‘신형 약자’를 들었습니다. (참고로 ‘히키코모리’는 사회생활을 극도로 멀리하고, 방이나 집 등의 특정 공간에서 나가지 못하거나 나가지 않는 사람을 일컫는 신조어이며, ‘깨달음’, ‘득도’라는 의미의 사토리(さとり)에서 따온 사토리 세대는 미래가 절망적이라는 현실을 냉정하게 인정하고 현실에 만족하며 사는 특징을 가진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에 태어난 일본 젊은이들을 이릅니다) 약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자각하고 있지만 자책은커녕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온몸으로 정당화하는 반동적 약자와는 달리 신형 약자는 반동의 힘마저 없는 철저하게 무기력한 약자라고 저자는 정리합니다.


1장에서 6장에 이르기까지 착한 사람에 관한 여섯 가지 명제를 설명하고 마지막 7장에서는 니체라는 착한 남자를 해부합니다. <비극의 탄생/즐거운 지식; http://blog.joins.com/yang412/13023753> 등 니체의 저서를 읽었고, 고명석 기자의 <니체극장; http://blog.joins.com/yang412/12970004>, 김선희교수의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 http://blog.joins.com/yang412/12474996>등 니체에 관한 책들을 읽으면서도 저자가 지적한 바를 느끼지 못하였으니 책읽기의 한계를 느끼면서도 감히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못하는 점이 있다고 적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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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이런 가족
전아리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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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말이 되면 신춘문예 당선작 소설을 읽기 위하여 여성 월간지를 살 정도로 신작소설에 빠졌던 시절도 있습니다만, 소설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것은 어쩌면 TV드라마가 한 몫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요즘에는 드라마마저도 시들해진 것은 다시 돌아간 책읽기에 필요한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해진 까닭에 더하여 드라마에 재미가 덜해진 탓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드라마 가운데 ‘막장’ 드라마라는 정체가 모호한 분야가 있습니다. 세상에 저런 일이 있을까 싶은 그런 상황이 반복되는 탓에 그만 보아야겠다고 하면서도 묘하게도 끌어당기는 맛이 있는데, 그것은 어쩌면 결말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막장을 지향하는 드라마 때문인지 막장을 지향하는 소설도 등장하게 된 것 같습니다. 막장을 내세운 전아리 장편소설 <어쩌다 이런 가족>입니다. 드라마처럼 등장인물도 부모와 두 딸이 핵심인물이고 핵심인물 주변에 조연이 몇 사람 등장합니다. 막장으로 가는 이야기에 특정 부류가 있을 까닭은 없을 것 같습니다만, 상류층이라고 하면 뭔가 색다른 무엇이 있을 것 같습니다. 국내 최고 출판사를 운영하지만 해결사를 동원하기도 하는 다혈질 아버지 서용훈과, 뼈대 있는 집안 출신으로 평생 우아하게 살아온 어머니 유미옥. 부모의 뜻대로 성장해온 별명마저 마더 테레사인 첫째 딸 서혜윤, 돌연변이처럼 튀는 행동을 해서 언니와 비교되는 둘째 딸 서혜란이 핵심 등장인물입니다. 사건은 첫째 딸이 XX 동영상을 미끼로 협박을 받게 되었다는 데서 시작됩니다. 핵심인물들은 성격대로 상황처리에 나서게 됩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이야기의 구성이 낯익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얼마 전에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시노부선생님, 안녕!; http://blog.joins.com/yang412/14159123>에 나오는 「시노부선생님의 상경」에서도 엄격한 집안의 아이들이 자작 납치극을 벌이고 시노부선생이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주고 있는 것처럼 큰 딸이 벌인 자작극에 온 식구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러 드는 것이 차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그 해결방식이 지나치게 과격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막장 드라마 같은 소설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막장 드라마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를 하는 것처럼 <어쩌다 이런 가족>도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됩니다. 하지만 천성이라는 것 혹은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이 하루 아침에 바뀌는 것이 가능할까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만, 결말의 충격이 대단했기 때문인지 핵심등장인물 모두가 하루아침에 개과천선한 것으로 비쳐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젊은 작가이다 보니 처음 듣는 유행어(?)를 읽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대목입니다. “진짜 노는 물이 다르다는 건 태어나기 전 양수의 수질부터가 다르다는 거(15쪽)” 그런가 하면 “일단 집에 발을 들인 사람은 동냥을 하러 온 거지일지라도 손님이므로 먼저 예의를 차려 대접해야 한다(96쪽)”라는 고풍스러운(?) 개념도 등장합니다.


이 소설의 흥미로운 점은 주연급 등장인물 4명과 조연급 등장인물 3명이 이끌어가는 20꼭지의 이야기들이 교차되고 있고, 그 이야기의 핵심을 요약은 제목을 달았다는 점입니다. 작은 제목이 달린 소설을 읽어본 기억이 까마득하기에 눈길을 끌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둘째딸 혜란이 가장 많은 여섯 꼭지에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혜란을 주인공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 일이란 자고로 없었던 듯 지내다보면 기억 한 구석으로 밀려나게 되고 종국에는 정말 없는 일처럼 되는 법’이라는 어머니 유미옥의 철학에 따라 일을 처리했더라면 막장 같은 상황을 만들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랬더라면 이야기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떻든 살아가면서 참고할만한 경구가 아닐까 싶습니다. 한편 작가는 이 막장 이야기를 통해서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가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고 느낄 때일수록 서로를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깨닫기를 희망하는 것 같습니다. 불편함을 토로하고, 상대가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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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박스 - 남자다움에 갇힌 남자들
토니 포터 지음, 김영진 옮김 / 한빛비즈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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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방송을 보면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사건, 심지어는 집단성폭행사건들이 하루가 멀다할 정도로 보도되고 있습니다. 사회심리학적으로 우리나라 남성들이 과거보다 위축되어 있다고들 하는데 이런 사건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과거에는 쉬쉬하고 숨겨지던 사건들이 봇물 터지듯 노정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미국의 사회운동가 토니 포터의 <맨박스>는 이런 현상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남성들의 심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저자는 남성의 집단 사회화 과정과 여성 폭력 간의 공통분모를 연구하고 바람직한 남성성을 전파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TED에서 한 <남성들에게 고함(A Call To Men)>이라는 제목의 강연은 미국 GQ매거진이 꼽은 ‘모든 남성들이 꼭 보아야 할 TED강연 톱10에 들었다고 합니다.


<맨박스> 역시 저자의 TED강연과 같은 맥락에서 저술한 것입니다. 즉, ‘남자들에게 남자로서 가질 수 있는 훌륭한 자산(매사에 성실하고 가족을 돌보는 남편이나 남자 친구, 또는 아버지로서의 자긍심)은 지키되 남성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돌아보라는 당부를 담고 있다(10쪽)’라는 것입니다.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한 남성들 가운데 상당수는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있거나, 겉으로 보아도 착한 모습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이렇듯 ‘착한 남자’들이 문제적 행동을 저지르는 바탕에는 사회적 학습을 통하여 만들어진 남자들만의 특권의식과 그릇된 남성성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가정폭력, 십대 데이트폭력, 성폭력, 성매매 그리고 여성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적대감을 불러온다는 것입니다.


익숙하지 않는 ‘맨박스’라는 용어는 ‘사회적으로 강요된 남성성의 규범’을 말합니다. 맨박스 가운데 바람직하고 긍정적인 것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남성들은 아내와 자녀들을 아끼고 근면성실한 사회의 일꾼이며 누군가의 멘토 역할을 한다’라는 것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남자다움이란 여성들의 관점과 삶으로부터 가급적 멀리 떨어지는 것’, ‘남성은 책임자이자 상황을 지배하는 사람’이라고 배우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이자 관심의 대상, 그중에서도 특히 성적인 대상’이라고 배운다는 것입니다. 맨박스는 이성에 대한 우월주의와 호모포비아가 깃들어 맨박스를 단단하게 고정하는 접착제 역할을 한다고 저자는 설명합니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맨박스에 대한 인식이 형성되어온 과정을 돌아보고, 그와 같은 인식에 변화가 생긴 이유를 설명합니다. 저자는 뉴욕의 할렘가에서 태어나서 브롱크스 지역에서 성장했지만, 나름대로는 건실하게 성장해왔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역적 특성으로 인한 10대 초반부터 이미 집단성폭행사건에 엮일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물론 자신은 친구들과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서 말리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사건은 이렇습니다. 동네 짱이 정신장애를 앓고 있는 여자 아이를 성폭행하고는 마을 소년들을 불러 모아 집단성폭행을 유도하였던 것입니다. 짱이 ‘할래?’하고 물었을 때, 어린 생각에도 ‘결정 여하에 따라 남자로서의 평판이 심각하게 타격을 입을 수도 있겠다’라고 판단했던 것이고, 동참은 하되 실제로는 한 척하는 것으로 허세를 부렸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직접 선동하거나 참여하지 않았다면 무죄’라고 오랫동안 믿어왔던 것인데, 생각해보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친구들을 말리지 않은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맨박스가 만들어내는 인식 가운데 ‘동지애 또는 형제애라고 하는 남자들끼리의 동맹은 구성원 중 누군가가 부적절한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잘못을 묻지 않는다(40쪽)’라는 것이 결정적 문제라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내려오면서 단단하게 굳어진 맨박스라고 하더라도 잘못된 것은 뜯어고쳐야 할 것입니다. 물론 쉽지 않을 것이나, 역지사지(易地思之)해보면 의외로 쉽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면 지나가는 여성에게 치근대고 있는 남성이 있다면, 그 지나가는 여성이 자신의 아내 혹은 딸이고, 생면부지의 남자가 치근대는 장면을 본다면 어떨까요? 아마도 당장 쫓아가 주먹을 날리지 않겠습니까?


물론 가족들에게 폭행이나 성범죄를 저지르는 남성도 없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 대한 사회의 인식도 바뀌어야 할 점이 많다고 저자는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가정폭력으로 고통 받는 여성들에게 ‘왜 그런 남편하고 헤어지지 않습니까?’라고 물으면서도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에게 ‘왜 폭력을 멈추지 않습니까?’하고 비난하는 경우는 없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내가 아닌 다른 여성을 때린 남성은 형사법원으로 보내지는 반면 아내를 때린 남편은 가정법원으로 보내지는 것은 대부분의 사회와 법체계가 맨박스에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제 경우는 딸이 없어 직접 경험해보지는 못했습니다만, 딸을 얻어 처음 눈을 맞추게 되면 대부분의 남성들은 자신의 세계가 변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즉 지금껏 자신이 주변 여성들에게 내주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자신의 딸에게 주어지기를 바라게 된다는 것입니다. 딸이 자신과 같은 남자와 결혼하면 좋을지를 생각해보면 스스로를 바꾸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남성들은 자신의 기존행동이 주는 편안함보다 새로 알게 된 지식이 주는 불편함이 더 크게 느껴지면 변하기 시작합니다. 사회적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두려움과 불안감을 떨쳐내야 합니다. 관성의 법칙을 깨기 위해서는 더 큰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잘못된 맨박스를 깨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남자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 책의 4장과 5장에는 저자가 다양한 과정을 통하여 수집한 사례들을 소개합니다. 특히 스스로 선한 남성이라고 생각하는 남성들이 털어놓는 경험담은 일부 폭력적인 남성들의 사례와 크게 다른 점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게 됩니다. 물론 선한 남성들이 폭력적인 남성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지만, 두 집단 사이에는 공통점이 분명 있습니다. 즉 선한 남성들이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말과 행동을 통하여 남성지배적 문화를 퍼트리는데 기여해왔던 것입니다. 저자는 이런 사례들을 인용하면서 해당 사례에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함께 생각할 문제도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6장 ‘아이들이 알아야 할 진짜 남자다움’이야말로 이 책의 핵심입니다. 즉 남성으로서의 맨박스가 결정되는 시기의 남자 어린이들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것이 어른들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태어나서부터 다섯 살 무렵까지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과 대체적으로 같은 경험을 공유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다섯 살에서 열 살 사이의 시기의 남자아이들은 ‘남자답기 위해’ 여자아이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여자아이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심지어는 혐오감을 드러내도록 학습하게 됩니다. 남자아이들이 미래에 어떤 모습으로 성장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 우리의 딸들을 위해 만들고자 하는 세상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즉 딸들이 평등하게 존중받는 세상에서는 남성들은 매우 친절하며 예의가 바를 것입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남자아이들도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어른들은 그런 감정들을 공유하고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맨박스를 해체하는 작업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저자는 생각합니다. 남성들은 새로운 것을 배울 때 일어나는 인식의 변화 과정을 흥미롭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기득권이라고 생각해온 무엇을 포기하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맨박스 안에서의 삶이 오히려 불편하다고 느끼게 만들려는 노력을 기울여왔다고 합니다. 실제로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남성의 여성폭력과 관계된 사건들을 보면 저자의 말대로 맨박스 안에서의 삶이 혐오스럽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남자다움에 대한 새로운 정의, 즉 새로운 맨박스가 만들어질 날이 올 것으로 굳게 믿고 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오늘날 남자다움의 정의, 즉 맨박스는 세 가지 큰 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인식입니다. 둘째,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라는 인식입니다. 그리고 셋째, 여성은 남성의 성적 도구라는 시각입니다. 이와 같은 인식은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 문화를 조장해온 남성중심주의가 만들어낸 허상으로, 왜곡된 남자다움을 만든 주범인 남성중심주의를 하루 빨리 없애야 할 것입니다.


서구 남성들은 여성을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고 우리는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오히려 서구 남성들은 여성을 소유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결혼식의 한 장면을 예로 들었습니다. 서구화물결을 타고 우리 주변에서도 일상처럼 보는 장면입니다만, 결혼식에서 신부 아버지가 딸의 손을 붙잡고 입장해서는 사위가 될 남성에게 인계하는 것은 딸에 대한 소유권이 이전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결혼한 여성이 처녀 때 성을 버리고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통 혼례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역시 우리네 옛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네 사회에서도 ‘사내 녀석이 그러면 못써!’라는 식으로 사내아이에게 남성성을 세우도록 은연중에 심어왔습니다. 그로 인한 문제점들은 대부분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왔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이 책의 저자 토니 포터와 같은 분들이 많아져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눈치를 보느라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던 남성들이 자발적으로 잘못된 남성적 관행을 고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야 하겠습니다.


저자는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폭력의 뿌리가 닿아 있는 맨박스를 개선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의 변화가 자리 잡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1. 남성 중심주의는 사라져야 합니다, 2. 가정 폭력과 성폭력을 근절하는 노력은 전적으로 남성들의 몫입니다, 3. 폭력과 차별은 종류와 관계없이 사라져야 합니다, 4. 여성들이 내는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5. 여러 억압 행위에는 교차점이 존재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6. 지역 사회에 기반을 둔 참여를 유도해야 합니다, 7. 남성 스스로 남성에 대한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저자는 ‘사회에 자리 잡은 남자다움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남성들이 이끄는 여성 폭력 방지 운동을 만들어내려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성들이 처한 현실을 이해하며 존중하는 동시에 남성들에게 진심 어린 애정과 희망을 가지고 활동을 이어나가려 한다고 고백합니다.


저자 토니 포터와 함께 ACTM (A Call To Men)을 창설한 테드 번치는 가정 폭력 대응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 프로그램은 법원의 명령으로 26주에 걸쳐 상습 폭력방치 치료를 받는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토니와 만난 테드는 가정 폭력, 성폭력, 성매매 그리고 여성을 향한 다양한 학대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남성들의 참여가 필요하다는데 인식을 같이 하고, ACTM 활동의 토대가 될 이론을 세우고 이의 확산을 위하여 노력해왔다고 합니다. 초기 ACTM활동은 방관자적 태도를 개선하는데 중점을 두었지만, 점차 남성성의 모든 면을 다루게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모든 남성들과 남자아이들이 다정하고 정중하며, 모든 여성들과 여자아이들이 소중하고 안전하게 대우받는 세상을 만들 수 있도록 남성성을 진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이론으로 발전시킨 것입니다. 여성의 진정한 해방은 남성들이 전통적인 맨박스에서 해방되는 것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동의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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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착지
니콜라 파르그 지음, 이혜원 옮김 / 뮤진트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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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는 곧 가보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여전히 미지의 땅입니다. 북아메리카에서 시작해서, 유럽을 거쳐 남아메리카에 발자국을 찍었으니 이제 아프리카 순서가 되었습니다. 기회가 되는대로 아프리카에 대한 공부를 해보려고 합니다. 가볍게 시작해 보려했던 것과는 달리 쉽지 않은 책읽기였던 것 같습니다. 우선 마다가스카르가 어디인지부터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금년에 회사에서 의료봉사를 떠난 곳이 마다가스카르였던 것 같기도 합니다.


<종착지>는 다양한 사연을 가지고 마다가스카르로 모여든 프랑스 사람들이 마다가스카르에서 겪는 혼동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 혼동의 원인은 어쩌면 프랑스와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마다가스카르 사이의 문화적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앞서 책읽기가 쉽지 않았다고 말씀드린 이유는 등장인물이 도대체 몇 사람인지 구분이 쉽지 않고, 이들이 서로 연결되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관계가 긴밀하지 않은 별개의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떻든 무대는 마다가스카르의 남단에 있는 디에고 수아레스입니다. 공항도 조그맣지만 도시라기보다는 마을이라고 해야 할 디에고는 빈민굴에 가까울 지경이라고 합니다. 등장인물들이 왜 디에고에 모여드는지도 모호한데, 이들과 디에고에 사는 프랑스 사람들 혹은 마다가스카르 원주민들 사이의 시각은 엄청난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원주민들은 프랑스 사람을 만나 한 몫을 챙기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챙긴 것으로 마다가스카르를 떠나 프랑스로 가려는 꿈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사는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각각 가지고 있을 터이니 말입니다. 마다가스카르에 주저앉은 프랑스 사람들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는 프랑스의 일상에 신물이 났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현지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도착한 사람들은 말라리아를 옮긴다는 모기가 왱왱거리고,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은 절대로 마시면 안 된다고 겁을 주니 죽을 맛이 아닐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개방적인 성문화에 휩쓸리다보면 서로의 관계가 모호해질 수도 있는데, 저자 역시 이곳에서 4년을 체류하는 동안 아내와 이혼해야 했던 것이 작품 어디엔가 녹여져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필립과 동료 에르페 사이의 대화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모두 광기에 휩싸여서 이성을 잃어가고 있는 거지. 디에고야말로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데야. 아주 썩을 놈의 동네지. 전체 분위기가 그래.(138쪽)” 마다가스카르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지역 간의 갈등도 있다고 하는데, 고원지역과 해안지역 사람들 사이에 차별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원지역은 동양계의 이목구비를 하고 있는데, 주로 관청이나 은행에서 일하는 화이트칼러인데 반하여, 해안지역은 아프리카계의 얼굴을 한 흑인들로 고원지역 사람들이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 갈등을 빚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리되지 않는 부분은 저자와 옮긴이의 설명이 차이가 있는 것도 한 몫을 합니다. 저자는 분명 마다가스카르에 도착한 지 겨우 4일 째 되던 날 이 책을 쓰기 시작해서 1년 만에 끝마쳤다고 서문에 적었습니다. 그런데 옮긴이는 <종착지>는 작가가 마다가스카르에서 보고 듣고 느낀 점을 3인칭의 시점을 통해 써내려간 일종의 체류보고서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디에고에 있는 알리앙스 프랑세즈 원장으로 4년간 체류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저자의 설명이 무리가 있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옮긴이에 따르면 저자는 이 책에서 인종과 문화 간의 갈등, 그리고 남녀 간의 성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하는데, 그 시발점은 오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오해라는 것을 풀어내는 모종의 기전이 있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종착지’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는 삶에서 내몰린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마지막으로 흘러드는 그런 곳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공연한 것일까요? 저자는 왜 마다가스카르를 종착지라고 생각했는지 의문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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