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박스 - 남자다움에 갇힌 남자들
토니 포터 지음, 김영진 옮김 / 한빛비즈 / 201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신문 방송을 보면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사건, 심지어는 집단성폭행사건들이 하루가 멀다할 정도로 보도되고 있습니다. 사회심리학적으로 우리나라 남성들이 과거보다 위축되어 있다고들 하는데 이런 사건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과거에는 쉬쉬하고 숨겨지던 사건들이 봇물 터지듯 노정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미국의 사회운동가 토니 포터의 <맨박스>는 이런 현상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남성들의 심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저자는 남성의 집단 사회화 과정과 여성 폭력 간의 공통분모를 연구하고 바람직한 남성성을 전파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TED에서 한 <남성들에게 고함(A Call To Men)>이라는 제목의 강연은 미국 GQ매거진이 꼽은 ‘모든 남성들이 꼭 보아야 할 TED강연 톱10에 들었다고 합니다.


<맨박스> 역시 저자의 TED강연과 같은 맥락에서 저술한 것입니다. 즉, ‘남자들에게 남자로서 가질 수 있는 훌륭한 자산(매사에 성실하고 가족을 돌보는 남편이나 남자 친구, 또는 아버지로서의 자긍심)은 지키되 남성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돌아보라는 당부를 담고 있다(10쪽)’라는 것입니다.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한 남성들 가운데 상당수는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있거나, 겉으로 보아도 착한 모습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이렇듯 ‘착한 남자’들이 문제적 행동을 저지르는 바탕에는 사회적 학습을 통하여 만들어진 남자들만의 특권의식과 그릇된 남성성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가정폭력, 십대 데이트폭력, 성폭력, 성매매 그리고 여성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적대감을 불러온다는 것입니다.


익숙하지 않는 ‘맨박스’라는 용어는 ‘사회적으로 강요된 남성성의 규범’을 말합니다. 맨박스 가운데 바람직하고 긍정적인 것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남성들은 아내와 자녀들을 아끼고 근면성실한 사회의 일꾼이며 누군가의 멘토 역할을 한다’라는 것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남자다움이란 여성들의 관점과 삶으로부터 가급적 멀리 떨어지는 것’, ‘남성은 책임자이자 상황을 지배하는 사람’이라고 배우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이자 관심의 대상, 그중에서도 특히 성적인 대상’이라고 배운다는 것입니다. 맨박스는 이성에 대한 우월주의와 호모포비아가 깃들어 맨박스를 단단하게 고정하는 접착제 역할을 한다고 저자는 설명합니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맨박스에 대한 인식이 형성되어온 과정을 돌아보고, 그와 같은 인식에 변화가 생긴 이유를 설명합니다. 저자는 뉴욕의 할렘가에서 태어나서 브롱크스 지역에서 성장했지만, 나름대로는 건실하게 성장해왔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역적 특성으로 인한 10대 초반부터 이미 집단성폭행사건에 엮일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물론 자신은 친구들과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서 말리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사건은 이렇습니다. 동네 짱이 정신장애를 앓고 있는 여자 아이를 성폭행하고는 마을 소년들을 불러 모아 집단성폭행을 유도하였던 것입니다. 짱이 ‘할래?’하고 물었을 때, 어린 생각에도 ‘결정 여하에 따라 남자로서의 평판이 심각하게 타격을 입을 수도 있겠다’라고 판단했던 것이고, 동참은 하되 실제로는 한 척하는 것으로 허세를 부렸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직접 선동하거나 참여하지 않았다면 무죄’라고 오랫동안 믿어왔던 것인데, 생각해보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친구들을 말리지 않은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맨박스가 만들어내는 인식 가운데 ‘동지애 또는 형제애라고 하는 남자들끼리의 동맹은 구성원 중 누군가가 부적절한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잘못을 묻지 않는다(40쪽)’라는 것이 결정적 문제라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내려오면서 단단하게 굳어진 맨박스라고 하더라도 잘못된 것은 뜯어고쳐야 할 것입니다. 물론 쉽지 않을 것이나, 역지사지(易地思之)해보면 의외로 쉽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면 지나가는 여성에게 치근대고 있는 남성이 있다면, 그 지나가는 여성이 자신의 아내 혹은 딸이고, 생면부지의 남자가 치근대는 장면을 본다면 어떨까요? 아마도 당장 쫓아가 주먹을 날리지 않겠습니까?


물론 가족들에게 폭행이나 성범죄를 저지르는 남성도 없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 대한 사회의 인식도 바뀌어야 할 점이 많다고 저자는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가정폭력으로 고통 받는 여성들에게 ‘왜 그런 남편하고 헤어지지 않습니까?’라고 물으면서도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에게 ‘왜 폭력을 멈추지 않습니까?’하고 비난하는 경우는 없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내가 아닌 다른 여성을 때린 남성은 형사법원으로 보내지는 반면 아내를 때린 남편은 가정법원으로 보내지는 것은 대부분의 사회와 법체계가 맨박스에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제 경우는 딸이 없어 직접 경험해보지는 못했습니다만, 딸을 얻어 처음 눈을 맞추게 되면 대부분의 남성들은 자신의 세계가 변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즉 지금껏 자신이 주변 여성들에게 내주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자신의 딸에게 주어지기를 바라게 된다는 것입니다. 딸이 자신과 같은 남자와 결혼하면 좋을지를 생각해보면 스스로를 바꾸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남성들은 자신의 기존행동이 주는 편안함보다 새로 알게 된 지식이 주는 불편함이 더 크게 느껴지면 변하기 시작합니다. 사회적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두려움과 불안감을 떨쳐내야 합니다. 관성의 법칙을 깨기 위해서는 더 큰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잘못된 맨박스를 깨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남자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 책의 4장과 5장에는 저자가 다양한 과정을 통하여 수집한 사례들을 소개합니다. 특히 스스로 선한 남성이라고 생각하는 남성들이 털어놓는 경험담은 일부 폭력적인 남성들의 사례와 크게 다른 점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게 됩니다. 물론 선한 남성들이 폭력적인 남성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지만, 두 집단 사이에는 공통점이 분명 있습니다. 즉 선한 남성들이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말과 행동을 통하여 남성지배적 문화를 퍼트리는데 기여해왔던 것입니다. 저자는 이런 사례들을 인용하면서 해당 사례에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함께 생각할 문제도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6장 ‘아이들이 알아야 할 진짜 남자다움’이야말로 이 책의 핵심입니다. 즉 남성으로서의 맨박스가 결정되는 시기의 남자 어린이들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것이 어른들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태어나서부터 다섯 살 무렵까지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과 대체적으로 같은 경험을 공유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다섯 살에서 열 살 사이의 시기의 남자아이들은 ‘남자답기 위해’ 여자아이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여자아이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심지어는 혐오감을 드러내도록 학습하게 됩니다. 남자아이들이 미래에 어떤 모습으로 성장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 우리의 딸들을 위해 만들고자 하는 세상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즉 딸들이 평등하게 존중받는 세상에서는 남성들은 매우 친절하며 예의가 바를 것입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남자아이들도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어른들은 그런 감정들을 공유하고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맨박스를 해체하는 작업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저자는 생각합니다. 남성들은 새로운 것을 배울 때 일어나는 인식의 변화 과정을 흥미롭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기득권이라고 생각해온 무엇을 포기하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맨박스 안에서의 삶이 오히려 불편하다고 느끼게 만들려는 노력을 기울여왔다고 합니다. 실제로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남성의 여성폭력과 관계된 사건들을 보면 저자의 말대로 맨박스 안에서의 삶이 혐오스럽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남자다움에 대한 새로운 정의, 즉 새로운 맨박스가 만들어질 날이 올 것으로 굳게 믿고 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오늘날 남자다움의 정의, 즉 맨박스는 세 가지 큰 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인식입니다. 둘째,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라는 인식입니다. 그리고 셋째, 여성은 남성의 성적 도구라는 시각입니다. 이와 같은 인식은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 문화를 조장해온 남성중심주의가 만들어낸 허상으로, 왜곡된 남자다움을 만든 주범인 남성중심주의를 하루 빨리 없애야 할 것입니다.


서구 남성들은 여성을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고 우리는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오히려 서구 남성들은 여성을 소유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결혼식의 한 장면을 예로 들었습니다. 서구화물결을 타고 우리 주변에서도 일상처럼 보는 장면입니다만, 결혼식에서 신부 아버지가 딸의 손을 붙잡고 입장해서는 사위가 될 남성에게 인계하는 것은 딸에 대한 소유권이 이전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결혼한 여성이 처녀 때 성을 버리고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통 혼례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역시 우리네 옛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네 사회에서도 ‘사내 녀석이 그러면 못써!’라는 식으로 사내아이에게 남성성을 세우도록 은연중에 심어왔습니다. 그로 인한 문제점들은 대부분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왔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이 책의 저자 토니 포터와 같은 분들이 많아져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눈치를 보느라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던 남성들이 자발적으로 잘못된 남성적 관행을 고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야 하겠습니다.


저자는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폭력의 뿌리가 닿아 있는 맨박스를 개선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의 변화가 자리 잡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1. 남성 중심주의는 사라져야 합니다, 2. 가정 폭력과 성폭력을 근절하는 노력은 전적으로 남성들의 몫입니다, 3. 폭력과 차별은 종류와 관계없이 사라져야 합니다, 4. 여성들이 내는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5. 여러 억압 행위에는 교차점이 존재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6. 지역 사회에 기반을 둔 참여를 유도해야 합니다, 7. 남성 스스로 남성에 대한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저자는 ‘사회에 자리 잡은 남자다움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남성들이 이끄는 여성 폭력 방지 운동을 만들어내려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성들이 처한 현실을 이해하며 존중하는 동시에 남성들에게 진심 어린 애정과 희망을 가지고 활동을 이어나가려 한다고 고백합니다.


저자 토니 포터와 함께 ACTM (A Call To Men)을 창설한 테드 번치는 가정 폭력 대응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 프로그램은 법원의 명령으로 26주에 걸쳐 상습 폭력방치 치료를 받는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토니와 만난 테드는 가정 폭력, 성폭력, 성매매 그리고 여성을 향한 다양한 학대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남성들의 참여가 필요하다는데 인식을 같이 하고, ACTM 활동의 토대가 될 이론을 세우고 이의 확산을 위하여 노력해왔다고 합니다. 초기 ACTM활동은 방관자적 태도를 개선하는데 중점을 두었지만, 점차 남성성의 모든 면을 다루게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모든 남성들과 남자아이들이 다정하고 정중하며, 모든 여성들과 여자아이들이 소중하고 안전하게 대우받는 세상을 만들 수 있도록 남성성을 진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이론으로 발전시킨 것입니다. 여성의 진정한 해방은 남성들이 전통적인 맨박스에서 해방되는 것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동의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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