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대륙, 아메리카 - 콜럼버스 이후 정복과 저항의 아메리카 원주민 500년사
로널드 라이트 지음, 안병국 옮김 / 이론과실천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어렸을 때 인디언과 미국 기병대가 싸우는 영화를 보다가 기병대가 인디언을 물리치면 박수를 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저 기병대가 주인공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 땅의 주인은 인디언이었던 것입니다. 아메리카대륙의 주인의 역사는 어디로 가고 이주민의 역사만 남아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마치 살고 있던 땅을 순순히 내준 것처럼 포장된 역사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아메리카대륙을 처음 발견한 콜럼버스가 인도로 착각한데서 나온 말이니 ‘인디언’이라는 말도 틀린 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저는 ‘인디언’이란 말이 딱 질색이에요. (…) ‘인디언’은 백인들의 상상의 산물일 따름입니다.”라고 한 캐나다 오지브와족 출신 여류작가 리노아 카식-토비어스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문화가 다양해서 여러 문화권을 이루고 있는데 ‘인디언’이라는 단어 하나로 싸잡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어떻게 부르던 간에 우리는 아메리카 원주민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고고학자들이나 유전학자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이 15,000~30,000년 전에 베링해를 건너왔다고 믿고 있습니다만, 하지만 원주민들은 자신의 조상은 처음부터 그곳에서 살아왔다고 믿고 있습니다. 문명사적으로도 이들이 태곳적부터 이곳에서 살아왔고, 자신의 언어와 문화, 문명을 꽃피웠기 때문에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아메리카인이라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지금의 아메리카문명은 그저 유럽문명의 아류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번 주에 소개드리는 <빼앗긴 대륙, 아메리카>는 지금까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아메리카대륙의 원주민 시각에서 본 근현대사를 정리합니다. 특히 콜럼버스 이후 유럽 이주민의 침략에 맞선 아메리카 원주민이 어떻게 저항을 해왔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저항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점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빼앗긴 대륙, 아메리카>를 쓴 로널드 라이트는 영국 태생의 역사가, 고고학자, 문명비평가이며 베스트셀러 작가입니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과 캐나다 캘거리 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하였고, 평생 아메리카 원주민의 문명과 역사를 연구해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재야 사학자인 셈인가요? 그는 특히 서구 문명의 한계를 성찰하여, 서구 문명 중심의 해석을 경계해왔습니다.


저자는 남북 아메리카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원주민들의 문명 가운데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주목할 만한 다섯 문명을 골라, 유럽 이주민들의 침략기, 이에 대한 원주민들의 저항기, 그리고 현대에 들어서 힘을 받고 있는 부활의 움직임을 각각 설명합니다. 그 다섯 문명으로는 메소아메리카의 아스테카와 마야, 남아메리카의 잉카, 그리고 북아메리카의 체로키와 이로쿼이입니다. 사실 이들 이외에도 파라과이의 과라니족, 칠레의 마푸체족, 브라질의 야노마미족, 북아메리카의 나바호족과 블랙풋족, 니카라과의 미스키토족 등도 포함해야 할 것입니다.


아메리카대륙에 유럽 이주민이 침략해온 시기를 다룬 ‘침략’에만 ‘발견’이라는 제목의 프롤로그가 붙어 있습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하기 이전의 아메리카를 설명하기 위해서라고 보입니다. 1492년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는 재앙이 된 사건, 콜럼버스의 ‘아메리카대륙 발견’-본디 있던 것을 발견이라고 하는 것이 우스운 이야기라는 생각도 듭니다만-이 있기 전에,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북극의 툰드라 지역에서부터 중앙아메리카의 카리브해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저 높은 안데스 산맥에서부터 남아메리카 남단의 케이프 혼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면 어디나 다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지역에 따라 다양한 사회상을 보이고 있었는데 수렵 유목 사회도 있었고, 농경 정착 사회도 있었으며, 커다란 도시를 이룬 도시 문명사회도 있었습니다. 당시 아메리카 원주민의 인구는 자그마치 1억 명으로 전체 세계인구의 20%를 차지할 정도였지만, 콜럼버스 출현 이후 불과 수십 년 만에 몰살을 당하다시피 했습니다. 침략자들의 학살과 탄압, 그리고 그들이 가져온 전염병이 원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홀홀단신으로 건너온 이주민 남성들이 원주민 여성들을 취하거나, 급감한 원주민을 대신할 노동력으로 끌어들인 아프리카계 사람들까지 가세하여 원주민의 혈통을 희석시킨 것도 순수 원주민의 인구를 격감시키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주민들의 혈통은 끈질기게 이어져, 안데스지역에는 잉카어를 사용하는 원주민이 1,200만 명이 살고 있고, 메소아메리카에도 마야어를 사용하는 원주민이 600만 명에 이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테말라 같은 경우는 마야 원주민이 과반을 차지하고 있어 마야 공화국이 성립되어야 할 정도라고 합니다. 또한 또 1980년 페루에서는 좌익 게릴라가 무장 투쟁을 벌인바 있으며, 1990년 캐나다에서는 모호크족이 무장봉기를 일으켜 ‘미국에도 캐나다에도 넘긴 적이 없는 우리의 주권을 내놓으라!’라고 요구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목소리는 허공에 흩어진 메아리가 되고 있습니다. 무려 500년 동안 미국 정착민들은 물론 세계인들까지도 모른 척 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흰 얼굴의 신(神)’이라는 개념 역시 허구적이라는 것입니다. 이주민들의 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담긴 왜곡이라는 것입니다. 유카탄 원주민들 사이에 내려오는 케찰코아틀 신화입니다. 아즈텍사람들은 풍요와 평화의 신으로 알려진 케찰코아틀신이 전쟁의 신의 음모로 쫓겨나고 말았지만 언젠가는 하얀 얼굴을 하고 돌아온다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즈텍사람들은 코르테스를 처음 만났을 때, 다시 온 케찰코아틀로 착각하였기에 적극적인 저항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근래 읽은 원주민 시각에서 쓴 자료들을 읽어보면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천성적으로 외부에서 온 손님에게 관대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 손님이 음흉한 속셈을 감추고 있더라도 말입니다. 아즈텍과 마야에 대한 스페인의 침략과정에 관하여 원주민들이 남긴 기록들이 최근에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미겔 레온-포르티야가 쓴 <정복당한 자의 시선; http://blog.joins.com/yang412/14018447> 같은 번역서도 있고, 정혜주교수가 쓴 <마야원주민의 전쟁과 평화; http://blog.joins.com/yang412/13747676> 처럼 우리나라의 라틴아메리카 전문가가 쓴 책도 있습니다.


스페인이 아메리카로 몰려간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중동지방에서 압바스왕조에 무너진 우마이야왕조의 아브드 알 라흐만이 이베리아 반도로 도망가 756년에 코르도바를 수도로 후기 우마이야왕조를 세우고 이베리아반도를 모두 차지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이베리아반도에 흩어져 있던 스페인 왕국들은 1492년 아라곤의 페르난도2세와 이사벨1세 여왕의 가톨릭연합군이 그라나다의 나스르왕국을 멸망시킬 때까지 국토회복을 위하여 매진했던 것입니다. 국토통일을 이룬 다음에는 군사들을 토사구팽을 할 수 없었으니 새로운 목표를 내놓아야 했습니다. 마침 콜럼버스가 동양으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겠다고 나섰던 것이 성공을 거두었고, 전후 할 일이 없어진 병사들은 새로운 먹을거리를 찾아 아메리카로 향했던 것입니다. 침략과정에서 다른 종교, 문화를 포용하는 능력이 없었던 스페인사람들은 아메리카 사람들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노예로 부려 부를 축적했으며, 오랜 세월 그들이 쌓아올린 문명을 말살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메소아메리카의 지형적 특성으로 침략자의 손길을 피한 일부 유적들이 살아남아 지금 우리를 맞아주고 있는 것입니다.


스페인 사람들이 침입해올 당시에도 그들의 정체를 알게 된 원주민들이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원주민들이 침략자를 궤멸시켰을 때 마침 새로운 지원군이 도착하는 등, 행운의 여신은 침략자의 편이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침략자들이 가지고 온 전염병 때문에 전력이 무너진 원주민들은 결국 무릎을 꿇어야 했던 것입니다. 일설에는 천연두 환자가 사용하던 물건을 생물학무기로 사용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라틴 아메리카를 식민지화한 스페인은 원주민들을 노예처럼 부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원주민의 숫자가 급감하자 아프리카 원주민을 끌고 와 노예로 삼았습니다. 저자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기록을 두루 섭렵하여 이들의 저항을 상세하게 정리해서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북아메리카에서의 침략은 라틴아메리카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북아메리카의 원주민들 역시 이주민들을 따듯하게 맞아 정착을 지원해주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이주민들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면서 이주민들과 원주민들 사이에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주민들은 원주민들의 땅을 야금야금 차지하면서 원주민들을 고향에서 몰아냈던 것입니다. 원주민들 모르게 법을 만들고 이주를 강요하는가 하면 협상을 통하여 어르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막무가내로 원주민들을 척박한 땅으로 몰아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새로운 부가가치가 생기면 다시 그 땅을 차지하는 수법을 썼던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이주민들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원주민들 집단 사이의 이해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의견이 통일되지 않도록 하는 이간책이 통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식민지화되었다고는 하지만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원주민들의 반란이 꾸준하게 이어졌습니다. 불행하게도 반란은 성공하지 못하고 진압되곤 하였습니다. 19세기 라틴아메리카가 스페인과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을 이룬 다음에는 백인 정착민의 주도로 근대국가를 수립하였지만, 원주민들의 권리는 보장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많이 호전되어 가고 있다고 합니다. 멕시코에서는 원주민 출신의 베니토 파블로 후아레스 가르시아 (Benito Pablo Juárez García, 1806년 3월 21일 ~ 1872년 7월 18일)가 1857년부터 1872년까지 대통령을 지냈습니다. 그는 멕시코사회를 정상화하기 위하여 교회와 토지귀족이 독점하고 있는 독점경제를 자본주의로 대체하는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였습니다. 국민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고, 가톨릭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는 등 토지개혁을 시도하다가 교회와 지주의 반발로 내란을 겪기도 했습니다.


유카탄반도의 마야는 반란에 성공하여 자유국을 이루어 20세기까지 존립하였습니다. 과테말라에서도 정부군과 원주민 세력 사이에 오랜 기간 내전(1963~1996)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북아메리카의 체로키족은 일부 오클라호마로 이주하였지만, 일부는 그레이트스모키 산맥에 그대로 잔류하여 ‘동부 체로키 보호구역’을 만들어 권리를 인정받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으며, 서부 체로키족 역시 자치정부를 재건하고 대추장을 선출하였다고 합니다. 북동부에 거주하는 이로쿼이 연방의 모호크족은 1972년 전사단을 결성하고 영토를 빼앗으려는 캐나다 정부에 맞서 저항했다는 것입니다.


마야인들의 달력에 따르면 이민족의 지배는 예정된 것이었으며, 운명의 바퀴가 열세 번을 꽉 채우면 끝날 것이라고 전해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스페인이 유카탄반도를 지배한 기간과 거의 정확하게 일치했다고 합니다. 이제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원주민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그들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고 합니다. 정리해보면 아메리카 대륙은 원주민들의 것이었으며, 지금도 그들의 권리가 인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 그들을 응원하는 것이 옳다고 하겠습니다.


조금 아쉬운 점은 서로 직접 연결되지 않는 다섯 부족들이 외세의 침략을 받아 저항하고 부활하는 과정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데, 오히려 부족별로 침략과 저항과 부활을 이어서 설명했더라면 읽기에 조금 편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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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역전의 경제학 - 경제학 하수에서 고수로 유쾌한 뒤집기 한판
오영수 지음 / 이담북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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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도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일상이 경제의 개념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고등학교에서 경제에 대한 기본개념은 배운 것 같습니다만, 경제의 개념 자체도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니 따라가기조차 벅찬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부족한 개념으로 정신없이 돌아가는 경제상황을 들여다보려니 헷갈릴 뿐 아니라, 이러다가 뒤처지고 마는 것은 아닌가하는 걱정이 커지게 됩니다. 점점 어렵고 복잡해져가는 경제의 개념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시는 오영수교수님께서 경제학원론을 아주 쉽게 풀어 설명하는 <30일 역전의 경제학>을 읽게 된 것입니다.


저자께서는 경제학 공부를 처음 시작할 무렵 현실과 동떨어진 수업에 실망하셨던 기억을 되살려 경제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물론 고등학생부터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경제의 기초개념을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오셨다고 합니다. 경제학은 단순한 지식에 머무는 학문이 아니라 살아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실용적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설명하는 이 책의 얼개는 이렇습니다. “총 3개의 PART로 나누어져 있으며 한 PART당 10개의 주제로, 총 30개의 주제를 하루에 하나씩 독파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PART 1에서는 수요, 공급, 비용, 유인, 효율성, 공평성 그리고 국민경제의 순환원리 등 경제학의 주요 기초 개념 및 이론을, PART2에서는 주로 시장에 관한 이야기들, 즉 시장의 본질과 기능은 무엇이고 어떤 원리로 작동되는지에 관한 내용을 담았다. PART3에서는 오늘날 우리 시대의 주요 문제와 이슈들을 경제학적 관점에서 통찰함으로써 사회 문제 전반에 대한 안목을 키울 수 있는 내용들로 구성하였다. 여기서는 환경오염, 결혼, 범죄, 교육, 외모, 실업, 빚 등 다양한 주제들을 경제학의 창을 통해 분석하고 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교수님 말씀대로 정말 쉽습니다. 어렵게만 느껴지던 경제학의 개념들이 머리에 쏙쏙 들어옵니다. 사범대학에서 수업하는 법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경제학을 가르치고 계시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해보았습니다. 물론 쉽게 정리되지 않는 개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은 교수님의 설명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제가 경제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다보니 이해력이 떨어니는 탓일 것 같습니다. 아니면 제가 딴 생각을 하면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 탓일 수도 있겠구요.


예를 들면 한계생산성 체감의 법칙을 설명하는 경우입니다. 자동차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에서 갑자기 주문량이 두 배로 늘면서 납기를 맞추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저자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하였습니다. 첫째, 기존 직원들의 작업시간을 두 배로 늘리던가 직원을 더 채용해서 공장가동율을 높이는 것과 둘째, 아예 생산시설을 두 배로 늘리는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장단기 대책을 내놓은 것인데, 제가 보기에는 이는 별도의 대책이라기보다는 같이 검토해야 할 사항 같습니다. 우선 납기를 맞추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납기를 맞추지 못하면 주문은 취소되고 타격을 입겠지요. 새로 직원을 뽑아도 노동의 효율성이 떨어질테니, 기존 직원들의 작업시간을 두배로 늘리는 방식을 우선 적용할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의 주문은 고객이 만족하게 되는 경우 장기계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시설투자와 함께 직원을 추가로 채용하는 대비책을 준비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을 그리다 보니 두 가지 경우의 생산비용을 더 낮출 수 있는 이유의 설명이 쉽게 이해되지 않은 측면이 있습니다.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인용하는 사례들은 일상이나, 동화, 영화 등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거나 이미 잘 알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더 쉽게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공평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동화 <개미와 배짱이>를 예로 들기도 합니다. 하나 더, 주제와 연관된 제목들도 참 재미있습니다. 참고로 저자께서 고등학생을 독자대상으로 염두에 두신 이유를 대입 논술고사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책 말미에 밝혀두셨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처음에 적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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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 가는 것들에 대하여 - 인생의 끝자락에서 만나게 되는 뜻밖의 행운
윌리엄 이안 밀러 지음, 신예용 옮김 / 레디셋고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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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만든 봉사동아리가 내년이면 벌써 창립 40주년을 맞게 됩니다. 창립기념일, 홈커밍데이, 혹은 진료지에서 만나는 후배들이 동아리가 처음 만들어질 때의 분위기를 제대로 알고 있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동아리의 역사를 정리해보기로 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과거를 돌아보는 일인 듯합니다. 나이가 들어가니 지난 일을 생각해보는 기회가 많아진다는 의미입니다. ‘우아하게 늙어가기’는 제가 오랫동안 꿈꾸고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번 주에는 우아하게 늙어가는 방법을 생각해보는 책을 권해드리려 합니다. 윌리엄 이안 밀러교수의 <잃어가는 것들에 대하여>입니다. 밀러교수는 미시간 법과대학의 교수를 역임하고, 2008년에는 성 앤드류스 대의 카네기 100주년 기념 교수에 임명되었으며, 현재는 같은 대학에서 역사학을 가르치는 명예 교수로도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북유럽 영웅담인 사거(Saga) 연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도 사거의 내용을 자주 인용하고 있습니다.


책장을 열면 헌정사에 이어 셰익스피어의 <태풍>에서 인용한 대사가 충격적으로 다가옵니다. “나이가 들수록 육신은 점점 추해지고, 정신도 부패할 뿐이라네” 우아하게 늙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일찍 깨달은 선지자의 직설적인 경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발전한 현대의학의 힘을 빌어 육신이 추해지는 것은 어느 정도 미룰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정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온전히 개인에 달려있다고 하겠습니다. 밀러교수 역시 나이 들어 잃어가는 것을 다루는 이 책에서 주로 기억력, 작업처리속도, 날카로운 감각, 집중능력과 같은 정신적 능력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오랜 역사와 광범위한 문화 속에서 노인들은 존경보다는 조롱의 대상이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또한 ‘삶이란 웃음거리나 조롱거리가 되지 않고, 멸시를 당하지 않으려는 처절한 투쟁과도 같다(23쪽)’라고 하였습니다. ‘설마’하신다면 저자가 인용한 다음 글을 읽어보시면 이해되실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노인을 경멸하고, 노인 때문에 짜증을 내며, 지루해한다.(22쪽)” 14세기 영국작가 존 트레비스의 논문에 나온 글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래도 밀러교수는 과거의 어느 시기보다도 현재의 우리는(당연히 우리는 노인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라고 말합니다. 노인으로 살기에 좋은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나이가 들면서 겪어야 하는 것들로 공포, 지혜, 불평, 은퇴와 복수와 재산을 하나로 묶었고, 감정 그리고 구원 등 모두 여섯 가지를 들었습니다. 1부 ‘공포’에서는 정신기능이 떨어지는 원인을 설명합니다. 즉 두뇌의 손상에 따라 불안정하게 늙어가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또한 옛날 노인들의 모습을 살펴보는데, 그들의 행적으로부터 칭찬하거나 비난할 면모를 발견하는 동시에 깊은 연대감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2부 ‘지혜’에서는 지혜가 그리 친절하거나 밝지만은 않다는 점과 지혜를 정말 지혜롭게 사용할 경우에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워진다는 점을 역설합니다. 3부 ‘불만’은 불평의 전략에 대하여 논의합니다. 불평이 별무소득으로 끝나면 입만 아픈 셈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당신의 불평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비법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신 역시 불평의 대상에서 빠트리지 않고 있습니다. 4부 ‘은퇴, 복수 그리고 재산’에서는 현재 종사하고 있는 직업에서의 은퇴는 물론 인생에서의 은퇴, 즉 죽음을 앞두고 생각해볼 일들을 정리하였습니다. 재산의 처분에 관한 것에서부터 심지어는 아직도 남은 복수까지도 다루었습니다. 5부 ‘감정’에서는 인생의 마지막 시점에서 살아온 날들을 총괄해서 되돌아보았습니다. 6부 ‘구원’에서 저자는 “당신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인생을 새로 살아 보고 싶은가? 가능하다면 속임수를 써서라도 인생을 새로 산다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선택일까?”라는 질문으로 새로운 기회를 원하는지 묻고 있습니다.


역사, 종교 심지어는 북유럽의 영웅담 사거에 이르기까지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사건 혹은 인물들이 유럽 중심이기 때문에 책읽기가 수월치 않아 인내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첫장 ‘내 눈 속의 내가 현실과 멀어질 때’에서 논의하는 늙었다는 인식이 들었을 때 저자가 취한 전략 같은 경우입니다. 실제보다 더 많이 늙었다고 주장하거나 이미 찾아온 노화를 인정함으로써 나는 더 많이 잃어버리는 사태를 방지하고, 어쩌면 이미 잃어버린 것들을 어느 정도는 되찾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 희생이 마법을 발휘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우리 사회에서 자살하는 노인들이 늘고 있는 것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점에 대하여 저자는 세네카를 인용하여 새로운 시각을 보여줍니다. ‘기본적으로 즐길 수만 있다면 가능한 한 오래 자기 자신과 동행하는 건 즐거운 일이다(83쪽)’라고 전제한 저자는 죽음의 기한이 다가오기 전에 자신의 영혼에게 자유를 허락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비참한 상태로 살아가야 한다는 괴로움은 이제 곧 죽게 되리라는 괴로움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사실 삶을 마치는 방법이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준다면 그 또한 적절하지 않은 일이 될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는 스콧 니어링을 생각합니다. 100세를 산 그는 특별한 질환이 없었지만 품위 있는 죽음을 맞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서 먹이를 거부함으로써 죽음을 맞는 동물처럼 그는 100세 생일을 한 달 앞두고 단식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아내 헬렌 니어링이 그 과정에 함께 하였습니다. 그가 좋아한 ‘기쁘게 살았고, 기쁘게 죽으리. 나는 내 의지로 나를 버리네.’라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말을 실천에 옮긴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 완숙해진다는 ‘지혜’에 대한 저자의 날카로운 비판은 반드시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집중력과 기억력이 떨어지고, 인식능력과 복잡한 문제를 처리하는 정신능력이 줄어드는 것을 보상하기 위하여 합리적 판단을 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지혜라는 설명은 잘못된 것이라고 저자는 잘라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혜에는 다양한 기술이나 입장, 행동이 포함된다고 하였습니다. 금언에 나타나는 지혜는 대체로 영웅적이라기보다는 신중하고, 분별력이 용기를 압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자는 주변에 만연한 사기꾼들과 그들의 거짓말과 속임수를 부단히 경계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혜와 교활함을 구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동년배들과 함께 지나간 시절을 회상하며 추억에 잠기는 것은 진정한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과거를 낭만적으로 치장하여 젊은이들이 지겨울 정도로 반복적으로 되뇌이며 지혜로운 척하는 일이야 말로 해서는 안될 일이다. 문제는 자신도 모르게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는 버릇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기억이 엷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가 요즘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하기 전에 “전에 이야기했는지 모르지만”하면서 분위기를 살피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세 번째 주제는 불평입니다. 사실 살아가면서 불평과 불만을 안으로만 삭이면서 사는 부처님 같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보면 나이가 들어가면서 불평과 불만의 상대가 밖에서 자신에게로 향하는 경향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특히 기독교에서는 노화로 쇠퇴해가는 과정의 미덕은 마음을 영적인 문제에 집중하게 하고, 더 훌륭한 기독교적 죽음을 준비하는데 있는 것으로 본다고 합니다. 즉, 노년기를 속죄의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불평을 받아야 할 빚을 받고,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며, 가지고 있는 것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의 하나라고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가 자신과 동등하지 않은 경우, 예를 들면 왕이나, 군주 심지어는 신이라고 할지라도 불평을 제기하는 기술(?)을 소개합니다. ‘남보다 자신을 낮추는 행위가 상대방을 패배시키거나 당신에게 해야 하는 상대방의 의무를 완수하게 하는 최고의 방법임을 기억하라(201쪽)’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물론 그러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합니다.


네 번째 주제는 ‘은퇴’인데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은퇴는 현직에서 물러나는 것뿐만 아니라 삶에서 물러나는 것, 즉 죽음까지도 포함합니다. 저자는 후자에 더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수와 재산이야기가 따라 붙는 것입니다. 흔히 죽음을 맞을 때는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뒷일을 부탁하게 됩니다. 생을 통하여 이루지 못해 마음에 남는 것, 평생을 통하여 일구어놓은 재산, 심지어는 생전에 당한 부당한 일에 대한 앙갚음, 즉 복수까지도 정리를 잘 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복수에 한 장을 할애한 것은 아무래도 저자의 전공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최근에 본 영화 <리멤버>에서는 아우슈비츠에서 지독하게 괴롭힘을 당한 유대인 생존자가 가해자인 독일군을 끝까지 뒤쫓아 복수의 꿈을 이루는데 자신이 직접 죽여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 중 한 사람이 치매에 걸리자 그를 조종하여 다른 가해자를 죽이도록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이 모두 죽고 복수는 성공했지만, 살인을 교사한 진실도 따라서 묻혔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복수에 대한 그의 집념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습니다. 사실 복수하기 위하여 기다리다 나이가 들게 되면 복수의 기회가 사라지기도 합니다. 몸이 쇠약해져 복수를 실행에 옮기지 못할 수도 있고, 복수의 상대가 당신보다 먼저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은퇴의 의식에는 스스로의 힘으로 복수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까지도 포함할 수 있다고 합니다.


5부의 주제는 ‘감정’입니다. 일종의 죽음을 앞두고 마음을 정리하는 단계에 해당합니다. 저자는 5부의 시작을 “죽은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부족함 없이 살고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희생하고 베풀었으며, 우리는 그들의 재산을 물려받아 쓰고 있다(275쪽)”라고 시작합니다. 요즈음 노년과 청년세대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고들 말합니다. 자기세대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편리함을 누릴 수 없었을 젊은 세대의 반발에 노인들은 섭섭한 감정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선대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던 적이 있는가 돌아볼 일입니다. 나이가 들면 이처럼 죽은 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년층이 보수로 회귀하는 현상에 대하여 특히 젊은이들이 거부감을 느낄 수 있겠지만,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선조들에게 감사하고 그들이 지켜낸 국가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기 마련인 것입니다. 노인들이 소유한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자신의 것이 될 것이므로 지나치게 욕심을 내는 것이 스스로를 망치는 길이라는 점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주제 ‘구원’입니다. 모든 인간은 영생을 꿈꾼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말이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하지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 「죽지 않는 사람」에서 영생을 얻었던 주인공이 천년의 삶을 살다가 결국은 다시 죽는 존재로 돌아간다는 설정을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죽을 운명의 모든 존재들에게는 모든 것이 회복할 수 없고 불안한 가치를 지니는데 반하여, ‘죽지 않는 사람들’에게 각각의 행동은 무한히 반복되는 것입니다. 즉 한계가 있기에 최선을 다하여 불안한 삶을 사게 되는데 반하여 반복되는 일상은 오히려 삶이 느슨하고 지루해질 수도 있습니다. 저자의 말대로 ‘돌이킬 수 없음’이 취약한 한편 완전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노년기의 특권은 삶을 통하여 모든 일을 겪어냈다는 온순한 쾌락의 즐거움에 가까운 감정을 누린다는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장엄하게 물러나 명예로운 죽음을 맞도록 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입니다. 위대한 죽음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를 미리 생각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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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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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hhttp://blog.joins.com/yang412/14060977 >를 통하여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나치가 저지른 만행과 그 과정에서 드러난 인간의 민낯이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고난은 종전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도 충격이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인가>가 부나-모노비츠의 노동수용소에서 종전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를 기록한 것이라고 하면, 그 속편 격인 <휴전>은 부나-모노비츠에서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담았습니다. 그러니까 호메로스의 작품으로 치면, <이것이 인간인가>는 <일리아스>에 해당하며, <휴전>은 오디세이아에 해당된다고 하겠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종전이 되었다면 나치에 의하여 감금된 사람들을 재분류하여 원래 살던 곳으로 돌려보냈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일이 꼬이려니 사진에서 보시는 것처럼 엉뚱한 곳으로 다시 끌려갔다가 9개월이나 되는 세월을 보낸 다음에 겨우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우슈비츠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까지 가면 될 것을 열 두배도 더 되어 봄직한 거리를 돌고 돌아서 간 셈입니다. 저자는 그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습니다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유럽의 공산화를 위한 밑작업의 일환으로 동유럽국가들과 서유럽 국가들 사이의 국경을 통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치의 수용소에 붙들려 있던 사람들은 진주한 러시아군에 의하여 다시 나치가 만든 수용소에 수용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는데, 그 과정을 보면 전후 수습과정을 통제하는 체계가 있었나 싶습니다. 심지어는 종전이 된 뒤에서 나치의 잔당이 러시아군을 공격하는 사태도 있었던 듯합니다. 저자의 기록에서도 그런 상황의 일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4년 동인 전쟁을 하고 승리한 러시아의 붉은 군대 (…) 그들은 조금씩, 천천히, 외관상으로는 극도로 무질서하게 귀환하고 있었다.(241쪽)” 그들에게서는 개선군의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패잔병이라고 해야 할 지경이었던 모양입니다.


어떻든 저자는 동아줄 같은 행운을 타고 났던 모양입니다. 처지가 어려울 때마다 이인을 만나 도움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물론 저자가 이탈리아어 외에도 독일어와 라틴어를 할 수 있다는 점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무언가 남다른 재주가 하나쯤 있어야 어려운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하여 저자를 비롯하여 주변 사람들은 정상적이지 않은 행동도 불사했다는 것을 탓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거짓말과 도둑질은 기본이고, 불법 상인이나 밀수꾼 노릇까지도 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런 짓을 하면서도 죄책감을 느꼈다는 기록은 볼 수 없습니다. 아마도 생존의 문제였기 때문에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도 무형의 위협에 대한 불안감 같은 것으로 고통받았음을 고백합니다. ‘나만 홀로, 온통 잿빛의, 무감각한 무(無)의 한가운데 있다. 그리고 이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안다. (…) 내가 다시 라거 안에 있고, 라거 밖에 있는 그 무엇도 진짜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나머지는, 가족과 꽃이 핀 자연과 집은 짧은 휴가 또는 감각들의 속임수, 곧 꿈이었다.(328쪽)’ 저자는 고향으로 돌아와서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를 앓았던 것인데, 당시만에서 의학적으로 주목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인가>는 고향으로 돌아와 바로 집필하였던 것과는 달리, <휴전>은 작가로서 성공을 거둔 1962년에 초고를 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인가>가 겪은 일을 담담하게 기술하는 일기형식이었다고 하면, <휴전>은 문학적인 면을 충분히 고려하였다고 합니다. 옮긴이를 힘들게 했던 부분 가운데, 독일어, 불어, 라틴어, 폴란드어, 러시아어, 이디시어까지 다양한 외국어를 구사하여 현장감을 높이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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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는 걱정 따위 - 당신의 걱정이 실제로 일어날 확률은 얼마일까?
시마자키 칸 지음, SUBSUB 그림, 전선영 옮김 / 한빛비즈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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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 경주에서 일어난 지진 때문에 온 나라가 떠들썩한 것 같습니다. 지진이 일어난 시간에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서울에 살고 있는 저는 지진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제가 둔감한 편인가 봅니다. 이번 지진은 지진감시가 시작된 이후로 가장 강력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가끔 일어나기도 합니다만, 깊은 곳에서 생기거나, 강도가 낮은 탓인지 주의를 끌지 못해온 것도 사실입니다. 지진을 걱정하면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핀잔을 받는 분위기(?)도 없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우리 국민들이 2008년에는 미국산 쇠고기 때문에 온 국민이 금방 인간광우병에 걸려 몰살할 것 같은 분위기였던 것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당시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나서서 위험을 부풀리기까지 했으니 사람들이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저는 광우병의 위험이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하는 편이었습니다만, 사람들에게 그런 점을 설명하는 것이 참 쉽지 않다는 점을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소개드리는 <쓸데없는 걱정 따위>를 그때 읽었더라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일본에서 리스크 심리학을 전공한 시마자키 칸이 쓴 이 책은 인간의 심리와 리스크 관리를 연결하여 ‘아주’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문적인 개념을 이렇게 쉽게 풀어내는 것도 참 재주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리스크란 ‘미래에 어떤 불행한 사건이 일어날지 모를 가능성(5쪽)’이라고 정의합니다. 저자는 책머리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실제 확률’과 우리가 하는 ‘걱정’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9쪽)‘라고 했습니다. 실제로는 거의 위험하지 않은데도 지나치게 걱정하면 정신적으로 힘들어진다는 것입니다. 2008년 광우병사태도 지나보니 위험이 거의 없다는 것이 밝혀지지 않았습니까? 걱정도 팔자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것만큼 손해나는 일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자가 이야기하는대로 ’걱정‘의 정도는 ’실제 확률‘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습니다.


모두 여섯 개로 구분해놓은 걱정에 관한 진실을 통계학적 기법을 바탕으로 설명하는데, 큰 제목을 보면 1부 어차피 일어날 일을 왜 걱정할까, 2부 옆 사람과 자신을 비교해 우울해지지 않는 방법, 3부 바퀴벌레에게 죽은 사람이 없는데 왜 무서워할까, 4부 비관적일수록 안도하게 된다, 5부 실전! 걱정계산학 강좌, 6부 적당히 걱정하면서 살아가기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걱정의 본질을 꿰고, 적당하게 걱정하면서 사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입니다.


기억할만한 구절을 들어보면, 앞서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과학자, 즉 전문가라는 사람도 완전히 믿을 것이 못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과학자도 인간인 만큼 돈이라든가, 정치적 야심이라든가 하는 사심(私心)이 개입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전문가의 주장이 대립되는 경우에는 한편의 주장에만 몰입하지 말고 양쪽 의견을 중립적으로 판단해보아야 합니다. 리스크관리에 투입되는 비용에 관한 이야기도 주목해야 합니다. 광우병파동 당시 야당국회의원은 광우병의 위험을 0의 수순에서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떠한 리스크도 0의 수준에서 관리하려면 천문학적인 돈이 투입되어야 한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리스크관리란 위험과 편익을 고려하여 적절한 수준에서 관리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책에 담긴 저자의 설명이 모두 타당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일본 뇌염에 대한 예방접종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설명가운데 예방접종을 하지 않았을 때 일본뇌염에 걸릴 가능성을 계산하면서 옛날 통계를 이용한 것과 최근에는 일본뇌염바이러스가 증식되는 중간숙주 돼지에 일본뇌염 백신을 접종하고 있다는 점이 빠트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광우병의 위험에 관한 저자의 설명은 참 쉽게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정리하고 있는 걱정거리를 피하는 구체적 방법은 잘 기억해두었다가 몸에 배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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