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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0년 9월
평점 :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hhttp://blog.joins.com/yang412/14060977 >를 통하여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나치가 저지른 만행과 그 과정에서 드러난 인간의 민낯이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고난은 종전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도 충격이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인가>가 부나-모노비츠의 노동수용소에서 종전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를 기록한 것이라고 하면, 그 속편 격인 <휴전>은 부나-모노비츠에서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담았습니다. 그러니까 호메로스의 작품으로 치면, <이것이 인간인가>는 <일리아스>에 해당하며, <휴전>은 오디세이아에 해당된다고 하겠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종전이 되었다면 나치에 의하여 감금된 사람들을 재분류하여 원래 살던 곳으로 돌려보냈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일이 꼬이려니 사진에서 보시는 것처럼 엉뚱한 곳으로 다시 끌려갔다가 9개월이나 되는 세월을 보낸 다음에 겨우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우슈비츠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까지 가면 될 것을 열 두배도 더 되어 봄직한 거리를 돌고 돌아서 간 셈입니다. 저자는 그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습니다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유럽의 공산화를 위한 밑작업의 일환으로 동유럽국가들과 서유럽 국가들 사이의 국경을 통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치의 수용소에 붙들려 있던 사람들은 진주한 러시아군에 의하여 다시 나치가 만든 수용소에 수용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는데, 그 과정을 보면 전후 수습과정을 통제하는 체계가 있었나 싶습니다. 심지어는 종전이 된 뒤에서 나치의 잔당이 러시아군을 공격하는 사태도 있었던 듯합니다. 저자의 기록에서도 그런 상황의 일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4년 동인 전쟁을 하고 승리한 러시아의 붉은 군대 (…) 그들은 조금씩, 천천히, 외관상으로는 극도로 무질서하게 귀환하고 있었다.(241쪽)” 그들에게서는 개선군의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패잔병이라고 해야 할 지경이었던 모양입니다.
어떻든 저자는 동아줄 같은 행운을 타고 났던 모양입니다. 처지가 어려울 때마다 이인을 만나 도움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물론 저자가 이탈리아어 외에도 독일어와 라틴어를 할 수 있다는 점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무언가 남다른 재주가 하나쯤 있어야 어려운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하여 저자를 비롯하여 주변 사람들은 정상적이지 않은 행동도 불사했다는 것을 탓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거짓말과 도둑질은 기본이고, 불법 상인이나 밀수꾼 노릇까지도 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런 짓을 하면서도 죄책감을 느꼈다는 기록은 볼 수 없습니다. 아마도 생존의 문제였기 때문에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도 무형의 위협에 대한 불안감 같은 것으로 고통받았음을 고백합니다. ‘나만 홀로, 온통 잿빛의, 무감각한 무(無)의 한가운데 있다. 그리고 이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안다. (…) 내가 다시 라거 안에 있고, 라거 밖에 있는 그 무엇도 진짜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나머지는, 가족과 꽃이 핀 자연과 집은 짧은 휴가 또는 감각들의 속임수, 곧 꿈이었다.(328쪽)’ 저자는 고향으로 돌아와서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를 앓았던 것인데, 당시만에서 의학적으로 주목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인가>는 고향으로 돌아와 바로 집필하였던 것과는 달리, <휴전>은 작가로서 성공을 거둔 1962년에 초고를 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인가>가 겪은 일을 담담하게 기술하는 일기형식이었다고 하면, <휴전>은 문학적인 면을 충분히 고려하였다고 합니다. 옮긴이를 힘들게 했던 부분 가운데, 독일어, 불어, 라틴어, 폴란드어, 러시아어, 이디시어까지 다양한 외국어를 구사하여 현장감을 높이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