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븐 바투타 여행기 1
이븐 바투타 지음, 정수일 역주 / 창비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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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이븐 바투타 여행기>를 읽었습니다. 특히 이슬람이 지배하던 지역에 대한 글에서 자주 인용되기 때문에 꼭 읽어보고 싶었던 책이라서 무리를 했습니다. 이 책을 옮긴 정수일교수의 서문에서 보면, <이븐 바투타 여행기>는 중세 모로코 출신 여행가 이븐 바투타가 30년간(1325.6.14~1354.1)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등 3대륙에 걸쳐 10만km를 두루 돌아본 것들을 적은 견문록입니다. 당시 모로코를 지배하던 마리니야조 술탄 아부 아난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이븐 바투타에게 여행기를 집필하도록 유시를 내렸고, 바투타는 2년에 걸쳐 여행기를 완성하였다. 술탄은 당대의 명문장 이븐 주자이 알 카비에게 ‘가급적 언사를 다듬고 윤색하여 그 뜻을 명확히 살리라’라는 교지를 내렸고, 이븐 주자이는 다시 3개월에 걸쳐 요약하였다고 합니다. 불행하게도 바투타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지만, 이븐 주자이의 요약본이라도 전하는 것은 천만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1997년 미국의 시사주간지 <라이프>는 인류의 지난 천년을 만든 위인 100명을 선정하였는데, 그 가운데 여행가로는 마르코 폴로와 이븐 바투타, 2명의 이름이 올라있다고 합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http://blog.joins.com/yang412/15002269>을 읽었습니다만, 리뷰 제목을 ‘믿거나 말거나?’로 정한 것을 보면 미심쩍은 무엇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븐 바투타 여행기>에서도 수없이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이나 지명 등을 어떻게 기억해서 기록으로 남겼을까하는 의문은 남습니다만, <동방견문록>의 천편일률적인 기록보다는 신뢰할 수 있겠다 싶습니다.


바투타는 명문가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은 샤이흐이자 법관으로 약관 22살에 여행에 나섰음에도 그의 신분 덕에 여행지 곳곳에서 그에 걸맞는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이슬람세계는 풍요를 구가하던 시절로 ‘베품’이 최대의 미덕이 되었던 것도 그의 여행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여행길에 오른 동기는 무슬림의 종교적 의무 가운데 하나인 메카 성지순례를 겸해서 이슬람세계에 대한 지식을 탐구하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의 발길을 멀리 인도에까지 이르러 이슬람의 명소와 유명인을 만나기에 이르렀고, 해당지역에서의 이슬람문명의 모습을 기록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카스피해 북부, 인도, 중국, 아프리카 내륙 등 이슬람이 아직 전해지지 않은 이교도지역까지도 두루 방문하고 그 지역의 세시풍습을 기록하여 진정한 여행가로서의 사명을 다했다고 하겠습니다.


정수일 역 <이븐 바투타 여행기>를 읽는데 있어 두 가지 어려움이 있었는데, 하나는 알라는 물론 이슬람 성인을 언급할 때는 그에 걸맞는 존경의 표시를 적어야 했던 것이 당시 이슬람 저술의 일반적인 원칙이었던 모양인데, 오늘날의 독자에게는 책 읽는 흐름을 깨트리는 것이 아쉽다. 두 번째는 어려운 중세 아랍어를 우리말로 옮긴이가 중국에서 성장하였던 배경 때문인지 전반적인 문체가 상당히 고답적인 탓에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임머신을 타고 바투타와 함께 이국적이면서도 동시에 옛날의 세시풍습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한 책읽기였습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알렉산드리아의 파루스 등대에 대하여 상세한 기록을 남긴 것을 읽으면서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부러우면 지는 것이라는 우리네 속어가 생각이 났습니다.


지금처럼 자동차나 비행기와 같이 짧은 시간에 이동할 수 있는 교통수단이 없을 때이니 낙타 혹은 말을 이용하거나 걸어서 이동하였을 터이고, 질병과 강도 등 여행길을 위협하는 요소들이 차고 넘쳤을 터임에도 불구하고 30년간의 여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바투타의 명줄이 그만큼 길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알라를 향한 그의 신심이 돈독했던 것이 크게 기여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바투타 역시 방문지에서 뿌리를 내릴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 터이나 적당한 시점에 이를 뿌리치고 다음 여행지로 향한 것은 아마도 미지의 세계에 대한 그의 호기심이 더 강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의 도전정신에 찬사를 보내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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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책 읽는 시간 - 무엇으로도 위로받지 못할 때
니나 상코비치 지음, 김병화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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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그 느낌을 글로 정리하기를 본격적으로 하게 된지가 벌써 10년을 훌쩍 넘어가고 있습니다. 첫해에는 60권을 읽었지만, 일이 바빴는데, 27권, 32권으로 저조했던 책읽기가 5년 뒤에는 한해 200권을 넘기고부터는 꾸준하게 그 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한해 300권을 넘긴 적도 있는데, 그 해 한 일이라고는 책읽기밖에 없었던 느낌이 들어 수위를 조절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루 한권의 책을 읽고 그 느낌을 정리하는 ‘365프로젝트’를 수행했다는 <혼자 책 읽는 시간>을 읽고는 저도 도전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혼자 책 읽는 시간>은 단순하게 책을 읽고 그 느낌을 정리했다는 수준의 책이 아닙니다. 책읽기를 통하여 자신을 다잡을 수 있었던 일종의 자기회복의 책읽기의 전형을 보여준 셈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40대 중반에 사랑하는 언니가 죽자 상실감으로 3년을 방황하였다는 것인데, 언니가 세상을 떠난 나이에 이른 어느 날 400쪽이 넘는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하루 만에 독파한 것을 계기로 ‘하루 한 권의 책읽기’에 나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언니의 죽음은 저자에게 ‘나는 왜 살아갈 자격을 가졌는가?’라는 의문을 던졌다고 했습니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을 저자는 ‘달아나기’라고 했고, 이제 ‘달아나기를 멈추어야 했다’라고 말합니다. 언니와 공유했던 웃음, 말, 책을 떠올리면서 책읽기에 몰입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녀는 평생을 통하여 책을 읽고 지혜와 구원을 얻고 도피도 했다고 고백합니다. 마흔여섯 살 생일에 시작한 ‘하루 한 권의 책읽기’ 프로젝트를 계획하면서 만든 원칙이 몇 가지 있다고 했습니다. 첫날 읽은 책의 서평을 다음날 쓰고, 또 새로운 책을 읽는 것입니다. 어느 저자의 책도 한 권 이상은 읽지 않는다는 원칙도 있고, 이미 읽은 책은 읽지 않는다, 읽은 책에 대해서는 모두 서평을 쓴다 등의 원칙도 있습니다. 가급적이면 언니가 함께 읽을 만한 책이 좋겠다는 원칙도 세웠는데, 이는 함께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서라고 했습니다.


<혼자 책 읽는 시간>은 그렇게 시작한 책읽기를 정리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언니와 함께 한 시간들을 정리하고 언니의 죽음으로 인하여 겪게 된 지독한 방황으로부터 제자리를 찾는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어렸을 적 언니와 함께 책을 고르러 가던 일부터 성장하면서 겪은 사랑과 이별 그리고 지금의 남편을 만나기까지는 물론 폴란드에서 이주한 아버지가 겪었던 끔찍한 사건들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되돌아보면서 짚어낸 삶의 궤적들을 책읽기를 통해서 만난 주인공들과 잘 버무려내고 있습니다. 이 책은 그녀의 삶에 대한 회고인 한편, 읽은 책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책 읽는 방법, 혹은 이유로서 새롭다는 생각과 함께 새로운 형식의 자서전이라고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한번 시도해볼만한 가치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하루 한 권의 책읽기’는 “뒷마당의 쓰레기를 치우는 힘든 작업처럼 내 두뇌를 청소하는 작업이었다(189쪽)”라고 다소 시니컬하게 비유하기도 했습니다만, 저자는 스스로의 삶에 대한 회고와 서평을 단락이 따로 놀지 않게 잘 연결하고 있습니다. 역시 서평쓰기는 좋은 글쓰기 훈련이라는 평소 저의 생각을 증명하는 것 같습니다. 워낙이 많은 책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는 제가 아는 책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책들이 훨씬 더 많아서인지 저자의 느낌이 바로 와 닿지는 않았기에 국내에 소개된 책들 가운데 읽어보고 싶은 책도 많았던 것도 이 책을 읽으면서 얻은 수확이랄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읽는 슬픔을 치료해줄 수 있는 약은 없다는 저자의 생각에 공감합니다. 슬픔은 질병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물론 슬픔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살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에도 공감합니다.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분들이 이 책을 읽고 힘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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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죽을지도 모르는 아기를 낳기로 결심했습니다 - 아기의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선택의 시간, 4주 반
콘스탄체 보그 지음, 민세리 옮김 / 예담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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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 때, 대뇌의 대부분이 없는 무뇌증 아이를 제왕절개로 분만하는 수술을 보조한 적이 있습니다. 산모의 안전을 고려한 수술이었습니다. 수술로 태어난 아이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없습니다만, 숨을 쉬고 심장이 뛰는데 필요한 뇌줄기 부분만 있는 아이가 오래 생존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는 산전진찰을 받지 않는 산모들도 적지 않아서 분만에 임박해서야 태아가 무뇌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초음파기기와 검사시약의 발전으로 신체적 장애는 물론이고 기능적 장애까지도 임신 중에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100퍼센트의 확률로 미리 맞출 수는 없습니다. 장애가 있다고 했지만, 막상 출산을 해보니 문제가 없는 경우도 있고, 문제없다고 했는데 장애가 발견되기도 합니다. 임신 초기에는 더욱 판단이 어려운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신체적, 기능적 장애의 가능성이 크다는 검사결과를 받아들게 된 부모들은 대체로 임신중절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은 듯합니다.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우는 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는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재정적인 이유, 다른 사람들의 시선, 결국은 아이의 죽음이라는 고통스러운 이별 등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죽을지도 모르는 아기를 낳기로 결심했습니다>는 그와 같은 고통을 모두 감수해낸 젊은 부모의 감동을 담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결심을 한 사람도 드물지는 않은 듯, 예전에 다운 증후군을 가진 아이를 임신한 젊은 부부가 결국은 출산을 결심한 이야기를 담은 <아담을 기다리며>를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는 죽을지도 모르는 아기를 낳기로 결심했습니다>를 읽다보면 주인공 콘스탄체의 결심에 대하여 양가적인 감정이 교차하는 것을 느끼면서 마지막 장을 덮고서도 여전히 어느 쪽이 우세한지 분명치 않습니다. 양가적인 감정이란 ‘출산 후 불과 2시간 생존한 아이를 낳은 것은 참 잘한 것이다, 반대로 임신 14주째 산전진찰에서 후뇌 두류(두개골 뒤쪽에 결손이 생겨서 대뇌와 소뇌의 일부가 두개골 밖으로 튀어나오는 선천성 기형)가 발견되었을 때 임신중절을 선택하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말합니다.


당사자인 콘스탄체와 그녀의 남편 티보로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으로 충격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여늬 부모처럼 쉽게 임신중절을 선택하지 않고 결정을 할 수 있는 여유의 시간, 4주에 걸쳐 고민을 거듭한 끝에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결정을 하는 동안 참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는데, 특히 출산을 격려하는 사람들이 주로 많았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녀와 남편은 임신중절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왜 나에게 이런 불행이 닥쳤을까 하는데 대한 충격에서 헤어나는데 시간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임신을 이어가는 쪽 사람들의 조언만을 주로 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의 남동생도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은 아닐까 싶습니다.


종교적, 윤리적 관점에서 보면 임신을 유지하여 천명에 맡기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지만, 의학적 사회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인공중절에 무게를 두게 되는 것 같습니다. 콘스탄체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것도, 모든 것은 하느님이 주관한다는 종교적 사고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점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안타까운 점은 고통의 순간들이 지난 다음에 그녀의 결정에 공감하지 못했던 친구들을 모두 정리했다는 저자에게서 편향된 사고를 가진 것은 아니었던가 싶기도 합니다. 어려운 결정을 해야만 할 때, 판단해야 하는 여러 요소들의 목록을 만들고 그 목록들의 무게를 따져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경우라면 ‘임신중절을 받는다’와 ‘임신을 유지한다’가 될 것인데, 콘스탄체와 티보 역시 그런 작업을 했지만, 깊은 고민을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 저자가 저에게 자문을 구했더라면 임신중절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친구목록에서 지워졌겠지요. 그녀의 결정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반면에 꼭 그렇게 해야했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죽을지도 모르는 아기가 아니라 살아서 태어날 가능성이 희박한 아이라면 말입니다.


-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을 읽고 작성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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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결정 - 행복하고 존엄한 삶은 내가 결정하는 삶이다 ㅣ 일상인문학 5
페터 비에리 지음, 문항심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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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 http://blog.joins.com/yang412/13549241>를 읽을 때 가졌던 의문이 파스칼 메르시어를 소설의 필명으로 쓰고 있는 페터 비에리의 <삶의 격; http://blog.joins.com/yang412/13861053>, 그리고 이번에 읽은 <자기결정>에 읽으면서 조금씩 풀려가는 느낌이 들고 있습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인 58세의 고전문헌학 교수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교수는 독자입장에서 보면 일탈처럼 보이는 행동을 합니다. 수업 중에 학생들을 교실에 남겨둔채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주인공의 행동은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장악해야 한다는 작가적 인식이 반영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을 적어두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삶의 격>에서 저자는 ‘삶의 형태로서의 존엄성’을 다루었던 것인데, <자기결정>에서는 ‘존엄성을 지키며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모든 결정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자기 결정’의 철학을 담았습니다. <자기결정>은 2011년 오스트리아의 그라츠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주제로 열린 3일간의 강연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강연 순서에 따라 자기 결정의 삶이 무엇인지, 자기 결정을 위한 전제가 되는 자기 인식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문화적 정체성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지에 관하여 ‘쉽고 친근하게 이야기’한다고 하였습니다만,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독자의 입장에서는 결코 쉽지만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장을 넘기기 전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기를 몇 차례나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삶의 격>에서 자아와 타인 사이의 관계가 존엄한 삶을 규정했던 것을 이어받은 ‘자기 결정의 삶’의 성격을 다시 규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아가) 강물에 휩쓸려가는 모래알 같은 존재로 전락’하거나, ‘(내가) 타인의 도구나, 장난감, 일종의 꼭두각시가 되는 것’을 경계합니다. 강의 제목을 ‘자기 결정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자기 인식은 왜 중요한가?’, ‘문화적 정체성은 어떻게 탄생하는가?’라고 정한 것처럼 저자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어 읽는 내내 질문에 답을 생각해보느라 책읽기의 속도를 낼 수 없었습니다.


자기결정의 삶을 살려면 외부로부터의 압력이 없이 내적 독립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런 경지에 오르려면 우선 스스로를 테마로 삼아 스스로를 알아가야 합니다. 구체적 방법으로 자신을 말로 표현하고 시간을 이야기하라고 합니다. ‘경험된 과거를 말로 표현하는 것은 두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는데, 하나는 자아상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허락하는 면과 그 모든 자아상이 진위가 모호하고, 착각과 자기기만과 자기 설득으로 가득 찬 구조물이라는 면입니다. “기억은 이야기될 때 이해 가능한 것이 되고 우리는 기억의 힘없는 희생양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다(26쪽)”라고도 했습니다. 자기결정을 제대로 하기 위하여 문학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이어지고, 타인의 시선과 관계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자신에 관해 결정하는 것의 한 형태인데 “글을 쓰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아닌지조차 알지 못한다(55쪽)”라는 막스 프리쉬의 말을 인용하면서, 표현을 통하여 자기인식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결국 글을 씀으로해서 스스로를 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자는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언급합니다. “나는 그레고리우스를 무작정 리스본으로 가게 만듦으로써 그것이 그가 세상에서 존재하는 방식임을 독자들이 얼핏 지나치기 쉬운 평범한 문장들 속에서 느끼도록 했습니다.(61쪽)”


마지막 강의에서 저자는 한 사람의 정체성은 유전자, 신체 구조, 물리현상 등 신체가 가진 조건으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정체성도 중요하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문화적 존재로 만드는 기본능력은 언어라고 잘라 말합니다. 교양을 쌓는다는 것, 그것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다고도 했습니다. 그렇게 얻은 앎의 진실을 가릴 수 있게 되면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는 자기인식이 확고해진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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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역사, 문화
Harvey Green 지음, 김명태 옮김 / 미강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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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으로는 지구상에 있는 나무에 관한 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만, 나무의 나이테가 그려진 표지를 보면 인간의 삶에 들어온 나무의 역사를 정리한 책이라는 성격이 분명해지는 듯합니다. ‘내가 사는 중남부 뉴햄프셔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부분적으로라도 난방을 나무로 한다.’라고 시작하는 머리말이 잠시 헷갈리게 합니다만, ‘몇 천년 동안 이어져온 서민들의 삶에서 나무는 익숙하고 일상적인 재료였다’는 구절을 읽으면 저자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좋은 리뷰방식은 아닙니다만, 저자가 요약해놓은 이 책의 얼개가 아주 잘 정리되어 있어, 그대로 옮겨둡니다. “본 서문에서 인류 역사에 존재했던 목재들의 몇 가지 모순과 복잡성을 관찰하였다. 특히 서양의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목재와 다른 제재들의 관계에서 오는 모순과 복잡성을 다뤘다. 제1장에서는 독자들에게 재료 자체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물리적인 설명을 통해서 나무들의 종에 대해서 설명하고, 목재의 겉모양을 결정하는 결과 무늬 같은 나무의 특징들과 물리적 구조에 대한 간단한 배경 지식을 전달하고 있다. 제2장은 목재의 주거 기능으로 시작하여 책 전반적으로 계속되는 목재의 역할을 분석하고 있다. 제3장은 사람들의 전통적으로 목재를 사용했던 방법을 분석하고, 통나무를 판자, 플랭크(두꺼운 판자), 커브스 그리고 베니어판으로 만드는데서 오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과, 일상에서 사용하는 가공물들과 구조물을 만들기 위해 사람들이 만들기 시작한 판자 및 들보를 사용하는 점에서 목재를 분석하고 그들이 조소, 조각상, 악기 그리고 가구에 어떻게 쓰였는지 이야기한다. 그리고 종교와 예술이라는 입장에서 제5장은 독특하고 중요한 형태의 구조물인 상자에 대해서 설명한다. 배럴과 대바구니에서 서랍장과 관에까지 다양한 발로를 설명한다. 제6장에서는 이쑤시개, 골프 티, 담뱃대, 지팡이, 옷핀, 성냥, 나무젓가락 그리고 장난감과 같이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인간 생활에 꾸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작은 물건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제7장에서는 난방, 음식 저장, 의식과 고문에 대해서 알아보고 있으며 벌목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변해왔는지에 대해서 논의한다. 마지막에는 목재가 건축자재로써 그리고 예술적이며 기능적인 면에서 어떻게 지속적인 매력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끝을 낸다.”


생활공간에서 나무가 차지하는 위치가 얼마나 되는지를 새삼 깨닫게 되는 책읽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웃에 있던 목공소에서 나무를 다듬는 흉내를 내던 어릴 적 추억이라던가, 연필을 깍을 때 예쁘게 깍으려 노력하던 추억까지도 되살리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나무가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될 정도로 성장하려면 적지 않은 세월이 소요된다는 것을 사람들은 쉽게 간과하는 것 같습니다. 당장 필요하다는 이유로 나무를 남획한 선조들의 우로 인하여 지구의 허파라고 할 엄청난 규모의 숲이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도 새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나무에 관한 문화사를 적어 내려가게 됨으로써 나는 인간들이 이 놀라운 자재인 나무에 대한 고마운 마음과 이해력을 갖고 과거를 돌아보며 균형적인 사용을 하기를 바란다.’라고 마무리한 부분이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라고 하겠습니다. 몇 가지 아쉬운 점을 짚어보면, 우선 유럽으로부터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명에서 나무를 어떻게 이용하였는가를 설명하고 있는데, 특히 중국과 일본까지 섭렵하면서 우리나라는 빠트리고 있어서 아쉬웠습니다.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의 목공들은 장부이음을 사용하였는데 동양의 가구에서 보이는 이음들은 심미적인 이유 때문에 더 복잡한 형태를 띠기도 한다.(78쪽)’라고 싸잡아 넘어간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편집상의 실수인지 의도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떼어 쓰기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듯한 기본적인 것부터 매끄럽지 못해 보이는 번역도 눈에 띄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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